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또옥.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며 몸이 흔들리는 듯했다.
[……이, 아!]
귓가에 왱왱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X발, 진짜.]
짜악!
“윽!”
화끈한 통증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허억,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부릅뜬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멍했던 정신이 급속도로 충전되듯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뭐야.”
침을 느리게 삼키며 고개를 돌리니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는 은발이 보였다.
“너…….”
[눈 떴어? 그럼 이 악물어야지.]
—쫘악!
“……!”
골이 울릴 정도로 거셌다. 딱딱하고 큼직한 손바닥이 무방비하게 있던 나의 뺨, 아니, 머리통까지 한 번에 싸잡아 후려쳤다. 나는 절로 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후드득 코피를 쏟았다.
“이, 씹……!”
맞았다는 걸 깨닫자마자 울컥해 놈에게 달려들려 했는데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뭐야?”
정확하게는 양 사지가 축 늘어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게 최선이었다. 거기다 아무리 능력을 써 보려 해도 작은 불꽃조차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몸은 완벽한 기권을 던졌다. 아마 폭주의 여파로 체력이 완전히 고갈돼 그런 것이리라.
“개 씹, 별…… 하아.”
싸움을 포기하고 짜증스럽게 혀를 차고 있으려니 사지 멀쩡한 은발이 무어라 말을 걸어왔다.
[이런, 젠장. 설마 못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체력 보충이 먼저기에 나는 놈을 무시했다. 괜히 말 섞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힘만 돌아오면 아예 재로 만들어 줘야지.
[그런 건 미리 말해야지. 그럼 안 쳤을 거 아냐.]
어깨를 으쓱인 놈이 욕을 하듯 사납게 짖어 댔다. 아, 골 울려.
[돌아 버리겠네. 야, 꼬맹이.]
놈이 쓰러져 있는 내 얼굴 앞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곤 딱딱 부딪쳐 튕겨 댔다. ……개 부르냐?
[미치겠네.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린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젠장, 아무리 나가려 해 봐도 이 빌어먹을 살덩이들이 자꾸만 재생돼. 베어 내고 나가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거 같은데, 그러면 너랑 나랑 꼬부랑 노인네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미동도 하지 않자 놈은 주절거리며 들고 있던 단검으로 살덩어리의 표면을 마구 찔러 댔다. 화풀이하듯 격한 움직임이었다.
[네가 여길 한 번에 펑! 터뜨려 줘야 나갈 수 있다고.]
할 말을 다한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놈이 내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엿 같네.]
후우…… 긴 숨을 뱉은 놈이 문득 내게로 손을 뻗는다. 또 맞는 건가 싶어 어금니를 꽉 깨무는데, 훌렁- 놈이 내 티셔츠를 벗겼다.
“너, 무슨 개짓거리…….”
이게 돌았나? 새삼 미친놈 보듯 쳐다보자 놈이 샐쭉한 표정을 짓곤 꾸역꾸역 내 티셔츠를 입었다.
[추워. 네가 내 옷을 다 태웠잖아.]
“야. 안 내놔?”
[오, 복근.]
“만지지 마!”
[가슴 딴딴한데.]
“이 X발!”
[긴장했어? 젖꼭지가 섰네.]
“손 안 떼?”
[하하, 왈왈 짖는 게 고작이야?]
녀석이 낄낄거리며 내 상체를 마음껏 지분거렸다. 기분이 더럽다 못해 드러웠다.
[너도, 나도, 이대로 못 나가면 X된 거야. 아가야.]
독이 바짝 올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도 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좋아했다. 명불허전 변태 새끼. 언젠가 정말 아스팔트에 갈아 버릴 테다.
[나도 사내새끼 몸엔 관심 없지만…… 뭐, 네가 열받아 하는 건 꽤 보람 있네.]
한참이나 희롱을 당한 후에야 놈의 손장난이 끝났다. 그럴듯한 수확 하나 없이 시간이 계속 흐르고, 놈도 나도 서로를 소 닭 보듯 무시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해야 빨리 힘이 돌아올까 고민했다. 바로 그때, 해결책을 알려 주듯 꼬르륵- 창피할 정도로 큰 소리가 배에서 울렸다. 역시 체력 문제였나 보다. 젠장, 어떻게 배를 채우지? 당장 필요 치의 열량을 채울 수 있는 게 없는데.
꼬르륵! 다시 한번 소리가 울리자 이번엔 은발이 반응했다. 옆에 멀뚱히 앉아 있던 놈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단검을 고쳐 쥐고 꿀렁꿀렁 움직이는 살덩이 앞에 섰다.
혼자 탈출이라도 할 생각인가. 뭐가 됐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없어야 했는데, 놈이 대뜸 살을 한 덩이 베어 들곤 쓰러져 있는 내 위로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윽.”
무거운 체중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이 돼지 새끼가……. 안 비켜?”
성난 욕지거리에도 은발은 내 위에서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되레 내 입가로 그 징그러운 걸 쑥 내밀었다. 설마 먹으라는 건가? 이 새끼 진짜 미친 건가?
[배가 고픈 거였으면 진작 얘길 하지. 으응, 내가 이거 하나 못 해 줄까.]
“무거우니까 비켜.”
나는 고개를 휙 돌린 채 으르렁거렸다.
[쉬이- 주둥이 놀릴 시간 있으면 이거나 씹어.]
철퍽. 은발이 내 입가로 살덩이를 툭 던졌다. 축축한 그것에선 끔찍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하수구와 말라비틀어진 생선 비린내의 조합은 환장할 정도였다. 코를 찌르다 못해 마비시키는 역겨움이 절로 헛구역질을 유발했다.
욱,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나는 살덩이를 떨어뜨리기 위해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은발은 웃고 있지 않았다. 놈은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내 턱을 강하게 쥐어 잡았다.
[아- 해.]
나른히 속삭이는 목소리. 다만 마주해 오는 핏발 선 물빛 눈동자가 놈의 광기를 설명해 줬다.
[벌리라고, 이 머저리 새끼야!]
“큭, 끄…….”
[아하…… 그래, 어차피 아가는 못 알아들으니 내가 비밀 하나 얘기해 줄까.]
“놔, 윽……!”
교활한 여우, 음흉한 뱀 새끼처럼 놈의 눈가가 히죽 접혔다. 반달을 그리는데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
[난 말이야, 아리아만 원래대로 돌아오면 서블을 떠날 거야. 그까짓 마을. 어찌 되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아리아가 세계수로 변하지만 않았어도 그녀와 이곳저곳을 떠돌며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 하아……. 내가 그녀의 정의로움을 과소평가한 거지, 뭐.]
놈의 손가락이 내 입을 억지로 벌렸다.
[아무렴, 그녀가 되돌아올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는데…… 지선우 그 애새끼가 사라졌잖아. 응? 이봐, 그 새끼가 필요한 건 너 하나뿐만이 아냐. 근데 너랑 싸우고 나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어쩔 거야, 너.]
“욱! 우으!”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새끼야.]
강제로 벌린 입안으로 역겨운 살덩이가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목젖을 건드린 탓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내가 괴로워 헐떡여도 은발은 굉장히 평온한 표정으로 행동을 이어 갈 뿐이다.
[쉬이, 쉬. 삼켜. 그래, 삼켜야지.]
“웩!”
콜록콜록! 나는 가까스로 입안 가득 들어찬 살을 뱉어 냈다. 막혔던 숨통이 트여 거친 기침이 반복해 터져 나왔다.
[뱉어?]
놈이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픽 웃음을 터뜨리더니 뻐억! 내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아, 윽!”
옅은 신음이 끊기듯 흘러나왔다. 나는 콜록대며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멍들겠다.]
놈이 감흥 없는 얼굴로 중얼거리곤 또 주먹을 들어 올렸다. 뻑! 뻐억! 타격음이 여러 번 터져 나왔다. 나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놈을 향한 날 선 시선은 지우지 않았다.
[자, 이제 싱겁진 않겠네. 간은 딱 맞을 테고…….]
“컥, 콜록, 흐……. 콜록!”
[이제 먹을래?]
나는 다시 한번 입술 사이를 밀고 들어오는 살덩이를 피해 고개를 비틀었다.
“개자식, 꼭 죽여 버릴 거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항하자 은발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손을 올렸다.
[우리 도련님, 손 많이 가네.]
바로 그때.
“……!”
오싹한 무언가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익숙한 기운. 그건 바로, 그토록 찾고 있던 지선우의 기운이었다.
“……형?”
지금 지선우가 이곳에 있다. 이곳. 이 괴물 안에.
‘지선우가 느껴져. 확실해.’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만약 형이 괴물의 위장에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내가 머뭇거릴 동안 형이 소화돼 버리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급해졌다.
[그만 반…… 응?]
이건 절대적으로, 오로지 단 한 명을 위해서다.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려 불쾌한 살덩이를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비릿한 걸 씹고 또 씹어 꿀꺽 삼켰다. 몇 번이고 뱉고 싶어 울컥하는 걸 인내심을 발휘해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은발은 그런 내 뺨을 손등으로 툭툭 쳐 대며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다.
[옳지.]
맛은 역겨웠으나 묘하게 힘이 채워졌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만약 현대 세계로 돌아가 ‘몬스터를 먹으면 빠르게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면 당장 협회 이사장이 나를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시간을 넘어 납치당했다는 말도 믿어 주지 않으려나. 하,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신병원이든 뭐든 대환영인데.
나는 인상을 쓴 채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륵!
……좋아. 어느 정도의 힘이 돌아왔다. 나는 눈을 감고 최대한 지선우의 흔적을 쫓았다. 힘이 돌아온 만큼 예민해진 감각이 보다 정확하게 그를 찾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