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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30)화 (30/115)

30화.

[어차피 서블도 끝이 났고, 가족을 전부 잃었는데 굳이 너랑 꼬마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사라진 거겠지.]

은발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정말 그런 걸까? 나는 깊은 의구심이 들었으나 일단 입을 다물었다. 심드렁한 표정을 한 놈은 술술 주둥아리를 털어 댔다.

[대신 너도 협조해야 해. 아리아의 몸을 되찾을 거거든.]

“지선우에게서 나오겠다는 건가.”

[깔끔하잖아? 넌 꼬마랑 돌아가고, 난 아리아와 단둘이 행복하게 사는 거야. 우리는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도련님. 넌 성질 좀 죽이고 힘이나 빌려 달라고.]

옅게 웃은 놈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놈은 나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그녀가 말하길 두 가지를 찾으랬어.]

“두 가지?”

[응. 고대의 힘. 알파와 오메가. 그 두 개가 필요하대. 다시 말해, 힘을 얻기 위해선 알파와 오메가의 던전을 찾아야 해.]

알파와 오메가라니. 난생처음 들어 보는 단어들이었다. 그러나 돌아갈 방법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찾아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정녕 믿어도 되는 걸까? 만약 전부 거짓말이고 그 끝이 지선우의 몸을 빼앗는 것이라면…….

쉽게 돕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품에 안겨 있던 지선우가 뒤척이기 시작했다. 눈을 뜨려는 것 같았다. 나는 고민을 멈추고 지선우에게 집중했다. 절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으응…….”

“형, 형.”

일단 형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음…….”

지선우가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형이었다. 분명 그런데…… 묘하게 위화감이 드는 건 왜지?

“형, 왜 그-”

걱정스럽게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내게 안겨 있던 지선우가 나와 본인을 번갈아 보곤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러 댔다.

“으아아악!”

그리고…… 짜악! 내 뺨을 후려쳤다.

“너, 너, 너 뭐야. 뭐, 뭔데 왜 나 아, 알몸, 몸이야! 너 이씨,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뭐라고?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지선우가 필사적으로 내 품에서 벗어났다. 손대지 말라는 듯 경멸 어린 눈빛이 꽤나 강렬했다. 마치 내가 싸구려 성인 영화에나 나올 법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형을 쳐다봤다. 형은 거리를 둔 채 손을 뻗어 경고했다. 내가 타인에게 선을 그을 때 자주 하던 행동 습관이었다.

“다가오지 마.”

모닥불 옆 주홍빛으로 물든 하얀 피부, 몸을 감싼 천을 꼭 쥔 작은 두 손, 붉게 달아올라 날 노려보는 고운 얼굴. 예쁘긴 더럽게 예쁜데, 꼴받는 것도 더럽게 꼴받았다. 나는 애써 부들거리는 주먹을 등 뒤로 숨기며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이 든 지 얼마 안 돼서 혼란스러운 거겠지. ……설마 빙의 후유증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젠장, 싸우다가 머리라도 다친 거면 어떡하지?’

나는 여러 가설을 세우며 일단 형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언젠가 지선우가 내게 심사가 뒤틀리거나 단단히 화가 났을 때 써먹던 방법이었다.

“형.”

살짝 뭉개지듯 어린 말투. 큰 개가 ‘작게 짖어’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처럼 목을 울리는 우물우물한 발음이었다.

어느 정도 먹힐 거라 생각했는데, 지선우는 화를 풀기는커녕 내게 또 다른 빅 엿을 투척했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양 미간을 팍 찌푸리며 나를 향해 성질을 부렸다.

“너 나 알아? 누군데 자꾸 형이래?”

내 얼굴이 삭았다는 말을 돌려 하는 건 아닐 테고.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순간 말문이 막혀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구냐니. 지금 X발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네 전 짝이자 현 애인이다, 왜! 그렇게 대답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냐고. 아니, 왜 내가 지금 형이랑 통성명을 해야 하는 건데. 아, 젠장. 뒷골 아파.

[아하……? 이건 또 무슨 장난일까.]

멍해지는 내 정신을 깨운 건 다름 아닌 은발이었다. 놈도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지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선우는 은발이 소리를 내자 흠칫하며 그 역시 경계하듯 흘끔거렸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치는 모습은 아니었다.

“너희…… 에스퍼지.”

침묵이 길게 이어지던 중, 지선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할 생각은 마. 난 가이드니까.”

알거든? 까칠한 말이 목구멍 바로 위까지 들어찼다.

“무슨 의도로 납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큰 실수한 거야. 난 이미 각인한 파트너가 있거든.”

X발, 그 각인 깨졌거든? 난 또 한 번 따지고 싶은 걸 이 악물고 참아야 했다. 속에서 천불이 인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약간 체할 거 같기도 했다. 아니, 이미 체했나. 먹은 게 없어도 속이 뒤집힐 수 있는 거구나.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겨우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선우는 계속해서 쫑알거렸다.

“우리 애 엄청 강해. 후회하기 전에 날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줘!”

주절거리는 얼굴은 조금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 에스퍼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안타까운 점은 그 ‘엄청 강한 걔’를 못 알아보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이젠 무시하는 것도 민망해질 정도로 지선우의 현재 상태가 이해됐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것 같다. 거기다 나와 은발을 납치범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까지.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다.

과연 누가 저 작은 머리통을 건드려 놓은 걸까. 살심이 들끓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인상을 쓴 채 한 손으로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문득 행동을 멈췄다.

‘기억을 잃어? ……운명의 짝에 대해서도?’

눈앞에 떡하니 존재하는 은발 새끼조차 몰라보는 걸 미루어 아마 맞을 거다. 게다가 떠드는 말을 들어 보면 ‘현대 시대에 각인한 짝’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있었다. 즉, ‘내게는 각인한 낙유성 에스퍼가 있다’에서 ‘낙유성’만 지워졌다는 말이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나를 잊었단 건 슬프지만 ‘뤙 바오치호’까지 함께 잊어버리게 된 거라면 나쁘지 않았다. 운명만 사라진다면 형을 다시 내 사람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으므로.

“걔 능력이 뭐야.”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어도 된다.

“뭐?”

“강하다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뜬금없는 질문에 지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몰라? 정말 모른다고? 한국에 살면 우리 애를 모를 수가 없는데……. 뉴스에 맨날 나오지, 팬클럽도 크지, SNS에서도 화제잖아. 협회 넘버 원, 불 능력자들의 워너비! 남친 짤로도 많이 돌아다니는데.”

역시 내가 맞다. 자랑은 아니지만, 협회의 군견이 된 이후 나를 능가하는 능력자는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난 운명은 잊혔으나 ‘현대 시대의 짝’은 잊히지 않았단 사실에 약간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이번 건 내가 이긴 거라 봐도 되려나. 형의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이런 걸 먼저 생각하다니. 형이 알게 되면 역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신이 난 표정으로 떠드는 지선우를 보며 다짐했다. 형의 기억을 찾아 주지 않을 거라고.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현대 시대로 돌아갈 거, 이곳의 기억은 전부 소각되는 편이 형에게도 좋으리라. 그럼 더 이상 쓸데없는 책임감이나 죄책감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겠지.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다. 각인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가이드라서 형을 내 곁에 둔 게 아니니까.

그래, 또 한 번 나를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다. 나는 자신이 있었고, 무섭지 않았다. 그에게 절대적인 인연이 사라졌단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 대단한 놈의 이름이 뭔데?]

내가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은발이 나를 흘끔 보고는 묘한 표정으로 지선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뻔히 아는 주제에 뭔 개짓거린가 싶다.

형은 아마 이름을 기억해 내려다 두통에 시달리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혼란스러워할 테다. 그럼 내가 잘 달래 줘야-

“뤙!”

“뭐?”

“이야, 이 사람들 진짜 오지에서 왔나 보네. 뤙 바오치호잖아. 뤙!”

그러니까.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도 많고, 어리기까지 한 네 현대 각인 파트너이자 협회 넘버 원인 ‘불’의 능력자가.

“……그 개새끼라고?”

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분명 얼굴의 근육은 위로 당겨져 웃고 있을 텐데, 정작 기분은 오물 속에 처박힌 것처럼 더럽고 끔찍했다. 어금니가 저절로 갈렸다. 목과 이마에 핏대가 서고 가슴근육이 팽창했다. 한줄기 피가 입술을 타고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너무 세게 깨물고 있었던 탓이다.

“개새끼? 네가 뭔데 걔를 욕해. 혼자 매일 던전을 돌면서 얼마나 고생하는 앤데!”

지선우가 미간을 팍 좁히고 내게 다가왔다. 당장 사과를 하라는 양 사납게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어이가 없어 픽 비웃자 지선우가 내 팔뚝을 꽉 잡았다.

“너 당장 사-!”

돌연, 지선우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떼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본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지선우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야, 너 지금 네 몸 상태 알고 있어?”

나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우리가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이딩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에스퍼들에게 지선우는 정확히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기, 기다려 봐. 지금 가이딩해 줄게.”

“납치범이라며? 납치범한테 가이딩을 해 주겠다고?”

“응. 해 줘야 해.”

“왜?”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싸늘했다. 당연하다. 지금의 이 광경, 불쾌할 정도로 똑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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