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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26)화 (26/115)

26화.

질질 끌려와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그것’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만큼 참혹했다. 나체의 몸은 구타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열 개의 손가락 중 손톱이 있는 곳은 없었으며, 두 개 정도는 반대로 꺾여 있었다. 허벅지와 등은 불로 잔뜩 지져 살이 녹아 있었다.

“유…….”

털썩.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차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것, 아니, 정신을 잃은 낙유성을 향해 손을 뻗던 지선우가 입을 틀어막았다. 끅,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유성아. ……낙유성.”

모든 곳이 아파 보여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지선우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애타게 그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유…… 성아, 유성아. 유성아, 안 돼, 안 돼. 안 돼! 유성아!”

부름은 절규로 변했고, 절규는 곧 처절한 울음소리로 변했다.

[숨은 붙어 있다.]

“어, 아…… 안, 흐…… 유성아, 유, 안 돼…… 이, 아…… 아!”

[너만 내 곁에 남는다면 치료해 주지.]

“죽…… 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엔 증오만이 가득했다.

“죽여 버릴 거라고!”

지선우는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뤙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뤙은 악에 받쳐 저를 죽이겠다 달려드는 지선우의 손목을 손쉽게 잡아채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다.]

“놔, 놔! 죽여 버릴 거야, 너!”

[내 곁에 남아.]

“너!”

뤙이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우두커니 서 있던 문지기가 칼을 빼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쓰러져 있는 낙유성에게 닿았다.

“……!”

[날 평생 미워해도 좋다. 이렇게라도 널 내 곁에 둘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족해.]

옅게 웃으며 뤙이 말했다. 지선우를 향한 그의 눈동자에는 광기 어린 사랑이 가득했다. 뤙은 기다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던 푸른 비녀를 빼 지선우에게 건넸다.

[내 어머니의 유품이다. 네 스스로 받아. 그럼 놈은 살려 주마.]

결국 스스로 곁에 남을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지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턱을 타고 바닥을 적셨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낙유성을 쳐다봤다.

“……약속해.”

[…….]

“유성이, 살려 줘……. 제발.”

지선우가 고개를 푹 숙이며 비녀를 스스로 집어 들었다.

[그래. 약속하지.]

뤙은 웃었고, 지선우는 울었다.

“……미안해, 유성아…….”

그렇게 뤙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지선우가 낙유성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중얼거린 찰나였다. 몸을 크게 움찔한 지선우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뤙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벌써 아양을 떠는 건가?]

뤙이 그가 자포자기하고 스스로 안겨 온 거라 착각한 순간, 휘릭! 방금까지 지선우가 쥐고 있던 푸른 비녀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갔다.

[……!]

다만 그의 손이 아닌 목에 꽂혀서.

[ “하…….” ]

가벼운 손놀림이 정확하게 경동맥을 노렸다.

[ “젠장, 단단히도 꼬여 버렸네.” ]

촤악,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쓰러지는 뤙의 앞에 그가 원하던 지선우가 아닌 다른 지선우가 서 있었다.

[ “뭐 해? 안 뒈지고.” ]

눈썹을 까딱이며 그가 아닌,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문지기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아리아는 뤙의 목에 꽂혀 있던 비녀를 빼 들곤 웃었다.

[ “누구 허락받고 저 꼴로 만들어 놨어? 내가 어떻게 찾은 물건인데.” ]

아리아의 두 눈은 쓰러진 낙유성을 향해 있었다.

[감히 뤙 님으을! 이 새끼가아!]

문지기가 하늘 높이 칼을 들어 올려 곧장 아리아의 목을 내려치려 했으나 그녀가 한발 더 빨랐다.

아리아는 쥐고 있던 비녀의 아랫부분을 바닥에 마찰시켰다. 카칵! 듣기 어지러운 소리가 나며 짧은 불꽃이 튀었다. 유품이라 불리던 아리따운 비녀가 이제는 누군가의 목숨을 거둘, 더욱 날카로운 무기로 변했다.

[ “충견, 주인 곁으로 가야지!” ]

[……!]

촤악! 허공으로 하얀 팔 하나가 날아감과 동시에 사내의 목에서도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왼팔을 버린 대가로 문지기의 목을 정확히 그어 낸 거다.

[ “퉷.” ]

아리아는 입안에 들어간 비린 피를 뱉어 내며 꺽꺽 숨을 몰아쉬고 있는 뤙에게로 다가갔다.

[네…… 끄윽…… 도…….]

동경의 패왕이라 불리던 사내가 운명이란 거죽을 뒤집어쓴 악인에게 뒤를 잡히고 말았다. 그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리아는 뤙을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운명?” ]

툭. 사내의 위로 주저앉은 아리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려 댔다.

[ “웃기지 마.” ]

아리아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푹푹! 여러 번의 끔찍한 소리가 울리고, 어머니의 유품은 다시 한번 아들에게 돌아갔다.

[ “운명이라는 게 어딨어. 그딴 게 있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외팔로 묵직한 무게의 낙유성을 겨우 둘러멨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절대 넘어지지 않았다.

[ “봐. 난 네 행운의 여신이 맞다니까.” ]

피를 뒤집어쓴 그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아름답게 웃었다.

[ “그러니 너도 내 기적이 돼 줘야 계산이 맞겠지.” ]

* * *

‘세계수가…… 아리아가…….’

사지를 결박당해 고문당하는데도 자얀을 괴롭게 만드는 건 오직 아리아뿐이었다. 어미를 잃은 새끼. 창조주를 잃은 피조물. 삶의 방향을 잃은 인간.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졌다. 자얀에게 아리아란 그랬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아 어지러운 세상에 덩그러니 놓였을 때 따스함을 알려 준 유일한 사람. 자얀에겐 그녀가 누이이자, 부모이자, 순애의 대상이었다. 전부라 표현해도 될 만큼.

막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바로 본 것을 부모로 인식하듯, 아리아에게 처음으로 받은 사랑은 자얀에게 거대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걸 잃었다. 무려 두 번이나.

[으…… 으…….]

자얀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고운 얼굴이 잔뜩 구겨져 보기 흉할 정도였다. 끙끙, 내뱉는 신음이 강아지 같았다. 뼈대가 굵고 듬직해 보이는 체구의 사내가 겨우 한 인간의 부재로 무너졌다.

‘또 말없이 사라지는 걸까. 얼마나 그녀를 기다려야 할까. 이번에는 어디서 둥지를 틀어야 하지?’

바로 그때였다.

[ “자얀.” ]

썩은 생선 같던 자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그토록 바라던 인물이었다. 비록 겉모습은 다르나 자얀은 알 수 있었다. 아리아! 그녀가 살아 있었다.

‘세계수가 없어도, 작은 꼬마의 몸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거구나!’

바닥으로 떨어졌던 희망이 하늘 높이 올라왔다. 행복함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런데…….

[뭐야, 그거?]

침착하게 다시 살펴보니 팔 한쪽은 어디로 간 건지. 등 뒤에 업은 건 또 뭔지.

[챙길 건 나 하나 아니야?]

좋았던 얼굴이 구겨진다. 자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아리아를 새침하게 쳐다봤다.

[너무해, 아리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투정에 아리아는 픽 웃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 “안 돼. 투정 받아 줄 시간 없어. 잘 들어, 내 사랑.” ]

우지끈! 손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가볍게 손목을 돌린 자얀의 두 눈은 오직 아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뺨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뭐든지. 말만 해.]

[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네게 제일 중요한 건 아직 나일까?” ]

아리아의 담담한 질문에 자얀이 성을 냈다.

[실례되는 질문이잖아. 아직이 아니야. 언제나지.]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을까, 아리아가 웃는다.

[ “좋네.” ]

그녀는 감옥을 밝히고 있던 작은 촛대 하나를 턱짓했다.

[ “자얀, 동경의 시선을 잡아 둘 무언가가 필요해. 그 안에 우리는 여길 탈출할 거야.” ]

자얀의 물빛 눈동자가 천천히 작은 불꽃을 향해 스르륵 움직였다. 이내 시선은 감옥 안 가득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와…… 나머지를 향했다.

[ “걱정 마. 불탈 건 많아.” ]

* * *

[감옥 아래서부터 불길이!! 당장 아이들부터 대피시켜!]

[뤙 님을 불러와-!]

[감옥 안에 있는 것들은 포기해! 어차피 서블의 벌레 새끼들이다!]

[젠장, 무슨 일이야!]

[불길이 너무 심합니다!]

[뤄, 뤄, 뤙 님이 습격을 당했다아-!]

쩌렁하게 울리는 수많은 말 중 마지막 외침으로 인해 동경이 크게 뒤집혔다. 작은 불은 곧 몸집을 불려 거대한 타오름이 되었다. 마치 태양과도 같아 멀리서도 충분히 보였다. 많은 생명을 먹어 치운 붉은 태양.

헉헉, 빠르게 달리는 두 명의 인영 중 덩치가 큰 쪽이 만신창이의 사내를 다시 추슬러 등에 업다 흘긋 뒤를 돌았다. 그의 두 눈이 반달로 히죽 접혔다.

‘고마워, 다들. 그동안 내가 지켜 준 값 이걸로 퉁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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