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17)화 (17/115)

17화.

카오루는 악을 써 대는 천천우를 겨우 붙들어 잡았다. 이런 공포감은 처음이었다. 묵직한 공기와 마치 칼날에 베인 듯 아릿하게 느껴지는 파장. ‘본능에 잡아먹혔다’라고 표현하나, 선우 소년에게 배운 대로라면 폭주. 에스퍼가 이성을 잃고 본능에 힘을 맡긴, 멍청하고 안타까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이 정도의 두려움은 자얀과 뤙을 제외하곤…… 아니, 자얀과 뤙 바오치호보다 강해.’

위험했다. 최강이라 불리는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빈다 한들 저 재앙은 이기지 못하리라. 카오루의 날카로운 감이 확신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절대적인 회피와 방어, 그리고 보호야.’

혹시 ‘감히’라는 단어를 아는가? 그 단어 뜻 그대로, 참신한 자살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면 그들은 감히 저 재앙에게 싸움을 걸어선 안 되었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 선우 소년일 터.

[천, 가서 선우 씨를 데려와. 그때까지 이곳은 내가…… 안 돼! 천!]

최소한의 피해를 생각하며 해결 대책을 얘기하던 중 천천우가 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그 눈빛 역시 어느새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천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늑대로 변했다. 건물보다 두어 배는 더 커다란 크기의 늑대였다.

[죽여 버리겠어!]

거대한 사자후. 그의 분노가 얼마나 커다란지 알 수 있었다. 선우 소년에게 ‘가이딩’을 받아 온 덕인지 예전보다 기합이 굉장했다. 바닥을 박차는 네 개의 다리, 발끝에서 빛나는 매서운 발톱. 용맹한 뒷모습을 보던 카오루는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소리쳤다.

[빨리 자얀과 선우 씨를 찾아오세요!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곳으로 오면 안 됩니다. 가서 가족들을 지키세요!]

그러곤 그 역시 묵직한 숨을 내쉬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던졌다.

[비효율적인 무모함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제는 도망칠 방법 따윈 없었다. 거기다 가족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이성이 남아 있다면 좀 봐주시죠. 유감스럽게도 전 자얀처럼 초월적인 힘 따위 없다고요, 유성 군.]

카오루의 손끝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던 돌조각들이 모여들었다. 버석한 돌들이 잠시 반짝거리더니 하나의 사슬처럼 이어졌다. 한없이 이성적인 얼굴의 사내가 서툰 미소를 띠며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서블은 동경에 딱 한 번 테러를 당한 전적이 있다. 물론 그 후엔 자얀의 적극적인 경계와 방어로 흔들린 적이 없었다. 고로, 이런 끔찍한 사태는 오랜만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자얀은 피가 낭자한 현장을 느릿하게 훑었다. 카오루와 천천우를 비롯해 다른 부하까지 모두 넝마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저번 지하에서의 싸움 때보다 더 처참했다. 추측이건대 그때는 아마 도련님이 어느 정도 힘 조절을 했던 거 같다.

[……이런.]

자얀의 탄식에 진득한 피를 뒤집어쓴 낙유성이 뒤를 돌았다. 사람이라기엔 모든 게 검고 붉었다.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그거 아나? 무는 개는 사람과 같이 살아갈 수 없어.]

입꼬리를 끌어 올린 자얀은 늘 그랬듯 웃고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시린 분위기를 풍겼다.

[이번엔 여든 번은 태워야 할 거야. 들개 도련님.]

* * *

평범한 일과.

보통 여덟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 기상을 한다. 형이 등을 찰싹 때리면 비몽사몽 일어나 욕실로 간다. 그 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들르는 이모님이 만들어 두신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 그러고 있으면 지선우가 늘어놓은 빨래를 주섬주섬 모아 들고 나온다.

‘야! 넌 무슨 허물 벗냐!’

형의 잔소리가 시끌시끌 들려올 즘 식탁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간다. 거기서 쪼그려 앉아 핸드폰 게임 몇 판을 하고 있으면지선우가 귀신같이 찾아온다.

‘죽는다. 낙유성.’

한바탕 핀잔을 먹고 열심히 옷을 주워 입는다. 그렇게 열두 시, 협회로 출근해서 회의하고 던전을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저녁이 된다.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지선우에게 가이딩을 받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 메뉴는 늘 그렇듯 중식. 가장 좋아하는 탕수육과 제로 콜라를 시킨다.

‘딴것 좀 먹음 안 돼?’

질렸단 표정으로 지선우가 구시렁거리지만 결국 내게 맞춰 준다.

음식을 먹으며 여러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아홉 시 정도가 된다. 다른 놈들과 어울려 시끄럽게 노는 것에는 관심이 없기에 지선우와 데이트를 하거나 집으로 돌아가 밀린 영화를 본다. 서로 마음이 맞으면 끈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정말 나쁘지 않은 일상이다. 아니, 행복했다. 소중하고 따뜻한 하루다.

‘본 거 또 봐?’

‘아는 맛이 무서운 거야.’

‘으으, 지겨워.’

‘너도 아는 맛 좋아하잖아.’

‘……이! 야, 야!’

‘허, 아이스크림 얘기한 건데 얼굴이 왜 빨개지냐?’

잠이 들기 전까지 지선우 놀려 먹는 건 취미이자 특기.

내 옆에는 언제나 지선우가 있었고, 그건 아주 당연한 거였다. 언제까지나 이럴 거라 믿었다. 가이드에게 제대로 된 가이딩도 받지 못하고 폭주하는 머저리들을 보며 나는 절대 저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실컷 비웃기까지 했는데…….

“학, 하아! 하!”

그랬는데…….

“허억…… 헉. 서, 선우, 선우야. 지선우!”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진 핏물을 멍하니 쳐다봤다. 뜨끈한 코와 시큰한 눈가. 무언가 번쩍이며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긴 꿈을 꾼 느낌이다. 나는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내 손에 들려 있는 무언가를 내려다봤다. ……반쯤 까맣게 탄 은발이었다.

“…….”

놈은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었고, 주변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나는 형이 이 새끼랑 도망간 게 아니라는 사실 하나로 안심했다.

나는 쥐고 있던 놈을 쓰레기 던지듯 바닥으로 툭 던졌다.

“아…….”

폭주의 여파가 다시 밀려온다. X발.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지선우는 어디 있는 거야? 왜 내게 오지 않는 거야.

“……형.”

고개를 푹 숙였다. 힘을 집중해 봐도 지선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 비틀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뒤죽박죽 엉망인 머릿속으로 지선우에게 바칠 사과를 연신 되뇌었다.

‘내가 전부 잘못했어. 말실수한 거야. 심하게 굴어서 미안해. 다시 돌아와 주면 안 돼? 설마 날 버린 건 아니지?’

그러나, 결국 나를 지배한 건…….

“넌 못 떠나. 지선우.”

그에 대한 새카만 집착이었다.

“찾아낼 거야.”

* * *

서블의 담이 무너졌다. 거대한 불꽃의 폭발 이후 무서운 속도로 무언가가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뿌연 연기가 반복해 피어오른다. 들려오는 건 괴물의 찢어지는 비명과 낡은 건물의 붕괴 소리.

‘악신이다!’

노인들은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들을 품으로 안으며 생각했다. 저것은 세계의 종말을 가지고 올 악신이라고.

* * *

지선우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딨어. 어딨는 거야.’

앞을 향해 나아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을 하나하나 불태워 가며 지선우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집중했다.

허억, 헉! 순간 핑 도는 머리에 다리를 멈췄다. 매캐한 연기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문득 돌아본 뒤편은 처참했다. 산을 쌓은 괴물의 사체와 부서진 도시의 잔재들. 마치 내가…… 괴물 같았다.

후드득, 다시금 떨어지는 코피를 손등으로 연신 닦아 냈다. 이 정도로 능력을 써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무언가가 개운하면서도 불쾌했다. 몸은 흥분되는데 머리는 물속에 잠긴 것처럼 멍했다.

“아…….”

목을 울리던 나는 곧 소리 높여 비명을 질러 댔다.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다. 집착이 점점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찾아내면 발목을 부서뜨려 버리겠어. 다시는 내 옆에서 사라지지 못하게. 감히, 감히 형이 나를 버려?

눈가가 뜨거워졌다. 피로 흠뻑 젖은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자꾸만 삐- 이명이 울렸다. 지선우를 찾기 위해선 침착해야 했다. 그 생각 하나로 숨을 고르며 예민해진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죽은 줄 알았어?]

휘익! 날카로운 단검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더라면 왼쪽 눈알에 박혔을 거다.

어느새 몸을 복원한 은발이 나를 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허억, 헉…… 하아, 하.”

녀석과 나는 다시 한번 대치했다.

[내가 좀 질겨.]

숨소리를 죽이고 목을 물어뜯기 위한 최고의 타이밍을 노리던 때. 놈과 내가 동시에 움직였다. 완벽히 꿇리겠다는 의지로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쿵! 쩌억-!

[……!]

“……!”

이런 X발……. 서로를 향했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옆으로 움직였다. 두꺼비를 닮은 거대한 괴물이 입을 쩍 벌린 채 우리를 향해 녹색의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고 있었다.

방심했다. 신경을 전부 은발에게 쏟은 탓이다. 나는 재빨리 괴물을 향해 능력을 쓰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작은 불꽃조차 만들 수가 없었다.

아, 젠장. X됐네. 두꺼비의 입안으로 삼켜지며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