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순정도 저런 순정이 없다.
‘저러다 뒈지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낙유성을 본 자얀이 혀를 찼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지선우가 아닌 본모습, 아리아로 변했다 할지라도 자얀은 망설임 없이 모가지를 땄을 거다. 어차피 이것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니까.
‘피해만 다닐 순 없을 텐데.’
자얀은 낙유성을 흘끔 보다 몇 시간 전의 아리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벌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에게 말했다.
‘[ ‘자얀, 너만을 믿어.’ ]’
언제나 그렇듯 덤덤한 말투였다.
‘[ ‘저 아이는 내 희망이야.’ ]’
그러니 귀찮아도 지켜야 했다.
[……진짜 질투 나는데.]
자얀은 창을 휘둘러 오는 가짜의 목을 쳐 내며 들고 있던 단도로 관자놀이를 푹 찔러 버렸다. 터져 나오는 건 피가 아닌 황금빛의 끈적한 액체. 그는 으웩, 혀를 내밀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급소를 노리는 날렵한 창술과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무투는 전부 아리아의 기술이 맞았으나 진품과 가품은 태생부터 다른 고유의 태를 숨길 수 없듯, 이것들의 공격 역시 어딘가가 어설펐다.
자얀은 거리낄 것 없이 클론을 모조리 썰어 냈다. 심심했던 참에 즐겁기까지 했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되레 잘린 지선우의 머리를 낙유성 쪽으로 던지며 놀리기까지 했다.
모습이 같든 말든, 아리아가 들어가 있는 진짜의 몸이 아니라면 자얀에게 지선우란 그저 타인일 뿐이다. 뭐, 아무튼 제 주인께서 저 애새끼의 생존을 바라시니 그 임무는 꼭 해내야 하는 법. 자얀은 쩔쩔매고 있는 낙유성을 향해 뛰어갔다.
[인기 많네, 우리 도련님!]
촤아악! 낙유성의 맨 앞에 있던 클론의 대가리를 완벽하게 날려 버리자 황금빛의 액체가 둘 사이로 화려하게 튀어 올랐다.
[난 저쪽 하나인데, 넌 얘네 전부?]
자얀이 능글맞게 한쪽 눈을 깜빡이곤 육각형 벌집 안에 갇혀 있는 진짜 지선우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입꼬리는 씩 올라간 채였다.
[정력에 자신 있나 봐? 으응, 난 순애파라.]
대꾸도 없는 낙유성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 자얀은 칼을 다잡고 자세를 낮게 취했다. 그 뒤론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근데 너무 나 혼자만 열심히지 않아?’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자얀은 문득 든 생각에 뚱해졌다. 호응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관심을 주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지켜 주니까 이젠 아예 방어도 취하지 않고 멍을 때린다.
[야, 쉬니?]
골 때리는 놈이네, 이거. 자얀이 혀를 차며 단도를 휘리릭 돌렸다. 너 뭐 돼? 왜 나만 고생이지?
“……그러고 보니, 여기 던전이잖아.”
가만히 있던 낙유성이 갑작스럽게 몸을 휙 돌리곤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클론 사이에 자얀만 덩그러니 버려두고서.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저 망할 새끼가?]
자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오기만 해 봐라,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엉덩이를 두드려 주마.
* * *
잘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굳이 목을 베지 않아도 ‘던전 클리어’만 한다면 저 껄끄러운 것들은 자동으로 사라진다. 게다가 던전을 정복하는 건 내 주특기였다.
판단을 끝낸 나는 재빠르게 던전 깊숙한 곳에 있을 ‘핵’을 찾아 달렸다. 핵. 던전의 형태를 유지하는 중심적 존재. 즉, 보스다.
뛰어다니며 던전의 내벽을 불로 지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극해 놓으면 곧 열을 잔뜩 받아 나타날 터. 나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조잡한 쓰레기일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지선우 얼굴로 나를 능욕해? 너는 태우고 또 태워 아예 재조차 남기지 않을 테다.
다짐하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과 동시에 땅이 크게 진동했다. 바닥을 뚫고 나타난 건 거대한 거미 몬스터였다. 징그러운 다리를 까딱이며 나를 보는 여덟 개의 붉은 눈동자.
[-크르르르르!!]
“하.”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나는 천천히 거미에게 다가가며 하얀 불꽃, 광염을 만들어 냈다.
* * *
[뭔 끝이 없어!]
퍽! 또 하나의 클론 대가리가 터졌다. 자얀의 몸은 찐득한 액체로 범벅이 된 지 오래였다. 분명 쉴 새 없이 죽이고 또 죽였는데 클론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지겨워 죽겠네, 진짜!]
자얀이 짜증을 내며 다시금 클론 하나를 죽인 순간이었다. ─번쩍. 하얀 빛줄기가 사방에서 뻗어 나왔다. 그에 ‘이게 뭐지?’ 의문을 가지려던 찰나.
콰앙-!!
힘의 폭발이 공간 자체를 뒤흔들었다.
[큭!]
후드득, 떨어지는 던전의 잔해와 매캐한 연기에 자얀이 인상을 썼다. 갑작스러운 던전 붕괴에 어안이 벙벙한데 뒤이어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많던 클론이 하나둘씩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자얀은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다 저 멀리 거대한 벌집 또한 무너지는 걸 보고 황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서둘렀던 덕에 다행히 상처를 완벽히 치유한 진짜 지선우를 가까스로 구해 낼 수 있었다.
콰르릉!
자얀은 품 안에 지선우를 안은 채 던전이 무너지는 걸 지켜봤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큰 힘을 낼 수 있는 녀석은 딱 한 명뿐이었다. 자얀은 뿌연 연기를 뚫고 나온 낙유성을 보며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일 벌이는 규모 한 번 크네, 우리 도련님.]
자얀의 빈정거림에 낙유성이 코웃음을 쳤다.
“하, 누가 네 도련님이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 팩 고개를 돌렸다.
[…….]
“…….”
[……!]
“……!”
이내 두 사람이 얼빠진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우리…… 왜 말이 통하지?
* * *
[이왕 이렇게 된 거, 자기소개나 할까?]
낡은 폐건물 안. 심드렁한 놈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아가리 여물어.”
나는 건물 안에 떨어져 있던 오래된 천을 두르고서 지선우의 체온을 올리기 위해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몸이 생각보다 차가워서 걱정됐다.
“어서 일어나.”
손등으로 지선우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형이 듣지는 못할 테지만 진심을 담아 속삭이며.
솔직히 말해서 그가 눈을 뜬다면 지난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용서와는 달랐다. 그저 이제는 실망하는 것조차 벅찼기 때문이다. 없는 일로, 그냥 덮고 싶었다.
형에 대한 원망과 애정이 휘몰아쳤지만 하나하나 따지기엔 나도 많이 지쳐 있었다.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싫었다. 그저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해서, 나는 한시라도 빨리 우리가 함께 행복했던 그 시대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돌아가서 내게 다시 웃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의 ‘평범’을 되찾을 수 있다면 지금의 이 감정들은 전부 모른 척할 수 있다. 분명, 그럴 거다.
나는 지선우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그에게 고개를 파묻었다. 항상 맡아 오던 익숙한 냄새가 풍겼으나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타닥타닥, 내가 피워 놓은 작은 모닥불이 마치 내 마음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
[으응, 너 생각보다 더 싸가지 없구나.]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말이 통한다 한들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저 새끼가 내뱉는 모든 말은 개소리가 맞았으니까.
[저기, 선조니까 아빠라고 불러도 돼?]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했다.
[하아, 진짜 안 궁금해? 왜 갑자기 말이 통하게 된 건지.]
나 역시 어째서 말이 통하게 된 건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깊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내게 중요한 건 지선우, 그리고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딱 두 개뿐이었다.
“…….”
그렇게 놈이 혼자 떠들든 말든 내버려 두고 있는데, 갑자기 흑흑 우는 척을 한다. 뭔가 싶어 쳐다보자 과장된 행동을 취하며 부산을 떨던 놈이 유독 반짝이는 물빛 눈동자로 나를 주시했다. 언제 봐도 인간 같지 않아 소름 끼치는 눈이다.
[나 상처 주지 마. 생각보다 여려서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확 삐뚤어지는 수가 있다?]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재밌어 죽겠다는 목소리를 낸다. 미친 새끼.
[자꾸 무시하면 안 가르쳐 준다? 돌아갈 방법.]
“뭐?”
지선우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놈을 쳐다봤다. 놈은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웃고 있었다. 마치 ‘거봐, 네가 안 넘어오고 배겨?’ 하는 얼굴이라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뭘 그렇게 놀래? 원하던 거 아니었어?]
“원하던 거 알면 똑바로 얘기해. 말장난하지 말고.”
[장난도 못 치겠네……. 으응, 아리아가 말했어.]
놈이 내 품에 안긴 지선우를 향해 턱짓했다. 얘기의 시작은 동경에서의 탈출부터였다. 내용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 장발 놈을 죽인 게 가짜 녀석이라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그 녀석이라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었을 눈엣가시인 나를 살린 것도 가짜라고 했다. 본인과 나를 던전의 벌집에 집어넣고 은발에게 치료가 될 때까지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고.
[혹시 그 꿀을 긴 시간 동안 섭취해서 말이 통하나? 어떻게 생각해, 도련님?]
와중 말이 통하게 된 이유에 대한 가설도 세웠다. 뭐, 이러쿵저러쿵 들은 얘기들은 다 그렇다 치고……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나와 지선우를 절대 보내 주지 않겠다고 한 가짜가 드디어 돌아갈 방법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