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하…….]
은발의 기운이 더욱 섬뜩해지고, 또 다른 날카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이 기운 또한 만난 적이 있다.
“왜…….”
지선우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나와 지선우의 앞을 막아선 커다란 등. 흩날리는 검은 장발.
[데리러 왔다. 선우.]
“뤙!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
[걱정 마. 네 신비한 힘 덕에 많이 나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좋은 상태야.]
[이게 누구야. 으응?]
[난 내 것을 받으러 왔을 뿐.]
[선우는 내 거야. 안 줘. 멍청이, 등신, 머저리 새끼야.]
[아니. 내 거다.]
[널 바로 죽였어야 했는데…… 갖고 노는 게 조금 재밌어서, 실수했네.]
[그것 역시 배로 갚아 주마.]
은발은 히죽거렸고, 꼴도 보기 싫은 장발 놈은 표정을 굳혔다. 바로 그때,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저 멀리서 새카만 먼지와 짧은 불꽃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
[그렇군. 이 말을 깜빡할 뻔했어. 본진을 너무 비워 둔 것 아닌가. 자얀.]
[……너.]
[아아, 네 소중한 세계수를 지켜야 하지 않나? 네 약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통째로 태우라고 했거든.]
[이 X발, 아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무조건 처죽여 주겠어!]
정색한 은발이 거칠게 소리치곤 급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언어를 모르니 나는 지금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관심도 없고. 그냥, 조금 쉬고 싶었다.
“뤙…… 앗!”
나를 끌어안고 있는 지선우를 본 장발 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곧 지선우를 빼앗듯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오늘 서블은 지워진다.]
“……네? 자, 잠깐만요. 서블이 지워진다뇨? 설마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곧 다시 오마. 위험하니 따라오지 말고.]
장발이 형을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무어라 지껄였다.
“뤙!”
[선우, 말려도 소용없어. 서블의 우두머리는 어중간한 놈이 아니야. 보복은 무조건 돌아온다. 그러니 끝을 내야 해.]
“뤙, 기다려요. 난 서블에 그런 짓을 하라고 당신을 풀…… 뤙!”
지선우는 장발과 은발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말…… 도 안 돼. 왜 다들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왜…… 어째서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 거냐고!”
발을 동동 구르던 지선우는 또 한 번의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그러곤 둘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미친 건가? 나는 황급히 형을 따라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너, 뭐 해.”
“놔. 가서 말려야지!”
“뭐?”
“저긴 아이들도 있어! 거기다 어느 정도 내 책임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 네가 무슨 힘으로.”
“유성아.”
“하아…… 됐고. 우린 가던 길이나 가자.”
“그게 무슨 말이야?”
지선우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기, 저 마을에 애들이 있다니까, 유성아……? 여섯, 일곱 살밖에 안 된 애들이야. 그런데 가자고?”
“어차피 나랑 돌아가려 한 거 아니야? 그럼 그 후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땐 어떡하려고 그랬냐?”
“비꼬지 마. 도와줄 수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가.”
그가 고개를 젓곤 이어 말했다.
“넌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팍! 지선우가 나를 뿌리쳤다. 그러곤 죽을 수도 있는 전쟁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 저런 사람이지. 약자를 위해 언제든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 과거엔 그런 부분이 참 좋았는데 지금은…… 원망스럽기만 했다. 못나게도 형이 아이들이 아닌 장발을 걱정해 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도 의심뿐이구나. 많은 실망과 배신감을 느낀 건 사실이나 그것이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이유가 되진 못했다. 결국 나는 욕설을 씹어 삼키며 지선우가 뛰어간 방향을 따라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눈을 돌리는 곳곳마다 숨이 끊긴 사람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맵고 싸한 연기는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지선우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선우!”
[으아악!]
[저쪽이다!]
캉! 카앙!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형을 찾아 뛰어다니던 나는 지선우가 아닌 은발과 장발, 두 놈의 싸한 기운을 느끼고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열받지만 어째선지 지선우가 그쪽에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 묘한 나무 앞에 피투성이가 된 은발과 장발이 대치하고 있었고, 그 옆엔 언제 다친 건지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지선우가 있었다.
“형!”
“유성아!”
지선우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띄게 안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능적으로 제일 강한 에스퍼를 찾아 안심한 걸까, 아니면 과거의 관계일 뿐일지라도 ‘내 에스퍼’의 등장에 안심한 걸까.
그나저나 형이 이 지경인데 저 새끼들은 뭐 하는 거지? 나는 급히 다가가 지선우의 다리를 지혈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았지만 부어오른 발목을 보니 당장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쯧, 짧게 혀를 차곤 일단 형을 업기 위해 어깨를 붙잡았다. 그 순간,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초조히 말을 걸어왔다.
“유성아, 내가 너한테 이런 부탁하는 거 염치없는 거 알아. ……아는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나는 누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제발, 부탁이야. 두 사람을 말려 줘.”
“제정신이야? 이 지경이 돼서도 그게 먼저야?”
“제발, 제발…….”
‘누가’가 아니라 형의 ‘운명의 짝’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바들거리며 부탁해 오는 꼴의 지선우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은…….”
“…….”
“끝까지 나한테 실수한 거야.”
푹 숙인 고개 아래로 바닥이 젖어 가는 게 보였다.
미안해. 들릴 듯 말 듯 한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은발과 장발 앞으로 걸어갔다. 두 놈의 짐승 같은 시선이 내게 한꺼번에 닿았다.
“하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마 지선우에게 풀지 못한 분노가 놈들을 향해 끓어올랐다. 나는 가볍게 목을 뚜두둑 꺾으며 말했다.
“눈 깔아.”
나와, 놈과 놈. 우린 모두 한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 * *
지선우를 원하는 세 남자가 각자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전투를 벌인 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승부가 갈렸다. 한 명의 승자와 두 명의 패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리는 동경이 거머쥐었다. 그렇다고 한 명의 승자가 뤙 바오치호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모두를 꿇리고 왕좌에 앉은 이는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신에게 총애받는 낙유성이었다. 트집 잡을 것 없이 완벽한 독무대였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에 온 뒤로 그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몇몇 불운이 기어코 또 한 번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개 같은 타이밍으로 각자의 우두머리를 지키고자 쳐들어온 동경과 서블의 용병들이 수라장을 만들었고, 그 때문인지 안 그래도 힘의 충돌로 아슬아슬했던 건물이 붕괴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서블의 일원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단 일념으로 동경의 용병이 창을 들어 지선우를 겨냥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콘크리트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머리를 굴리기엔 촉박한 시간. 낙유성은 동선을 가늠할 정신도, 순서를 정할 여유도 없었다.
‘지선우! 숙여!’
그냥 막아야 했다. 콘크리트는 불로. 창은 제 몸으로.
‘……어?’
촤아악, 하얗게 질린 지선우의 얼굴 위로 그의 것이 아닌 피가 한가득 뿜어졌다. 날카로운 창이 낙유성의 어깨를 관통했다. 품으로 묵직하게 안겨 오는 무게, 익숙한 체향. 지선우가 얼이 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뒤에선 또 다른 사내의 절규가 들려왔다. 세계수. 심각한 전투로 인해 날아간 여러 파편으로 세계수가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 보겠다고 재생을 시작하던 세계수의 위로 어림도 없다는 듯 건물의 지붕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자얀은 그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니,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뤙은 전투 불능이 된 두 연적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길었던 전쟁의 승리는 동경이 가져가게 되었다.
* * *
“윽…….”
후끈거리는 어깨의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턱 아래로 똑 떨어진다. 대충 천으로 질끈 감아 놓은 상처에선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환부가 간질거리는 게, 살이 썩어 구더기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또 다른 감옥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이는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탕에 같이 들어간 적 있는 꼬맹이들, 매번 나를 흘끔거리던 노인들, 그리고 붕어 똥 안경과 머저리.
전부 사람 꼴이 아니었다. 특히나 혼자 매달려 있는 은발이 더욱 그랬다. 유일한 독방 안, 사지를 결박당한 놈은 매시간 얻어맞았다. 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칠갑을 했다.
잡힌 포로들이 무어라 절규 같은 울음을 터뜨리면, 놈을 고문하던 다른 놈들은 낄낄거리며 더욱 잔인한 고통을 놈에게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