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21)화 (21/115)

21화.

[도대체, 내 머릿속에서 나가질 않는군. 웃긴 녀석.]

뤙은 가볍게 조소했다. 바로 그때.

[……!]

그의 주위를 한순간에 둘러싸는 불. 활활 타오르는 그것은 여전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불태울 것처럼 용솟음쳤다.

저런 엉망인 모습으로 이 정도의 힘을 낼 줄이야. 뤙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너, 재밌구나.]

사냥할 맛이 나는 대상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 * *

엄지로 한쪽 콧구멍을 누르고 킁, 숨을 뱉었다. 고인 피가 빠진다.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치 죽음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내 것을 빼앗길 바에는 목숨을 거는 쪽이 나았다.

‘유성아.’

나의 가이드가 축 늘어진 채 다른 새끼의 품에 안겨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에스퍼의 보호를 받고 있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두껍고 뾰족한 바늘로 반복해 찌르는 것 같았다. 이건 환상통일까, 아니면 강제로 해지 되어 버린 각인의 부작용일까. ……뭐가 됐든 상관없다. 지선우만 되찾으면 된다.

“……형, 기다려.”

내부의 장기가 마구잡이로 헤집어지는 느낌. 겪어 보지 않으면 결코 모를 만큼 꽤나 섬뜩했다. 팔다리도 후들거리는 게, 아마도 극심한 피로를 느낀 몸이 살기 위해 능력 사용의 강제 중단을 알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까짓 몸보다 형이 중요했으니까.

에스퍼에겐 힘의 방출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방법이 딱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흔히들 아는 폭주. 두 번째는 강제 각성. 후자는 말 그대로 본인의 한계를 직접 풀어내는 위험한 각성 방법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억지로 강제 폭주 상태를 만들어 내는 거다.

보통 에스퍼란 스스로에게 제한 아닌 제한을 걸어 놓고 생활한다. 그래야만 주변을 보고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니까.

하지만 강제 각성을 하면 힘의 제한이 풀리는 만큼 아주 위험해진다. 거기다 최단 시간 내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으나 그 힘의 대가가 꽤 잔인했다.

당연한 말이다. 자연스러운 폭주 상태도 에스퍼의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데, 강제로 그런 상태를 만든다는 건 독주를 병나발 부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그러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지켜 줄게.”

기절한 지선우를 향해 지친 얼굴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처음 각인을 맺을 때 내 마지막은 언제나 형의 곁일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각인 따위 없어도 형은 내 짝일 거잖아, 그렇지?

* * *

뤙은 강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패왕이란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능력 사용의 센스도 서블의 우두머리보다 몇 배나 좋았다. 빈말이 아니라, 그의 카리스마 하나로 동경은 보다 몸집이 큰 서블에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로지 뤙 바오치호 개인의 힘이었다. 그건 타고났다 얘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끔은 자얀을 봐주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여유 있는 사내. 그런 포식자가 쪽 하나 쓰지 못하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면 과연 어느 누가 믿어 줄까?

사내에게 난생처음으로 공포를 심어 준 건 다름 아닌 곧 죽을 것 같은 예민한 인상의 이방인이었다.

[커억-!]

뤙의 결 좋던 머리카락은 이미 굳은 피로 인해 떡이 져 있었다. 그는 바닥을 굴러 먼지 덩이를 뒤집어쓴 채 웃었다. 그러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타오르는 화염을 뚫고 걸어 나오는 사내를 쳐다봤다.

이 정도로 밀려 본 적이 있던가? 뤙은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 아주 웃기게도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먼 옛날을 떠올렸다.

부모님께 들었던 신화 하나. 불의 모든 권능을 가진 하늘의 대리자, 백산무녀. 부모님께선 그조차 이기겠다는 철부지 꼬맹이에게 배를 잡아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거대한 설산에 살며, 홀로 몇백 년간 인간을 지켜 오신 분이라지. 그분이 있기에 우리가 태어날 수 있던 거란다. 잘 듣거라, 뤙. 꿈에서라도 백산 무녀님을 만난다면 고개를 조아리고 예를 갖추거라. 그분은 아주 선한 분이나 버릇없는 아이에겐 매서운 호통을 친다고 하셨으니.’

[하아, 쿨럭, 젠장…….]

죽음이 가까워진다. 만약 죽음이 찾아온다면, 훗날 허락받은 육체의 시간이 끝날 때뿐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아…… 운명을 만나자마자 죽는구나. 피식 웃은 뤙은 엉금엉금 기어 제 운명을 향해 다가갔다. 질질 끄는 몸 아래, 피로 이어진 길이 만들어졌다.

‘네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데…….’

* * *

남의 것을 탐냈으면 그만한 벌을 받는 건 당연한 거지. 나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놈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 다리를 무심히 짓밟았다. 핀에 고정된 벌레처럼 놈은 커다란 등을 움찔거리며 괴로운 신음만을 흘렸다.

이제 끝내자. 그리 생각하며 놈의 몸을 꿰뚫을 준비를 하는데, 저 더러운 새끼가 지선우를 향해 손을 뻗는다. 뿌드득 이가 갈렸다. 이곳에 와서 쌓인 분노가 한 번에 터지는 것 같았다.

“끝까지 욕심을 내네.”

화풀이를 담아 조금 더 고통스럽게 보내 주려던 순간이었다.

“……!”

툭……. 투둑……. 쏴아아아아!

비? 거대하게 만든 화염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내 능력을 무력화시킬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나? 거의 폭우라 불릴 정도로 빗물이 쏟아졌다. 분명 이 정도의 힘을 쓸 상태가 아닐 텐데. 푹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놈을 쳐다봤다.

“하…….”

저절로 비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귀를 시끄럽게 하는 폭우 사이로 놈의 손이 지선우의 손과 맞잡고 있는 게 보였다.

지선우는 기절을 한 채 가이딩을 하고 있었던 거다. 99.99% 이상의 미친 매칭률을 자랑하는 가이딩. 운명의 짝이 주는 무한한 치트키. 자신의 에스퍼를 지키겠다는 가이드의 본능.

“……죽이지 말라고? 지금, 지금 내 앞에서 그 새끼를 지키려는 거야?”

목소리가 초라하게 떨렸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왜, 왜!”

나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각인 따위 없어도, 그딴 거 없어도 형은 내 짝이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내가 아닌 건데, 왜!”

악을 써 대도 온 세상을 장악한 폭우 아래 더 이상의 불꽃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쏴아아아. 떨어지는 비에 나와 지선우, 그리고 놈의 피가 한데 섞여 들었다.

“하…… 하하, 하……!”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저 멀리 흩날리는 은발이 어렴풋이 보였다.

‘맞아. 저 새끼도…… 형을…….’

이놈도 저놈도, 그리고 나조차 형을 향한 집착은 지독할 정도구나. 쿵,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지며 생각했다.

‘형, 나 이번 건 조금 힘들다.’

* * *

‘[마지막 용서입니다. 다시 돌아온 게 뻔뻔한 거예요. 처형을 해도 할 말이 없어야 하지만 동경의 뤙을 잡아 왔기에 넘어가는 겁니다. 선우, 이번엔 나도 화가 많이 났어요. 많은 사람이 그에게 상처를 입었죠. 눈이 있다면 보이겠죠?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부상당한 모습이.]’

‘저 때문이에요. 제가 가이딩을 신경 쓰지 못해서 폭주한 거예요. 유성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하아, 가 보세요. 듣기로는 눈을 떴다고 합니다.]’

지선우는 카오루와 나눴던 말을 떠올리며 낙유성을 찾았다. 그날 이후 무려 3일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자신이었고, 유성은 고열에 시달리다 겨우 눈을 뜬 듯싶었다.

손에 든 그릇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프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건더기는 늘 그렇듯 괴물의 사체였다.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아픈 유성이에게 전해 줄 음식이라 생각하니 조금 궁상맞게 느껴졌다.

수프를 내려다보는 지선우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상해. 유성이라면 이미 내 기척을 알아챘을 텐데…….’

들어오라는 말이 없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난 거겠지? 지선우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성아.”

낙유성은 겹겹의 낡은 천 위에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앉아 있었다. 다만 구불구불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는 아주 지쳐 보였다. 옷은 더러웠고, 머리는 떡 져 있었으며, 곳곳에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나 곧던 자세가 구부정했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

문득 커다란 죄책감이 들었다.

“……몸, 괜찮아?”

‘또 나를 지키느라.’

혹여나 유성이가 걱정할까 애써 웃었지만 처지는 입꼬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릇을 든 손이 달달 떨렸다. 지선우는 낙유성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유성-”

“……!”

지선우는 대답이 없는 낙유성이 걱정돼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깨를 잡고 꽤나 세게 흔든 순간, 낙유성이 보기 드물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긴장이 잔뜩 서린 눈동자가 급히 커져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유, 성…… 아?”

다시 한번 지선우가 그를 부르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지선우?”

그러고 보니 낙유성의 시선이 이상했다. 코앞에 자신이 있는데, 초점이 제대로 맞질 않았다. 허공을 보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또 미간을 깊게 구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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