31화.
지선우는 까만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언젠가 내게 들려줬었던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마치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나는 가이드잖아, 에스퍼를 지키는.”
‘나는 가이드잖아, 에스퍼를 지키는.’
이곳의 놈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고 나와 첫 싸움을 한 후 했던 말이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내가, 네게, 다른 입장으로서 듣고 있다.
“으아아아…… 파장 얽힌 거 봐. 안 되겠다. 뤙이 날 데리러 오면 같이 협회로 가자! 이 정도로 엉망이라니 너 진짜 힘들었겠다.”
“…….”
“네 파트너는 어디 있어? 몸 상태가 이런데 왜 가이드가 가이딩도 안 해 줬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울컥함을 간신히 삼켜 냈다. 동시에 위가 쿡쿡 쑤시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일그러지는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숨을 크게 고르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이제 와 뭐가 중요하냐.’
계속해서 스스로를 세뇌했다. 괜찮아. 큰일도 아니야. 뤙은 죽었잖아. 괜찮아. 내가, 다시, 잘하면 돼. 현대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자.
하지만 과호흡이 온 것처럼 자꾸만 숨이 헐떡거렸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제발, 진정하자.
“야, 야……. 너 괜찮아?”
탁! 나는 지선우의 손을 아프지 않게 쳐 냈다.
“하, 아, 하아, 흣! 됐…… 어. 어차피 너, 흣, 가이딩 못 해.”
딸꾹질처럼 불안한 호흡을 달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어, 어? 야, 너 지금 이상한데…….”
내 안색을 살피며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지선우를 모른 척했다. 뱃속이 울렁인다. 토가 나올 것 같은데,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그냥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식은땀이 흐르고 자꾸만 위통이 느껴져 괴로웠다. 최대한 침착하려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작은 꼬마에게 휘둘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으응, 매번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니까. 근데…… 이젠 그다지 재미가 없어.]
낮은 목소리와 함께 내 머리 위로 먼지가 폴폴 쌓인 천이 풀썩이며 내려앉았다.
[그대로 잠들면 아마 내일 아침 넌 입이 돌아가 있을걸?]
“…….”
[하아, 설마 아리아한테까지 영향을 주는 건 아니겠지……. 젠장, 미치겠군.]
은발이 다소 불쾌한 목소리로 주절거렸으나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꽤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순애라는 거, 참 병신 같은 거야.]
놈은 한숨처럼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곤 내 곁에서 멀어졌다.
* * *
“진짜 아무것도 없는 곳이네. 와아, 꼭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조그만 몸을 천으로 감싸고 종종 쫓아오는 지선우는 한시도 빠짐없이 떠들어 댔다. 은발이 어떤 식으로 지선우를 구워삶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는 꽤나 담담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에게 기억을 되찾아 줄 만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 정도만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런 대충의 설명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은 게 참 신기했다. 분명 놈의 자랑인 세 치 혀를 놀렸겠지.
‘……혀?’
우욱, 놈이랑 입을 맞췄던 역겨운 기억이 떠올랐다.
“토할 것 같아.”
“뭐? 토할 거 같아?”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알아챘으면서 뭘.”
스리슬쩍 내 곁으로 다가온 지선우가 보였다. 그는 큰 눈으로 나를 보다 대뜸 내 등을 찰싹찰싹 쳐 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등 두들겨 주는 거야. 토해. 거기, 자얀! 이 친구 속이 안 좋다는데 잠깐 쉬고 가자.”
갑자기 아저씨가 돼 버렸냐, 너는? 나는 지선우의 말투를 지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기억을 잃어서 그런지 지선우는 좀 달라져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협회에 막 입사했을 당시의 지선우 같았다. 이리저리 굴러 세상의 풍파를 겪은 능구렁이 같은 부분이 쏙 빠진, 아직은 어리숙한 어린 쾌남 그 자체.
“오랜만에 보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샜다.
그때의 지선우는 나보다 더 불도저 같았다.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괄괄하고 정의로웠다. 약간의 치기 같은 것도 있었고. 나한테 막 대하는 A급 에스퍼들을 혼내 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을 땐 진짜로 난감했는데. 아니, 웃겼었나. 그깟 놈들에게 털을 바짝 세우고 하악질을 해 대는 게 퍽 귀여워 보였었다.
“나름 형이라고…….”
“응?”
“별거 아냐.”
“넌 왜 말을 하다 마냐? 한국인을 미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됐다고. 넌 어디 가서 남 등 두드려 주지 마. 손이 야무지질 못하다.”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그와의 추억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닿아 오는 손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뭐? 저 이씨! 뭐 저런 싸가지가 다 있어……!”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 * *
저거 왜 저렇게 까칠해?
“고슴도친 줄 알겠네.”
지선우는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을 쳐다봤다.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과 처진 눈매, 상처가 이곳저곳 나 있으나 그럼에도 깨끗해 보이는 피부. 따지자면 미남, 아니, 어째 미청년이라는 이미지가 더 잘 어울렸다. 뭐, 아랫도리만 낡은 천으로 가린 게 약간 신사적인 변태처럼 보이기도 했고.
‘우리 애만큼 까칠한 녀석은 또 오랜만이네. 음, 하긴 ‘뤙’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다정히 굴었으니까. 하아, 빨리 돌아가서 우리 애 가이딩해 줘야 하는데. ……또 탕수육만 먹고 있는 거 아냐? 밥 좀 잘 챙겨 먹으라니까.’
그 애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신경 안 쓰면 삼시를 탕수육에 제로 콜라로 전부 해결해 버리는 무식한 놈이라 더욱 걱정됐다.
‘괜히 떠올렸나? 점점 더 보고 싶네.’
지선우는 오도카니 앉아 그 애를 떠올렸다.
협회 넘버 원. 불의 신에게 총애받는 인간. 에스퍼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우상. 세계 유일한 SS급 능력자. 많은 질투와 시기를 받지만 그만큼 빛이 나는 남자. 외모와 재력, 능력 등 뭐 하나 빠짐없이 겸비한 모두의 이상형.
……이나 사실 그에게는 많은 하자와 반전이 있었다.
일단, 생활 능력이 없다. 아예 제로. 설거지 한 번 시키면 그릇 깨 먹는 건 부지기수요, 요리는 젬병이니라.
인간관계는 박살 난 지 오래이며 타인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리는 심각한 집돌이. 고상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취미는 밀린 드라마 보기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기. 한 번 샤워하면 두 시간은 기본에 주변 정리는 당연히 안 되어 있다.
남들은 타고났다 부러워하지만 사실 죽어라 운동해서 만든 몸매인데, 근육이 잘 안 붙는 체질이라 매일매일 자신에게 징징거리기 일쑤. 거기다 심각한 애정 결핍과 질투심, 집착으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런 아이다. 그런 애란 말이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애.’
“……나 찾겠다고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컨디션 조절 잘하고 있어야 하는데 또 다른 에스퍼들이 건드리고 있으면 어쩌지? 하나라도 실수하기만 바라는 하이에나들인데. 참 나, 생각하니 빡치네! 도대체 우리 애한테 왜 그러는 거야. 에구, 울고 있지만 마라. 형이 곧 갈 테니!
“아, 보고 싶다. 뤙.”
지선우는 이름을 뱉어 내면서 무언가 조금 위화감이 들었으나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오늘따라 ‘뤙’이라는 이름이 입에 잘 안 붙네 생각하며.
[자, 네 몫.]
“아! 으응, 어…… 고, 마워.”
[별말씀을.]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자얀이 막 잡은 괴물의 살덩이 하나를 건넸다. 표면이 오돌토돌한 게, 입맛 떨구기에 딱 좋아 보였다. 그나마 불로 구워 잡내를 없애긴 했으나 거기서 거기였다.
‘윽, 비려.’
한 입 베어 문 지선우는 작게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선 먹을 게 이거뿐인 건가?
“하하, 뤙이 왔으면 큰일이었겠다. 걘 비리거나 미끌미끌한 건 못 먹거든.”
지선우가 오물거리며 말하자 바로 앞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던 낙유성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간도 좁아지는 걸 미루어 무언가 굉장히 짜증 나 보였다. 제 말에 불쾌한 티를 내는 낙유성을 보고 지선우는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왜 또 저래? 저거 아무래도 날 싫어하는 거 같단 말이지.’
콰득, 살을 뜯으며 지선우가 낙유성을 노려봤다. 하지만 내심 그는 알고 있었다. 까칠하게 구는 낙유성이 썩 밉지않다는 걸. 어제부터 깨달은 건데, 시선이 자꾸만 저 녀석에게 향했다.
‘으음, 하는 짓이 묘하게 뤙과 닮아서 그런가? 굉장히 신경 쓰인단 말이야. ……챙겨 주고 싶달까.’
“넌 안 먹어?”
“어.”
“왜?”
* * *
왜긴. ‘걘 비리거나 미끌미끌한 건 못 먹거든’의 ‘걔’가 나니까 그렇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지금은 괴물 고기를 먹어 기운을 최대한 다스려야 한다. 나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급할 때를 제외하곤 되도록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젠 배고픔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