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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20)화 (20/115)

20화.

우리는 바싹 마른 대지를 걷고 또 걸었다. 강이나 숲은 전혀 보이지 않고 무너진 도시가 죽 이어진 길. 믿을 수 있는 건 지선우의 어렴풋한 기억뿐이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이 고된 여정이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재밌기까지 했다. 그 빌어먹을 녀석들이 없는, 나와 지선우만 존재하는 지금이 좋았기 때문에 이대로 평생을 헤매게 된다 해도 싫지 않았다.

문득 이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었지만, 굳이 의문을 품진 않았다.

“발 조심.”

“응.”

“배는 안 고파?”

“왜애, 지네 구이라도 해 주려고?”

능글맞게 물어 오는 지선우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원한다면.”

“으, 이미 땅 아래서 익었겠다. 하아! 목이 너무 말라.”

“그러게. 주변에 마실 게 보이질 않네.”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나 역시 마른 목에 한숨을 쉬었다.

“자, 물.”

나는 힘들어하는 지선우를 향해 머리를 푸드덕 털며 장난을 쳐 댔고, 그는 하지 말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또 한참을 걸어 나도 지선우도 완전히 지쳐 갈 즘 폐건물 하나를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쉬자.”

“응.”

그늘 아래에서 겨우 지친 몸을 쉴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숨을 고르고 있는 지선우를 바라봤다. 가는 몸 구석구석 땀이 흘러내리는 게 퍽 간지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약간의 씁쓸함도 들었다.

만약 우리가 서블로 가지 않았다면 과연 며칠을 버틸 수 있었을까. 몬스터의 공격에는 대비할 수 있겠지만…… 겨우 마실 물조차 구하지 못하는데.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짜증이 솟구쳤다. 내가 할 수 있는 보호는 전투가 전부라는 사실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디서든 지선우를 완벽하게 지킬 수 있을 거라 늘 자신만만해 왔는데, 과연 난 형이 모든 걸 기댈 수 있는 짝이 맞는 걸까? 자꾸 의심이 들었다.

‘확인…… 받고 싶다.’

볼품없는 남자의 인정욕구일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실소가 터졌다.

옆태가 단정한 얼굴이 참 예뻤다. 눅눅한 그늘 아래,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이며 움직인다. 하얀 피부와 가는 몸. 항상 불안정했던 나를 유일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 존재. 나의 구원.

“빼앗기기 싫어.”

“유성아?”

지선우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쳐다봤다. 어느새 우리의 거리는 막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고, 내 심장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지선우의 심장도 이토록 빠르게 뛰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하는데.

“……좋아해.”

천천히 말을 뱉으며 지선우에게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비, 비 온다!”

지선우가 양팔로 나를 밀어냈다.

“마, 마, 마셔도 되나? 목말랐는데…… 잘됐다!”

“…….”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그가 나를 외면하고서 건물 입구로 다가섰다.

쏴아아아아- 거센 비로 인해 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사방을 메웠다. 쿵, 쿵, 여전히 내 심장 소리만이 들려온다.

나는 손으로 빗물을 모아 마시는 지선우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주변은 더욱 회색빛을 띠기 시작했다. 공기가 차가워진다. 나는 입술을 깨물다 팔뚝 아래로 얼굴을 파묻었다. 못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쏴아아아! 한번 내리는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래 내릴 거 같네.”

“응.”

“그…… 너는 목 안 말라?”

지선우의 목소리가 땅을 기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옅게 웃었다.

‘그냥 하기 싫었나 보지. 목이 너무 말랐다니까. 이런 걸로 초조해지지 마. 그러면 진짜 거부당한 거 같잖아.’

어색해지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주의를 환기할 겸 말을 뱉었다.

“조금 기다렸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나갈까?”

“으응! 그래!”

애써 큰 액션을 보이던 지선우가 갑작스레 우뚝 행동을 멈췄다.

“형?”

내 부름에 지선우가 조금 겁을 먹은 표정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거…… 사람이지?”

사람? 지선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매서울 정도로 퍼붓는 빗속에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곳곳이 찢어진 푸른 우산을 들고, 검고 긴 머리를 죽 늘어뜨린 창백한 인상의 사내였다.

……이런 곳에 혼자? 점점 가까워지는 사내를 쳐다보다 급히 지선우를 내 뒤로 숨겼다.

“어어, 어?”

“거기 있어.”

“왜…….”

의문을 표하던 지선우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알아챈 거다. 다가오는 이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 이 세계는 쉽지 않다. 나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다가오는 놈은 에스퍼였다.

등급은 은발과 비슷했으나 다른 점이 있었으니. 커다란 대도와 같은 기운을 가진 은발과 달리 놈은 활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암살자 같았다. 차갑지만 습하고, 또렷했으나 흐렸다. 표현하자면 귀신 같았다.

“유성아…….”

“괜찮아.”

“그치만 비가 안 그쳐.”

지선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꾸 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X발, 구멍이라도 뚫린 양 쏟아지네.

확실히 비가 오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그럼에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불리한들,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니까. 비에 꺼진다면 더 세고 강한 불을, 또 꺼진다면 더욱더 강한 불길을 만들어 내면 된다. 안 돼도 되게 한다. 그것이 나의 신조다.

쏴아아아-!

“……!”

비가 더욱 거세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놈이 거리를 좁혀 왔다.

“지선우! 멀리 떨어져!”

나는 지선우에게 도망가라 외치며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 냈다. 놈과의 거리를 다시금 벌리기 위해서였다.

모든 걸 잡아먹을 것처럼 화르르 타오르는 불이 하나의 벽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놈은 아주 간단히 내 방어를 뚫었다. ……역시 이 비, 저놈의 힘이구나.

“씹.”

상대가 좋지 않다. 하필 걸려도 상극인 물이라니.

[너, 강하군.]

이놈은 은발보다 능력을 다루는 솜씨가 좋아 보였다.

“시끄러워. 짖지 마.”

최대한 빠르게 끝내려면 조금의 무리를 해야 했다. 치익, 내 피부 위로 떨어지는 빗물이 금세 증발해 작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눈가와 목으로 불룩 굵은 핏줄이 서는 게 느껴졌다.

‘한 번에 구워 주마.’

숨을 죽이고 본능을 끌어 올렸다. 감이 좋은 건지 놈도 눈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무언가 태세를 취했다. 그렇게 막 놈과 충돌하려던 때였다. 놈의 시선이 어디론가 흐르듯 움직이더니 내 뒤에서 짧게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선우!’

저 개자식이 형을 노리는 걸까 싶어 급히 몸을 틀려 했는데-

“큭!”

“악!”

후드득, 후드득…….

“……아?”

“읍!”

우웩, 쿨럭, 쿨럭! 바닥으로 붉은 무언가가 가득 쏟아졌다. 철퍽대는 소리에 흐린 정신이 돌아왔다. 어째선지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피가 가득 번진 주변이 온통 붉었다. 덜덜거리는 손을 들어 올려 더듬더듬 얼굴을 매만졌다. 눈과 귀, 코와 입, 온갖 구멍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거워.’

나는 꺽꺽거리며 점차 뜨겁게 번지는 고통에 격한 숨을 뱉어 냈다. 설마……. 겨우 고개를 돌려 지선우를 찾았다.

“말, 아…… 아, 형…….”

지선우는 나와 똑같은 꼴로 쓰러져 작은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아, 아…… 왜…….”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왜…….”

각인이 깨졌다.

나와 지선우, 우리 둘의 유대가, 관계가, 애정이, 사라졌다. 서로의 힘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어진 소중한 매듭이 끊어진 거다.

각인 해제는 나와 지선우,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육체적 혹은 심적 문제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동의도, 문제도 없이 강제적인 해지가 일어난다면 그건…… 헛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운명의 짝이란 소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대체 왜……?

[묻겠다.]

“아…… 아…….”

나를 지나쳐 지선우에게 다가가는 놈을 무기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놈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콜록대는 지선우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선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고통이 점차 사그라드는 게 훤히 보였다.

설마, 설마…… 설마.

[나를 부른 게 너인가.]

* * *

“……그 손 놔.”

낯선 언어에 뤙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온통 피 칠갑한 채 위태롭게 몸을 세우고 있었다. 격하게 뱉어 내는 숨을 보니 가만히 두면 알아서 정리될 것 같았다.

그는 흥미 없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금세 거두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품에 안긴 이 시끄러운 꼬마 녀석이었다. 이 신비한 녀석은 소리 없이 자신을 불러 댔다. 이리 오라, 어서 나를 찾아내라, 하고 말이다.

‘몸의 흐름이…….’

뤙은 항상 무겁던 몸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워지는 경험을 했다. 손바닥을 시작으로, 육체 전체에 비단처럼 부드러운 무언가가 스스스 퍼졌다. 수년간 겪은 불면도 나을 것 같았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녀석에게선 다디단 냄새가 풍겼다. 뤙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도, 그저 안고 있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이 녀석은 내 것이다.’

품 안의 꼬마 녀석을 누구에게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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