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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23)화 (23/115)

23화.

“어, 그래. 나 그 사람 신경 쓰이고 안타까워! 그러지 말자고 하는데도 자꾸 생각나. 그런데 유성아, 그거 내가 바란 거 아니잖아. 내가 원해서 그 사람한테 끌리는 거 아니잖아! 내가, 흑…… 내가 나한테 오라고 한 거 아니잖아악!”

감정의 폭발이었다. 형이 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화를 냈다.

“……결국 내 선택은 너고, 너한테 이러면 안 되니까 상처 주지 말자고 노력하는데. 그런데 왜 너는 자꾸 나 미워해? 왜, 왜, 왜애!”

벌떡 일어난 지선우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아이처럼 바닥을 발로 쿵 차며 핏대를 세워 말하는데, 지선우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얼어붙어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지선우는 지쳤는지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는 다른 걸 생각할 겨를 없이 지선우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제야 그가 안심한 듯 소리 내 울음을 터뜨린다. 엉엉, 목이 쉬어라 운다. 내 어깨를 몇 번 내려치다가, 등을 꼭 끌어안다가, 마치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지선우는 내게 매달려 서러움을 토해 냈다.

“나한테 그러지 마, 유성아.”

끅끅 뭉개진 발음으로 겨우 들려온 말에 심장이 시큰해졌다.

고작 사랑이 대단한 운명을 이길 수 있을 리가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고작 사랑이기에 대단한 운명을 꺾을 수 있는 거다. 정해진 짝이 아님에도 함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린 서로를 원했다.

‘역시, 나는 형을 놓을 수가 없어.’

그 녀석의 운명을 나의 순애가 이겼다. 나는 지선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다른 이들이 그를 데려가지 못하게, 아예 보지도 못하게 내 안으로 그를 숨겼다.

바로 그때, 지선우가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나는 듣고도 귀를 의심했다.

“유성아, 우리 이제 그만 여길 떠날까? 둘이서만 있는 거야…….”

그토록 이곳에 남아 모두를 도와주고 싶다고 한 지선우가 드디어 고집을 꺾고 나를 선택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었다. 배시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지선우의 머리에 코를 비비며 눈을 감았다.

“응, 그러자.”

이곳과 안녕만 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문제는 없을 거다.

‘괜찮아.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처음부터 우리 관계를 다시.’

* * *

기다렸던 날이 다가왔다. 바로 오늘 밤, 나와 지선우는 이곳을 떠난다.

나는 그토록 끔찍해했던 괴물들의 살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꿀떡꿀떡 삼켜 냈다. 지선우가 더 이상 날 가이딩할 수 없으니 혹시 모를 전투 상황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 줄게. 형도 나도 할 만큼 했어. 이제 돌아가야지, 우리의 장소로.

* * *

해가 지고 둥근 보름달이 뜬 밤. 나와 지선우는 높은 담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서블의 녀석들이 쫓아올까 마음이 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선우는 더 이상 타인에게 가이딩을 해 줄 수 없는 몸이니 그들에게 별다른 가치가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은발은 아니다. 그 녀석은 형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가이딩과 별개로 ‘가짜’가 빙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괜찮아?”

“하악, 헉…… 하, 으응. 계속 가자.”

비틀거리는 형을 부축하며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딘 순간이었다. 쉬이익-! 날카로운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벌써 들켰나? 나는 본능적으로 불의 장막을 만들려다 가까스로 힘을 억제했다. 불이 피어오르면 위치를 들키게 된다. 날아온 공격은 분명 우리를 노리고 있었으나 그 끝은 정확하지 않았다. 추측이지만 아마 지금의 경고성 사격도 내 힘을 쓰게 만들어 완벽한 위치를 알아내려 한 게 아닐까 싶다.

난 깜짝 놀란 형을 진정시키며 손가락으로 조용히 폐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일단 저쪽에 몸을 숨기고 소리가 잦아들면 다시 움직이자는 뜻이었다. 지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랐다.

우리가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갈 즘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 하나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숨바꼭질할 나이는 아니잖아. 선우!]

“……!”

“쉿.”

사사사삭- 발소리가 많아진다. 최소 서른 명. 빠른 걸음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싸워야 할까? 형을 데리고 저들과 무력 충돌을 하지 않은 채 도망갈 수 있을까? 형이 날 가이딩할 수 없는 이상, 금단의 술을 찾아낼 때까지 내 체력과 컨디션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 잡힌다면 뭐가 됐든 말짱 도루묵. 판단은 빠르게 섰다.

“형. 여기서 나오지 마.”

“유성아!”

“괜찮아.”

나는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형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커다랗게 드리운 달 아래, 반짝이는 은발이 보였다.

화르르. 불꽃을 피워 내자 놈이 나를 발견하곤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안녕. 달이 예쁜 밤이지.]

“…….”

[도련님, 선우는 어디에 숨겼어?]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

[몰라?]

그러나 차가운 눈빛.

“…….”

[그래, 뭐.]

개운하게 숨을 고른 놈은 아주 천천히 활을 집어 들곤 나를 향해 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럼 죽어야지.]

놈의 물빛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입이 찢어져라 웃는 얼굴이 소름 끼쳤다.

[선우, 너흰 죽어도 동경으로 못 가! 내가 몇백 번 죽는다 해도 붙잡아 주겠어!]

끼익- 화살의 촉이 정확히 내 심장을 겨냥한다. 무어라 떠드는지는 모르겠으나 화살 따위로 죽을 목숨을 가지고 태어나진 않았다.

[불꽃은 꺼지기 마련이거든.]

은발이 음산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커다란 늑대 울음소리, 더욱 몰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 모든 것이 나를 자극했다. 이제 지체할 시간은 없다. 막 힘을 사용하려던 찰나, 지선우가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형!”

“아니야! 동경으로 가려는 게 아니에요, 자얀!”

“뭐 하는 거야, 위험해!”

나는 다급히 형의 팔뚝을 잡아 내 뒤로 숨겼다. 그러나 형은 나를 뿌리치곤 덜덜거리는 목소리로 은발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원래 있던 곳으로 가려는 것뿐이에요! 동경에 붙다니, 그건 오해예요!”

[으응, 거짓말은 나쁜 아이만 하는 거야. 애초에 돌아갈 방법도 모르면서.]

“형!”

“믿어 주세요! 우리를 그냥 보내 줘요!”

[뤙을 몰래 탈출시키고 도망가는 지금, 내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하, 재밌네.]

“그 사람을 탈출시킨 건, 주…… 죽게 둘 수가 없어서, 그래서일 뿐이지……!”

……뭐? 지선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롭게 외친 말에 그를 잡아끌던 손에서 순간 힘이 풀렸다.

[이봐, 내가 좋게 구니 호-]

“그게 무슨 소리야.”

은발을 향해 있던 지선우의 몸을 돌려 나를 보게 했다.

“유성아…….”

“묻잖아. 무슨 소리냐고. 그 사람을 죽게 둘…… 수 없었다는 게 뭐야?”

지선우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형은 한참이나 입술을 벙긋거리며 대답을 피하다 입꼬리를 바르르 떠는 나를 보곤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말했다.

“……뤙을 감옥에서 꺼내 줬어. 너랑 도망치기 몇 시간 전에 그 사람을 먼저…… 풀어 줬어.”

“하.”

“아니면 그 사람 오늘 죽었을 거야. 저번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오늘 밤이 그의 처형일이었어. 그래서, 살리려고……. 뤙을 풀어 준 걸 들키면 나 때문에 유성이 너까지 피해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니까, 그 사람 살려 주고, 우리도 돌아가면 아무 문제 없겠다 싶어서…….”

지선우가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이젠 반대로 형이 내 팔뚝을 잡아 왔다. 어째선지 형의 얼굴이 간절해 보였다. 아마 그만큼 지금 내 표정이 볼만하단 소리겠지.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형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돌아가자고 한 거야?”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야! 아니야, 유성아-”

“어느 쪽이 미끼인 건데. 나? 그 새끼?”

“유성아, 그게 아니야! 제발, 응?”

그 새끼를 풀어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곳에 오고 내가 그토록 빌며 돌아가자고 설득할 때는 가이드로서의 책임감이니 뭐니 떠들며 거절을 했던 형이, 겨우 그 새끼 하나 살리고 싶어서 이런 계획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소리다.

뭐가 ‘그 새끼가 아닌 나를 선택한 거다’야. 웃기지 마. ……완벽한 패배잖아. 나는 내 팔뚝을 잡은 형의 손을 쥐었다. 형이 나를 올려다본다.

“지선우, 너…….”

“유성아. 이럴 때가 아니잖아, 응?”

“너한테 난…….”

“가자. 제발!”

“……너한테 난 뭐냐, 도대체…….”

이게 네가 말한 노력이야? 가슴이 쥐어짜지는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지선우가 나를 잡아끈 순간, 은발이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이대로 있으면 심장이 꿰뚫리겠지? 알고 있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무기력해졌다.

차라리 저 활에 맞아 죽어 버릴까. 그편이 지금보다 덜 비참할 거 같은데.

“유성아!! 안 돼!”

지선우가 비명을 지르며 나를 껴안았다. 동시에, 둥근 무언가가 화살을 삼켰다. 일렁이며 허공에 떠 있는 그것은 물로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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