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사실 지선우의 말이 옳았다. 발정 난 짐승 새끼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 잠자리를 요구하는 게 어이없을 만했다. 그저 확인받고 싶다는 욕심으로 내 짝에게 무례하게 굴고 있다는 이기심을 스스로도 알았다. 거기서 그만두는 게 맞았다. 그냥 알겠다,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감정적으로 꽤 몰려 있었기에 결국 매너 없는 개짓거리를 택하고 말았다. 언성은 높아졌고, 나는 내가 제일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 됐다. 섹스가 곧 사랑이라 믿는 멍청이도 아니면서 지선우가 잠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에게 떼를 쓰고 화를 냈다.
지선우는 차근차근 나를 달래다 점점 표정을 굳히더니 ‘네가 자자고 하면 난 자야 해? 내가 네 섹스 파트너야? 적당히 해.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지?’ 하며 팩트로 나를 조졌다.
사실 형에게 내가 더 이상 첫 번째가 아닐까 봐. 형 안중에 내가 없을까 봐. 형이 나 말고 저 새끼를 사랑하게 될까 봐. 그 모든 불안에 대해 조곤조곤 얘기하고 싶었으나 실제로 나가는 말들은 구리기 그지없었다.
뒤죽박죽 섞인 분노와 불안이 나를 쓰레기로 만들었다. 모든 게 내 의지였으나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이런 건 내가 아니었다.
지선우와 말을 주고받는 와중 머릿속으론 스스로를 열두 번은 더 찔러 죽였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장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왜 이토록 멍청할까? 없어 보이는 스스로가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지선우여도 이런 낙유성은 별로일 거 같았다. 형한테는 늘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이었는데 이젠 그냥 영이다. 영. ‘0’. 제로.
“낙유성, 할 말 없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리게 굴어서 미안하다. 아니, 그냥 뇌 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를 하려 했는데…….
[큭.]
지선우의 뒤에서 비집고 튀어나온 웃음소리가 모든 걸 망쳤다.
나와 지선우가 동시에 웃음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놈이 빙글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으응, 미안.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보다시피 우리 거리가 가까워서 자동으로 들리네? 선우의 말을 듣자 하니 상황이 제법 웃겨서 말이야.]
은발이 재밌다는 듯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우리 도련님, 신사가 될 필요가 있어 보여. 봐 봐? 선우가 매우 곤란해하잖아.]
놈이 고개를 작게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본인의 매력에 대한 고찰을 해야지, 그걸 상대에게 떼쓴다고 일이 해결되나? 혹시 영…… 부실한가?]
툭.
“……!”
정말 끔찍하게도 놈의 손등이 내 아랫도리에 닿았다.
짜악! 나는 본능적으로 은발의 손을 쳐 냈다. 창고가 울릴 정도로 매서운 손짓이었다. 은발의 하얀 손등이 순식간에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놈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불쾌하고 또 역겨웠다.
“개짓거리야. 이 X발 새끼가.”
[큭, ……이야. 실하네.]
은발은 괴로워하면서도 한쪽 눈썹을 능글맞게 올렸다. 내 손에 핏줄이 서며 힘이 더 들어갈수록 지선우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갔다.
“유성아! 뭐 하는 거야!”
“너 이 새끼가 뭔 짓 하는지 못 봤어?”
기어코 우리는 두 번째 다툼을 시작했다. 은발이 실수하긴 했어도 장난이라는 지선우와 놈의 편을 드는 거냐고 다시 화를 내는 나.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거기서 그만뒀어야 했는데.
[ ‘‘나’는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자얀?’ ]
열 받은 내가 가짜의 말을 떠올려 지선우에게 실수하기 전에 말이다.
더 이상 너덜너덜하지 않은 곳이 없는 마음으로 서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나는 픽 입꼬리를 올리곤 쥐고 있던 은발의 목을 놓았다. 시선은 여전히 지선우에게 고정돼 있었다. 붉은 눈가가 신경 쓰였지만 내 감정 하나 다스리지도 못하는 지금, 배려 따위를 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뱉지 말아야 할 말을 뱉고 말았다.
“형이 딴맘 있는 건 아니고?”
“뭐?”
“그냥 솔직히 말해. 그럼 X발 어떻게든 알아서 혼자 돌아갈 테니까. 괜히 사람 병신 만들지 말고.”
“야, 너.”
지선우의 목소리가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제대로 상처를 줬나 보다.
‘젠장…….’
그만하라는 머리와 아직 부족하다는 입이 따로 놀았다.
“가이딩하다 맘 맞는 일 흔하잖아. 응? 말해, 몇 명이나 마음에 들었는데.”
혀끝이 썼다. 빨리 사과하고 안아 주고 싶었는데,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나는 되레 잘못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지선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둥근 어깨가 바들거리더니 곧 그의 입에서 흐느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너, 진짜…… 최악이다.”
최악이었다.
* * *
지선우는 나와의 다툼 후 은발과 함께 창고를 떠났다. 그리고 밤이 지나, 다시 해가 뜰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새벽 내내 그에게 전할 사과를 중얼거리는 한편, 은발과 지선우가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두려운 망상에 시달렸다. 반성을 하겠다는 건지, 질투를 하겠다는 건지. 제발 한쪽만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멍청한 나는 그게 안 되나 보다.
물끄러미 창고 문 쪽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른세수를 한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사과해야 해.”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핑, 도는 머리에 잠시 인상을 쓰고 새하얘진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겨우 달래고 창고를 나섰다.
‘만나면 미안하다고 하자. 내가 잠시 미쳤었다고…… 형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하루 반나절을 찾아봐도 지선우는 보이지 않았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형……. 형! 지선우!”
담담하던 나는 어느새 부모의 손을 놓쳐 버린 아이처럼 초조해하며 지선우를 불러 댔다. 불안하게 은발도 보이지 않았다.
‘둘이 같이 사라진 거야? 형이 나를 두고? 이곳에 날 두고?’
평소처럼 그의 기운을 따라가면 될 걸, 여유를 잃은 탓인지 지선우를 찾아내지 못했다. 헉헉, 숨이 차올랐다.
“지선, 우! 야, 지선우!”
배고픔, 불안, 불면, 목마름, 질투, 의심, 혼란, 짜증.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 어디 있어! 형!”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자꾸 머릿속이 삐- 삐- 울리길래 짜증스럽게 머리와 귀를 손바닥으로 퍽퍽 쳐 댔다. 조용히 해. 닥치라고!
갈증이 심하게 인다. 아, 속이 뒤집힐 거 같아. 일렁이는 에스퍼 특유의 파장이 전신을 지배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그 새끼랑 도망간 거야?’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나를 집어삼킨 순간이었다. 휙!
“하아, 하…….”
[뭐야, 너. 왜 자꾸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대? 드디어 미친 거냐?]
“허억, 헉.”
[왜 이래? 으악, 설마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이 새끼.]
“하아, 헉…….”
내 어깨를 잡아채 앞을 막고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놈 하나가 보였다.
[야…… 너…… 이냐? 어? ……왜 사람을…… 무시…….]
말소리가 마치 물속에 잠긴 듯 웅웅 들려왔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본능이 세지는 게 느껴졌다.
지선우. 내 가이드. 나를 제외한 모든 에스퍼.
“……하아, 하.”
내 걸 빼앗기기 전에 죽여야 했다.
“……형.”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죽인다.’
형. 나 좀 말려 줘. 끔찍한 감각이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콰앙! 폭주의 시작이었다.
* * *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아이들과 노인들이 비명을 지르자 낮잠을 자던 경비병은 재빠르게 창을 집어 들었다.
[모두 중앙 광장으로 대피해!]
누군가의 외침이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을 안전한 지대로 인도했다.
[젠장! 무슨 일이야, 또!]
서블의 몇 없는 에스퍼가 로브를 뒤집어쓰며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맨 앞에는 카오루와 천천우가 있었다.
[콜록!]
카오루가 매캐한 연기에 팔뚝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뿌연 연기 속을 헤쳤다.
‘설마 동경의 침입? 아니면 괴물이 들이닥친 건가?’
어느 쪽이라도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하나 느슨한 듯 굴어도 철두철미한 구역장이 이토록 쉽게 뒤를 내줄 리가 없을 텐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바로 그때였다.
[제이크!]
천천우가 창백한 안색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외침 속에 섞인 이름은 카오루도 아는 인물이었다.
제이크. 경비병 중 한 명으로, 천천우의 친우였다. 비록 이능력을 가진 이는 아니나 척박한 이 땅에서 몇 안 되는 큰 키와 투박한 체격을 가진 사내. 그런 사내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덜렁 들려 있었다. 이미 축 늘어진 몸과 흔들리는 팔다리로 그의 의식이 없다는 게 증명됐다.
제이크를 들고 있는 건 도련님, 아니, 낙유성이었다.
[왜 유성 군이?]
[저 새끼가아아악!]
[안 돼! 기다려요, 천!]
동경. 괴물. 그보다 더한 최악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카오루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 갔다. 말도 안 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가지 마. 가면 죽어.]
지금 그들의 눈앞엔 금빛 눈을 번뜩이고 있는 재앙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