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손가락뼈가 부러지고, 뜨거운 쇳덩이가 허벅지를 지진다.
‘아파. 아프다고!’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눈동자는 모두 겁에 질려 있다.
‘그만해!’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제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려 했는데 두껍고 큰 손이 내 입을 억지로 막았다.
‘[벌써 포기하면 안 되지. 내 차례까지 버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웃는 악마. 아마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지.
“……아.”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유성-”
구해 줘.
“낙유성, 안 일어나냐!”
“……!”
귓가를 울리는 쩌렁한 고함에 눈을 번쩍 떴다.
허억-! 물에서 나온 것처럼 급히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히고 있는 지선우가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불안정하게 뛰었다.
“……형?”
“혀엉? 뭐야. 왜 아침부터 애교를 떨어? 너 또 뭐 잘못했지.”
싱겁게 웃는 지선우는 더 이상 꼬질꼬질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뭐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다시 고문당하기 전에 지선우를 챙겨서 이곳을 달아나야 했다.
나는 급한 손길로 지선우의 팔뚝을 잡아챘다. 진정해야 하는데 손이 달달 떨렸다.
“빠, 빨리 도망가야…….”
“도망을 가긴 어딜 가. 야, 지금 오후 두 시가 넘었거든?”
“X발, 자꾸 답답한 소리 할래?”
“이게 진짜.”
퍽! 머리통을 쥐어박는 손길이 제법 맵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지선우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엉망진창 상태인 나를 때리고 싶냐? 형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울컥해서 화를 내려는데…… 어? 몸이, 아프지 않았다.
“……뭐야.”
당황한 나는 내 몸을 마구 더듬기 시작했다. 뽑혔던 손톱도 제대로 붙어 있고, 손가락도 정상이다. 게다가 옷도 입혀져 있다.
‘잠깐만.’
형을 잡았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이 익숙한 공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왜, 왜…….”
지선우가 넌 어떻게 된 게 죄 새카만 가구밖에 없냐고, 어둠의 자식이니 뭐니 매일 구박하던 커다란 창이 달린 펜트하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 내 집이잖아.’
확실하다. 이곳은 내 집이 맞다.
“너야말로 뭐야. 왜 그래? 미친 사람처럼.”
“돌아…… 온 거야?”
“헛소리야, 자꾸! 이씨, 빨리 준비 안 할래? 오늘 협회 회의 있는 날이잖아!”
거짓말. 진짜? 정말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위해 내 등을 찰싹찰싹 때리는 지선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느껴지는 힘. 내 ‘가이드의 힘’이 느껴졌다. ……왜지? 형은 운명의 짝을 만나 더 이상 내게 가이딩을 할 수가 없을 텐데?
“야. 너 왜 그래, 진짜. 어디 아파? 가이딩해 줄까?”
하, 이거 정말 꿈이 아니구나. 지금이 현실이구나. 내가 개 같은 꿈을 오래 꿨을 뿐이구나!
“다행이다. 형, 형…….”
나는 울컥 차오르는 울음을 참으며 지선우의 어깨로 이마를 기댔다.
“잠깐만 이대로 있자.”
주인의 사랑을 바라는 개처럼 머리를 마구 비벼 댔다. 떨고 있는 나를 알았는지 연신 구박하던 지선우가 조심스럽게 내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토닥이는 작은 손길이 좋아 웃음이 샜다.
“유성아, 형 봐 봐.”
내가 울다 웃으니 지선우가 당황한 목소리로 걱정까지 해 온다. 그래, 이랬던 사람이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사랑한 사람.
“유성아? 낙유성.”
“응. 어,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얼굴 보여 줘. 제대로 봐 봐.”
“별거 아냐. 그냥 잠시, 이렇게 있게 해 줘.”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지선우에게 어리광을 부려 댔고, 그는 평소와 같이 나를 받아 줬다. 드디어 그 개 같은 꿈에서 깨어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야, 너 오늘 이상해.”
“애아 머.”
나는 입안 가득 쑤셔 넣은 탕수육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중짜로 벌써 두 그릇째였다.
“천천히 좀 먹어. 누가 안 뺏어가.”
“어은 애 안 머거.”
“삼키고 말해.”
깨작거리는 지선우를 흘긋 보곤 다시 탕수육에 집중했다. 진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맛있었다. 바삭한 튀김과 달짝지근한 소스. 음, 아무리 꿈이었다 한들 그 속에서 억지로 먹었던 괴물들의 살덩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상의 맛이었다.
나는 탕수육을 또 한 번 가득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간장에 찍어 볼까? 기대감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지선우는 돌연 나를 부르더니 들고 있던 음식을 내려놓고 다다다 쏘아 대기 시작했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해. 알아? 이사장이 지랄해도 웃어, 후배들이 사인해 달라고 하면 해 줘, 귀찮다고 피해 다녔던 인터뷰까지! 거기다 뭐? 에스퍼 예능 프로그램까지 출연하겠다고? 천하의 네가?!”
“하라는데 뭐 어떡해.”
“네가 순순히 말 들을 애야? 야, 나 진짜 걱정돼서 그래. 너 어디 아파? 형한테는 솔직히 말해 줘야 할 거 아냐.”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거야? 그냥 까라면 까는 거지. 추억되고 좋잖아.”
나는 제로 콜라를 한 번에 비워 내곤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지선우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나는 평소답지 않게 방방 뛰고 있었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는다. 솔직히 지금 당장 개똥밭에 구르라 해도 구를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겨우 꿈에 휘둘려 이런다는 게 약간 웃기긴 했으나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너 유성이 아니지. 낙유성인 척하는 외계인이지?”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증명하지? 침대에서 증명하면 되나?”
나는 픽 입꼬리를 올리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선우의 손등을 살살 간지럽혔다. 하지 말라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지선우는 손을 빼지 않고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밖에서 이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형인데. 거부하지 않는 걸 보니 웬일로 동하나 보다.
“변태.”
귓불을 붉게 물들인 지선우가 중얼거렸다. 나는 옅게 웃으며 나긋하게 속삭여 줬다.
“그 변태랑 제일 잘 노는 주제에.”
“입 꿰매 버린다?”
“형, 나 아파. 그만 조-”
“야!”
지선우의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처럼 변했다. 테이블을 쾅 내려치고 일어난 지선우가 한참을 씩씩거리다 몰려드는 시선에 입을 꾹 다문다. 그게 귀여워 입을 동굴처럼 크게 벌려 웃었다.
지선우가 ‘웃지 마. 얄미운 자식아’ 하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내 광대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미치게 행복하네, 진짜.
“사랑해.”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진짜, 사랑해. 선우 형.”
진심을 담은 고백이 먹혔는지 지선우가 푸스스 웃는다.
‘아. 예쁘다.’
나는 계산서를 집어 들곤 지선우에게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너 오늘 각오해라.”
“무서워, 형.”
“아주 콱 잡아먹을 거야.”
“먹히는 게 아니고?”
“이씨!”
* * *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한 침대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땀에 푹 젖은 지선우가 뽀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유성아.”
열에 들뜬 숨소리를 내며 한껏 매달려 오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아름다워서 나는 집요할 만큼 그를 탐하고 또 탐했다. 오로지 나만 가질 수 있는 존재란 사실이 너무 벅찼다.
“형, 형.”
나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나보다 한참 작은 그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지속되는 애무에 끈적한 무언가가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달짝지근한 냄새, 그리고 나를 더듬는 거친 손. 섞이는 두툼한 혀. ……두툼한 혀?
뭔가 이상했다. 형이…… 이렇게 단단했…… 나? 손바닥에 감기는 감촉이 평소와 달랐다. 부드러운 피부와는 상반되는,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낯선 감각. 형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
흡,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그러자 물빛의 눈동자와 반짝이는 은발이 보였다. 은발? ……이 빌어먹을!
“읍! 으읍!”
나는 입을 맞춘 채 집요하게 쪽쪽거리는 은발을 떼어 내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버둥거렸다. 역겨움으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창백해지는 내 안색을 봤는지 놈의 눈이 재밌다는 양 히죽 접힌다. 진짜 죽이고 싶다.
“하아, 하! 씹, 하아……!”
겨우 고개를 옆으로 꺾어 질척하게 달라붙는 놈을 피했다.
[까꿍, 좋은 아침.]
“욱…… 윽, 이, 씹…….”
[으응, 반항하지 마. 봉사 중이잖아.]
놈은 두 손으로 내 머리통을 쥐더니 다시 강제로 입을 맞춰 왔다. 푸흐흐, 웃는 소리가 맞닿은 입술의 진동을 통해 느껴졌다.
재밌냐? 저리 꺼져라, 제발! 벌리기 싫어 이를 악물자 턱에 가해지는 힘이 억세진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고통으로 인해 벌려진 미세한 틈으로 하나의 살덩어리가 뱀처럼 꾸물꾸물 기어들어 왔다.
미끄덩하고 뜨거운 그것이 내 혀를 옭아매고 쪽쪽 빨아 당기며 제멋대로 활개를 쳐 댔다. 지선우와 하던 키스와는 전혀 다른, 다소 강압적인 입맞춤이었다. 혀뿌리까지 두툼한 놈은 꼭 나를 질식시킬 것같이 굴었다.
산소가 부족해 얼굴로 열이 몰렸다. 무슨 키스가 이따위지? 입안을 가득 메운 덩어리가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츳, 쩝- 쩍, 젖은 마찰음이 귓가로 때려 박힌다. 놈은 육중한 몸으로 나를 압박해 꼭 잡아먹듯 가지고 놀았다.
헉, 흐으으! 결국 ‘컥’ 소리를 내며 가슴을 크게 부풀리자 그제야 놈이 물고 있던 내 입술을 놓아줬다.
“으읍…… 으…….”
입가가 축축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게걸스럽게 빨린 적이 없어 충격으로 약간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