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평소에 비해 약한 화력이었으나 덩치만 컸지, 쓰레기 같은 내구력을 지닌 괴물의 살은 쉽게 녹아내렸다. 겨우 이딴 녀석한테 애를 먹었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바로 그때. 검은 연기와 꿀렁이는 덩어리 사이로 하얀 손이 보였다. 틀림없이 내가 찾던 사람이었다.
‘지선우!’
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지선우의 손을 잡기 위해 달려갔다. 탁, 그립던 손을 잡자마자 복잡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을 찾았다.
‘그래, 난 역시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돼.’
그러나 겨우 능력 한 번 사용했다고 지선우를 잡은 손이 볼품없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뭐 하는 거야. 형 안 구할 거냐?’
자기혐오가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후으, 흡! 빠져, X발…… 씹, 빠지라고!”
지선우를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살덩이들은 놀라운 속도로 보글보글하며 재생되었다. 이대로면 형이 다시 빨려 들어갈 거다.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손에 힘을 줬다.
제발 좀 빠져라!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쓰던 찰나, 내 뒤에서 두툼한 팔 하나가 불쑥 나오더니 지선우를 단번에 쑥 끌어 올렸다.
[으응? 꼬마잖아. 하, 뭐야. 이 새끼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하아, 하…….”
[너 설마 알고 잡아먹힌 거냐? 하하, 이거 완전 재밌는 놈들이네.]
놈은 지선우를 성의 없이 바닥에 내팽개치곤 허리를 접으며 깔깔거렸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사이코였다.
나는 놈을 한 번 노려봐 준 후 지선우를 급히 끌어안았다. 코 밑으로 손가락을 대 보니 다행히도 제대로 숨을 쉬었다. 다른 상처도 보이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때, 주변 살덩이들이 꿀렁였다. 꽤 크고 오래.
별로 좋지 않은 직감이 들자마자 우리는 이리저리 데굴데굴 구르며 새카만 구멍 아래로 쑥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망할, 먹을 거면 곱게 처먹어어어어!]
은발의 짜증스러운 비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낙하해 어느 한 지점에 뚝 떨어졌다. 징- 울리는 몸이 너무 아팠다.
‘아, 선우 형!’
나는 품안의 그를 또다시 꼼꼼히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겠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괜찮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지선우를 살살 흔들었다. 빨리 가이딩을 받고 이곳을 탈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큭!”
어깨가 타들어 가는 거 같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어깨를 쳐다봤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다.
뭐지?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자 약간의 야광이 도는 무언가가 천장에서 또옥- 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지 자락에 닿으니 작은 연기가 나며 부식되었다.
설마…… 산? 급히 주변을 훑었다. 한쪽에 야광의 액체가 잔뜩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었다. 아니, 곳곳이 그랬다.
“X발…….”
몬스터 새끼, 우릴 소화할 셈이군. 지선우가 일어날 때까지 편히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뼛가루조차 남길 수 없을 터. 긴박히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지선우가 정말 싫어하는 행동이지만…… 죽는 것보단 낫겠지. 형도 이해해 줄 거다.
[이봐, 이 액체…… 아하?]
나는 기절한 지선우의 턱을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오래 굶주린 개처럼 그의 입안을 거칠게 탐했다. 작은 혀를 가득 옭아매 쪽쪽 빨아당기고, 가지런한 치아를 훑고, 고여 있는 타액을 꼴깍 삼켜 냈다. 목젖이 쉼 없이 움직였다.
[참, 게걸스럽게도 빠는군.]
뒤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역시 몬스터의 더러운 살덩이와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의 가이딩이 느껴졌다.
“하아, 하…… 내 거.”
단 감각에 빠져 흥분으로 멍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내리누르고 입술을 떼어 냈다. 텅 비어 있던 몸 안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득 차올랐다.
나는 뻐근한 목을 한 번 돌렸다. 전과 달리 몸이 가볍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봐. 난 귓구멍, 콧구멍, X구멍, 똥구멍 말곤 필요 없어. 다른 구멍이 송송 나기 전에 어서 탈출하자고.]
은발은 내게서 빼앗았던 티셔츠를 훌렁 벗어 지선우에게 입혔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방금 행동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옷을 입히느라 잠시 내줬던 지선우를 빼앗아 다시금 끌어안았다.
[남자의 질투는 추한 법인데?]
히죽거리는 놈을 한 번 흘겨 주고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자 내 주위로 뜨거운 열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막 괴물의 내부를 터뜨리기 전, 나는 방심하고 있던 은발을 향해 발을 들었다.
[……?]
내가 잊은 거 같냐?
“돌려줄게, 밥값.”
뻐억!
[……!]
넌 알아서 살아남아라. 놈을 걷어찬 방향은 산으로 만들어진 웅덩이 쪽이었다.
[이 망할, X발!]
나는 놈을 향해 처음으로 환히 웃어 보였다. 곧 귀가 왕왕 울릴 정도의 커다란 폭발음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고, 나와 지선우는 괴물의 배 속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 * *
“음…….”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이 들렸다. 돌아보니 지선우가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것인지 행동이 둔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새까맣게 그을러 가는 나뭇가지들을 기다란 나무 막대로 들쑤셨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정작 그가 일어나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내뱉든 상처를 줄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유성아.”
부름은 똑똑히 들렸으나 무시했다.
“유성아, 유성…….”
지선우가 몸을 끌고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에서 애타는 게 느껴졌다. 천하의 지선우도 나한테 미움받는 게 무섭기는 한 걸까?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 때였다.
“너 얼굴이 왜 이래.”
“……!”
지선우가 내 턱을 강제로 잡아 돌렸다. 날 쳐다보는 새카만 눈동자 안에 주홍빛 불꽃이 은은히 녹아 있어 아름다웠다. 나는 화가 났다는 것도 잊고 홀린 듯 지선우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답답한 듯, 어쩌면 조금은 분통이 터지는 듯한 말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얼굴 왜 이러냐고!”
“…….”
“누구야. 도대체 누가! 하, 애 얼굴이 왜…….”
지선우의 시선이 마구 흔들린다. 닿아 오는 손가락이 퉁퉁 부은 내 눈꺼풀을 건드렸다. 정작 다친 나보다 더 아파 보이는 그의 표정이 웃겼다.
“응.”
나는 짧게 목을 울리고는 지선우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로 머리를 파묻었다. 그러곤 힘을 빼 그에게 몸을 기댔다. 묵직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작은 몸이 뒤로 젖혔지만, 끝까지 나를 품어 내는 행동이 좋아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야. 낙유-”
“화내지 마.”
나 약하게 만들지 마. 나 버리지 마.
그에게 향했던 집착과 분노는 모두 사라졌다. 그저 형이 나를 불쌍히 여겨 끝까지 함께해 주길 바라는 마음만을 전했다. 아이처럼 그의 몸에 머리와 뺨을 문대자 그 역시 등을 도닥거려 왔다.
“잘못했어.”
“…….”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응?”
예쁨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개처럼 나는 연신 그에게 비비적거렸다. 결국 지선우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드러눕고 말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작고 둥근 머리가 귀여웠다.
“……나도 미안해.”
오랜 시간 내 애교를 받아 내던 지선우가 약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싸움과 달리 화해는 너무나도 싱겁게 끝이 났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지선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금기의 술에 대한 단서를 꿈에서 봤어.”
“뭐?”
지선우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아리아 씨의 기억이 조금씩 보일 때가 있다고 했잖아? 응, 분명히 봤어. 무슨 사당처럼 보이는 곳이었는데…… 음, 솔직히 금기의 술과 관련이 있다고 백 퍼센트 확신은 못 하지만 그래도…….”
“사당?”
“어. 사당인 거 같아. 조금 절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앞에 한 노인이 있었거든? 아리아 씨랑 되게 닮은 할머니였는데, 그분이 뭘 줍고 있더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조각 같은 거. 그걸 줍고…… 아주 잠깐이지만 우리가 살던 세계가 보였던 거 같아.”
지선우는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깼는데 꼭 가 봐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이상하게 길을 알 것 같기도 했어. ……미리 말을 하고 갔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난 그냥 빨리 그곳을 찾아서 너한테 증명해 보이고 싶었나 봐.”
지선우가 민망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여기 와서 너랑 계속 다투기만 하니까, 내 진심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 같아.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
시선을 맞춘 지선우가 다정히 속삭였다. 촉촉한 붉은 입술이 시선을 빼앗았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곤 알겠다는 의미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 앞으로는 날 두고 혼자 가지 마. 위험하잖아.”
탓하는 소리엔 어리광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지선우는 푸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의견을 나눴고, 결국 지선우가 본 꿈의 장소를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길은 기억해?”
“얼핏. 음, 거의 감이긴 하지만.”
“확인하는 게 좋겠다.”
“응. 가자, 같이.”
지선우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작은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맞잡았다.
그래, 형의 ‘같이’에는 내가 있어야 해.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