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하아……. 달아.]
얼굴을 꽉 잡은 손과 나를 빤히 보는 물빛 눈동자. 모든 게 짜증 났다. 놈은 입맛을 다시다 꿀꺽 침을 삼켰다. 울대가 움직이고 발그레한 얼굴 위로 얄미운 웃음을 띤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놈의 면상을 갈겼다.
거짓말로도 ‘퍽’ 같은 귀여운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있는 힘껏 후려쳤기에 뻐억! 박 터지는 소리가 나왔다.
[악! 으…… 하하하!]
“퉷!”
나는 한껏 인상을 쓴 채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으응, 아무래도 턱 돌아간 거 같아. 좀 봐줘.]
놈은 바닥으로 널브러져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저 X발 새끼가 진짜. 이참에 아주 조져 놓을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던 나는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을 번뜩 떠올렸다.
몇 번이고 뽑히는 손톱. 살을 지지는 뜨거운 쇠. 나를 비웃는 개 같은 면상들. 많은 사람 앞에서 억지로 벌려지는…….
“욱, 우웩!”
이쪽이 현실이란 생각에 기어코 속을 게워 내고 말았다. 나오는 건 노란 위액뿐이었다.
“하아…… 하, 씹.”
한참을 게우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키스의 충격으로 잊고 있던 당장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여긴 어디지? 사방이 어둡고, 눅눅하며, 약간의 습한 냄새가 나는…… 무언가 익숙한 공간이었다.
‘설마, 던전?’
정말 던전이라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휙휙 돌아가는 상황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차라리 돌아가지 못할 거라면 그런 행복한 꿈 따위 꾸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저절로 이가 갈렸다. 신이 있다면 당장 멱살을 잡고 고함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농락을 당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한 번 맛본 행복 때문인지 지금의 현실이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근데, 정말 아까 그게 전부 꿈이라면 왜 내 몸이 정상인 거지? 내 몸은 꿈처럼 완벽하게 치료돼 있었다. 뚫린 어깨도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알몸이란 것만 제외한다면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파장이 얽혀 있긴 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가이딩을 못 받은 것치고 나름 괜찮았다. 능력을 쓰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여전히 널브러져 있는 은발을 흘긋 쳐다봤다. 설마 저 새끼가 치료를 해 준 건가? 아니, 치료를 한다 해도 바로 없어질 상처가 아닐 텐데. 내 묘한 시선을 알아챈 건지 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선 한번 뜨겁네.]
껄렁껄렁 다가온 놈이 픽 웃었다. 여전히 참 재수 없는 웃음이다. ……아까 두 대는 더 칠걸.
[지금 상황이 궁금해?]
“…….”
[흐음, 우리 도련님, 혹시 그거 알아?]
느긋하게 제 입술을 매만지던 놈이 은근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는다. 하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삼류 양아치다.
나는 당당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차피 놈도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린 채라 역겨운 건 피차일반이다. 뭐, 굳이 보여 준다고 딱히 부끄러운 몸도 아니고.
[내가 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쪽쪽 빨아 먹었는데…….]
“하, X발. 이 새끼랑 무슨 말이 통한다고.”
[너 생각보다 달더라. 음, 꿀 때문인가?]
“야. 짖지 말고 꺼져.”
[부끄러워하진 말고. 맛만 좋았으니까.]
차라리 벽이랑 대화를 하고 말지. 놈을 무시하곤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려 했다. 그런데 놈이 내 어깨를 휙 잡아당기더니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짜증이 치솟아 어깨를 잡은 놈의 손을 불태워 버리려 했는데 놈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뭐야. 저건.”
[하하, 장난은 그만하기로 하고. 저길 봐.]
육각형 모양이 여러 개 얽혀 거대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
‘벌집?’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벌집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던전 안에 알 수 없는 존재가 무수하다고는 하지만 저런 건 또 처음이었다. 거기다.
“설마…… 이 X발, 형!”
자세히 보니 육각형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지선우. 눈을 감은 채 끈적한 꿀 속에 둥실둥실 떠 있는 모습이 마치 죽은 사람 같아 보였다.
황급히 지선우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려 했으나 은발이 그런 나를 막아섰다. 뭐야? 미간을 팍 찌푸리고 쳐다보자 놈이 고개를 까딱인다. 마치 자세히 보라는 양. 그제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지선우를 쳐다봤다.
“……!”
주의해서 보니 형의 왼팔이 없다. 정확하게는, 잘린 왼팔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며 아주 조금씩 뼈와 살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치료받고 있는 건가?
[신기하지? 아리아가 찾아낸 곳이야. 그녀는 정말 모르는 게 없어. 나중에 얼굴 보면 감사하라고. 그녀 덕에 너와 내가 살았으니까. 아, 네 걸레짝 같은 몸도 저 안에서 치료된 거야.]
놈이 어깨를 으쓱이며 주절거린다.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놈은 여전히 말이 많았다.
[이제 그녀만 회복되면 돼. 그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너도 네 꼬마 몸이니 소중할 거 아냐? 으응, 나랑 착하게 ‘기다려’ 하고 있자고.]
내 기억은 그 개 같은 지하 감옥에서 두드려 맞으며 고문을 당하다 끊겼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 내리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거기다 깊게 따지고 들자니…… 너무 피곤했다. 몸은 개운했으나 정신은 기억을 되찾자마자 다시 너덜너덜해지고 말았으니까.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는 걸로 고민을 끝냈다. 어차피 내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형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저 등신을 붙잡고 주절주절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 일단은 형이 깨어날 때까지만 기다려 보기로 하자.’
시간이 흐를수록 형의 왼팔은 점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이봐, 도련님. 나 외로운데 반응은 좀 해 주지 그래? 어른은 외로움에 취약하다고, 알아?]
다만 유일하게 순조롭지 않은 게 있었으니. 옆에 앉은 은발 놈이다.
놈은 잠시간 진지한 표정으로 치료받고 있는 형을 지켜보는가 싶더니 곧 지루한지 하품을 쩍쩍 해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운이 나쁘게도 심심풀이의 대상이 나로 옮겨지고 말았다. 무시로 일관하는데도 놈은 굴하지 않고 종알종알 말을 붙여 왔다.
“하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좀 닥치면 안 되나? 존나 쫑알거리네.”
피곤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눈가가 뜨끈하다.
[아하? 방금 욕한 거지?]
놈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픽 웃는다. 내가 뭐 칭찬이라도 한 줄 아나? 병신. 상대하지 말자 싶어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묘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음을 따라 돌린 시선의 끝엔 아까의 커다란 벌집이 있었다.
또옥- 똑…….
황금빛의 액체가 끈적하게 늘어져 바닥을 적신다. 그러다 꽤나 큰 웅덩이가 만들어지자 액체 덩어리가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요동치는가 싶더니 액체가 기묘한 하나의 형태로 변화했다.
두 다리, 두 팔, 하나의 몸통과 머리. 인간이 된 그것이 곧 익숙한 얼굴로 날 또렷하게 바라봤다. 지선우였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진짜’는 여전히 육각형의 벌집 안에 갇혀 있다. 그럼 저건 뭐지?
[마침 적적했는데,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
은발이 느릿느릿 일어나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감으로 두드려 맞혔다. 아마 이 엿 같은 상황에 대한 곤란함을 토로하고 있겠지.
“하.”
나 역시 헛웃음을 터뜨리며 지선우를 쳐다봤다. 아니 지선우‘들’을. 한 명. 두 명. ……약 마흔. 끝없이 불어난 지선우의 클론들이 나와 놈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래, 어쩐지 평화롭더라니. 던전에서 평화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너무 안일했다.
휘익! 클론 하나가 나와 놈을 공격해 왔다. 형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국가 가이드라 해도 그는 아주 기본적인 훈련만 받은, 에스퍼에 비하자면 일반인 수준의 공격력을 지니고 있다. 즉,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휙!
“읏!”
미친! 손날로 노려 오는 부위가 정확히 급소였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제법 큰 타격을 입었을 거다. 형이 저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 설마 겉모습만 지선우고 알맹이는 다른 것에 영향을 받은 건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즘, 클론 하나가 옆에 있던 다른 클론을 흡수하더니 곧 기다란 쇠 창을 만들어 냈다.
“……X발, 돌겠네.”
손안에서 화염을 만들어 낸 나는 공격해 오는 클론에게 맞대응하려다 움찔했다. 아무리 몬스터라 해도 겉모습은 지선우였기에 쉬이 공격하기 어려웠다. 저 얼굴만 아니라면 이까짓 몬스터 정도는 아주 쉬울 텐데.
내가 머뭇거리며 방어만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같이 공격을 받고 있던 은발이 무어라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이봐! 이거, 큭! 아무래도, 아리아의 기술 같은데-!! 젠장, 방심하지 마! 내 자기는 무투와 창에 아주 능하거든? 나도 그녀에게 싸우는 법을 배웠지!]
놈은 클론이 들고 있던 무기를 빼앗고선 선우, ……그러니까 클론들을 무참히 썰어 대기 시작했다. 망설임 한 번이 보이지 않았다. 저게 맞는 건데 어째 입안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