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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14)화 (14/115)

14화.

[아하하학!]

[물에 빠진 원숭이 꼴이네!]

[참 나, 여자애들은 저 새끼가 뭐 잘생겼다고 그 난리인 건데?]

천천히 뒤돌자 보이는 건 머저리를 늘 졸졸 쫓아다니던 붕어 똥들이었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등신, 병신들 말이다.

또옥, 똑- 나는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아 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하아…… 물놀이를, 참…… 좋아하나 봐.”

* * *

지선우가 나른히 탕욕을 즐기고 있을 즈음 옆에서는 잔인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래 남자애들을 차례차례 탕 아래로 처박으며 서늘한 눈빛을 빛내는 낙유성은 흡사 전장의 살육자 같았다.

[우확!]

[푸으으으읍!]

[사, 살려 줘!]

여러 명이 곡소리를 냈지만 낙유성은 봐주지 않았다. 그는 웃음기조차 없는 얼굴로 다시 한번 격한 워터 파크 개장을 알렸다. 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체급이나 격투기가 워낙 훌륭한 터라 웬만한 인물은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저 알몸으로 부대끼는 게 조금 역겨울 뿐.

[제이크!!]

제 부하들이 당하는 꼴을 본 천천우가 경악하며 낙유성에게로 첨벙첨벙 뛰어갔다.

[야 이 개자식아! 내 친구들 가만둬!]

“하, 이건 또 뭐야.”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 천천우가 낙유성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 순간, 낙유성이 천천우를 번쩍 들어 올려 물속으로 처박았다.

[우부부붑, 푸하- 이 씹새끼! 악!]

“뒈져, 제발.”

풍덩풍덩! 덩치 큰 두 사람이 물보라를 일으켰다. 아이들은 까르르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고, 탕에 피가 번진다며 사색이 된 카오루와 아무나 이기라며 응원을 하는 자얀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이것이야말로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광경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개판 아닌 개판을 만들어 내는 도중 지선우만이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유쾌한 소리를 터뜨렸다.

“히야! 조오타-!”

* * *

“……읏.”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핑 도는 시야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빈속인데 뜨거운 물에서 너무 무리했는지 창고로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렇게까지 잠든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하지만 오랫동안 잠든 것치고 퍽 개운하지 못했다.

“…….”

본능적으로 침대 주위를 더듬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지선우가 없어.’

곧장 굳어 있던 감각을 깨워 느릿해진 몸을 빠릿빠릿하게 만들었다. 자리를 비운 지 꽤 오래된 건지 침대에는 남은 온기가 없었다. 지선우의 잔향도 없고.

‘……뭐지? 분명 같이 잠들었는데.’

그의 부재를 알아채자마자 미련 없이 창고를 나섰다. 지선우를, 형을 찾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다. 각인된 그의 기운을 쫓아가면…….

“……!”

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대쪽 복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기운. ……그 녀석이다.

‘가짜!’

황급히 육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 나타난 건 그때 그 지하였다.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나무가 있던 그곳. 은발과 다른 놈들의 감시도 있었지만, 사실 길을 몰라 두 번은 가 보지 못했던 그 장소였다.

“후우…….”

숨을 고르며 여전히 하얀빛을 뿜어내는 나무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보이는 하나의 인영.

[ “안녕. 좋은 밤이지?” ]

지선우. 아니, 지선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가짜 녀석이었다.

[ “안 놀라는 걸 보니 내가 온 걸 알았나 보네.” ]

“네가 무슨 배짱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왜 또 형 몸을 멋대로 차지한 거야.”

나는 고민 없이 가짜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핏발이 선 내 눈에도 가짜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차가운 손으로 내 손등을 덮었다.

[ “허세 부리지 말고 손 떼. 어차피 이 몸의 머리털 한 올 못 태우잖아.” ]

“개소리 집어치워.”

사나운 말과 달리 나는 손을 놓았다. 열 받지만, 가짜의 말대로 지선우의 몸인데 해를 가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우리가 돌아갈 방법이나 말해.”

[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가 봐? 저번에 한 얘긴 전부 잊었어? 하하, 내가 미쳤니. 널 보내게.” ]

이게 지선우 몸이라고 사람 속을 마음껏 뒤집는다. 한 대 정도는 쥐어박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혀로 볼 한쪽을 꾹 누르며 화를 삭였다. 그러곤 가짜의 턱을 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야. 네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지선우랑 달라. 선우 형은 착해 빠져서 널 납치범이 아닌 도움을 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만, 난 수틀리면 그딴 거 없어. 억지로라도 형 데리고 돌아갈 거야. X발, 내가 그냥 가겠어? 여기, 그 새끼, 너, 전부 태워 버릴 거야.”

가짜는 나를 빤히 보다 픽 입꼬리를 올렸다. 진심을 담은 협박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전혀 쫄지 않았다. 배짱이 두둑한 건지, 간이 큰 건지, 아니면 뭐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건지.

[ “네가 가진 수가 아주 많나 봐.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야 맞는 거 아냐? 아니면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신지? 근데 네 싸가지로 봐선 남녀노소 골고루 차별 없이 지랄 맞은 거 같은데.” ]

“네 싸가진 어디 평탄하시냐? 남의 몸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있는 게 악귀지 뭐야.”

[ “수는 방금 내가 틀어 준 거 같네. 그래서? 돌아갈 방법은 찾았니.” ]

가짜가 눈을 접어 웃기에 나 역시 웃음 지었다. ‘방법’. 나는 픽 입꼬리를 올리곤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려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러고는 가짜를 향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너, 가족 소중하다며.”

[ “…….” ]

“네 앞에서 그 은발 새끼를 서른여섯 번 정도 태우면 입을 열겠지. 왜. 내가 못 할 거 같아?”

침묵하는 가짜에 나는 이어 이죽거렸다.

“그러니까 너무 자만하지 마. 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는 거야. 최대한 지선우가 상처받지 않길 원하니까, 일부러 지름길 내버려 두고 먼 길을 택한 거라고. 오로지 내 가이드를 위해서. 같잖게 나한테 별 개 같은 인류애 기대하지 마. 애초에 그런 거 갖다 버려.”

[ “……개 같은 인류애……. 재밌어, 하하…… 정말, 참 다르구나.” ]

가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턱을 잡은 내 손을 쳐 내곤 여유롭게 웃었다.

[ “그런데…… 너 혹시 그거 아니?” ]

녀석이 손을 뻗어 내 어깨부터 가슴, 배꼽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 “내가 얘 몸에서 깨어나는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나와 이 아이가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야. 아! 맞다. 너희들한텐 각인이라는 신기한 힘이 있더라? 아주 로맨틱하던데……. 음, 근데 말이야. 머지않아 이 아이의 혼이 사라지고 내가 자리 잡아도 각인이 유지되는 걸까?” ]

“이런, 미친.”

[ “아하하, 그렇게 되면 ‘나’는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자얀? 아니면 싸가지 너? 와, 너무 궁금하다. 우리 한번 내기해 볼래? 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꼭 짝이 아니어도 가이딩은 가능하잖아. 지금 이 아이가 내 가족들에게 해 주는 것처럼.” ]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이 부들거렸다. 목에 핏대가 서는 게 느껴졌으나 차마 지선우라, 지선우의 몸이어서 건들 수가 없었다. 손톱이 파고든 탓에 손바닥이 짧은 통증과 함께 축축해졌다.

[ “그래도 좀 비참하긴 하겠다.” ]

가짜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녀석의 도발에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분노와 치욕으로 표정이 딱딱히 굳고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갔다.

그때, 가짜 녀석이 내 머리채를 잡고 단박에 아래로 훅 끌어당겼다.

[ “대화를 하는데 시선이 높잖아.” ]

은은하게 돌아 있는 새까만 눈동자. 지선우라면 절대 지을 리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누구에게도 기로 밀려 본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 “아가리를 털 거면 이렇게 털어. 어지간하면 나 같은 놈은 안 건드리는 게 제일 좋고. 네 말대로 나 제정신 아니거든? 좋게 말할 때, 자얀 건드리지 마.” ]

“…….”

[ “그럼 너도 얘 잃어. 네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최악의 방법보다 끔찍하게 잃을 거야. 피차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응? 서로 헛짓하지 말자. 사이좋게 지내자고.” ]

은발이 있을 때와 달랐다. 지선우 안에 있는 이 새끼…… 무언가 이상했다. 하긴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녀석이다. 웬만한 배짱과 박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무리겠지. 나는 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에서 잃을 바엔 망가뜨리는 게 나아. 걱정 마. 지선우 잃으면 나도 알아서 따라갈 테니까.”

지지 않고 받아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날 빤히 쳐다보던 가짜가 머리채를 놓고 빙글 몸을 돌린다. 가짜는 짧은 탄식을 뱉더니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 “우리 합의점을 찾자. 너는 이 애랑 돌아가길 바라고, 나는 너희들이 필요해. 난 내 사람이 살아남을 세상을 만들 거야. 그러니 그것만 해결되면…….” ]

말끝을 흐린 가짜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지선우는 고양이 상인데, 저 가짜 녀석만 나타나면 꼭 여우처럼 인상이 변한다. 샐쭉, 눈가가 반달로 접히는 게 아무리 봐도 사기꾼이었다.

[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게.” ]

“모른다며.”

[ “설마 진짜 모르겠니? 너 정말 순수하구나.” ]

“……이런 씹…… 하아, 아니다. 그래, 뭘 어쩌라는 건데.”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가짜는 나무를 보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예의 그 웃음을 짓고 내게 하나의 제안을 해 왔다.

[ “너, 일단 사람 하나 죽여 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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