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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13)화 (13/115)

13화.

“유성아, 나 힘, 들어.”

“X발, X같아.”

“응, 응? 미안해. 유성아. 화 풀어.”

“왜 내 컨디션 신경 안 써? 형도 느껴지잖아, 내 파장!”

또 괜한 사람에게 버럭버럭했다. 나는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내며 거칠게 말을 쏘아붙였고, 지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요새의 나는 예민했다. 배가 고픈 것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도,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도, 내 것을 나눠야 하는 것도, 모든 게 한데 섞여 나를 괴롭혔다. 그로 인해 지선우가 내 투정을 전부 받아 주는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우리 사이는 전과 달리 계속해서 삐걱거렸다.

“하, 아니다. ……미안.”

“으응, 네 말이 맞아. 내가 더 신경 쓸게.”

“…….”

나는 팔로 눈가를 가리고 숨을 골랐다.

‘진정해라, 낙유성. 진정해.’

염불 외듯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머저리와 대화를 끝낸 지선우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뭐 기쁜 일이라도 있나?

“유성아.”

“어.”

“가자.”

“어?”

어딜 가자는 거냐 되묻기도 전에 지선우에게 끌려갔다.

작은 몸을 따라 휘적휘적 한참을 걷다 보니 보이는 건…… 고추 밭이었다.

“아 썅, 내 눈.”

나는 황급히 눈을 질끈 감았다. 속이 뒤집힌다.

“헐, 완전 신기해.”

……넌 벌거벗은 사내새끼들이 신기하냐? 눈을 슬쩍 떠 지선우를 노려봤다. 따가운 눈초리를 읽었는지 지선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곤 내 옆구리를 툭 쳤다.

“그게 아니라 저 탕!”

“…….”

그래, 신기하긴 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욕탕이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거대한 탕에서 유황 냄새가 풍겼다.

[오늘은 대목욕의 날이야. 14일마다 해. 평소에는 물을 아껴야 해서 가볍게 씻으니까 이렇게 날을 정해서 다 같이 묵은 때를 벗기는 거지. 고운 소금과 진짜~ 진짜! 귀한 약초 뿌리를 넣어! 봐 봐, 향이 좋지? 선우, 꼭 들어가. 아, 뭐…… 싫은 놈은 안 들어가도 되고.]

“유성아, 천천우 씨가 오늘이 대목욕의 날이래. 14일마다 모여서 하는 건가 봐. 재밌다. 우리도 들어가자!”

“하, 성병 걸릴 일 있냐?”

“……야.”

“됐어, 가자. 저 새끼들이랑 같이 씻으면 되레 병 생기겠다.”

“말 곱게 해라.”

미간을 좁히는 지선우를 보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현대 시대에서도 친목이니 뭐니 따지며 사우나 가자는 새끼들에게 진절머리를 쳤는데, 하물며 이…… 더러운 것들이랑 탕에 들어가라고? 차라리 혀를 깨물지.

“그동안 제대로 못 씻은 건 다 똑같지 뭐.”

투덜거리며 옷을 홀라당 벗는 지선우에 경악했다. 이게 미쳤나.

“옷 입어.”

“아, 싫어. 난 뜨- 끈한 물에 몸 좀 풀란다. 넌 모르겠지만 형 나이 되면 이해될 거다, 아가야.”

능글맞게 웃은 지선우가 내 엉덩이를 토닥였다.

“지랄 말고 입어라. 팔팔 끓여 버리기 전에.”

“어. 푹 삶아 줘라? 나도 그냥 녹아 버리게?”

“야! 지선우! ……형!”

지선우가 하얀 몸을 드러낸 채 이히힛 웃으며 탕으로 뛰어갔다. 이제 보니 지선우 역시 약간 맛이 간 거 같았다.

아닌 척해도 제대로 목욕하고 싶었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충 벽에 몸을 기댔다. 들어가긴 싫고, 그렇다고 짐승 새끼들 가득한 곳에 지선우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나올 때까지만 기다려야지.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촤악!

“……!”

……또옥.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 버렸다. 그것도 무언가 구린내가 잔뜩 풍기는 물로.

“욱!”

묵은 걸레를 푹 담가 놓은 듯 코를 찌르는 전 내에 헛구역질이 일었다.

[아, 미안. 거기 있는 줄 몰랐네?]

[하하하하! 우웩, 냄새나.]

[야, 너희 너무하잖아. 풉, 아하학!]

낄낄거리는 머저리와 놈을 따르는 원숭이 떼.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 내며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거 전부 빨아야 하는 건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도련님께서 좀 빨아 주지?]

“씹, 우욱.”

[도련님은 우리랑 한 탕에 몸 담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설마 그것 좀 묻었다고 홀랑 들어올 건 아니지?]

[뭐어…… 이젠 싫어도 들어와야 하나? 아하하하.]

[밑에 털도 안 나서 들어오기 부끄러운 건 아냐? 도련님이잖아!]

“저, 개…… 욱!”

입을 열거나 숨을 쉬면 썩은 내가 폐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와 괴로웠다. 안 그래도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절로 허리가 굽혀지며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꼴 좋다. 병신.]

머저리가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퉁 밀치고 탕으로 향했다. 개 같은, X발, 젠장, 빌어먹을! 욕설들이 목구멍 안을 꽉꽉 채웠다. 나는 급한 손길로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바지를 휙 벗어 던지고 성큼성큼 탕으로 걸어갔다.

풍덩! 결국 죽기보다 싫은 탕으로 자진 입수하고 말았다.

“유성아!”

“미친, X발, 이 씹!”

첨벙, 첨벙! 뜨거운 물을 가득 퍼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성난 숨결을 마구 뱉어 냈다.

“아이고…… 야, 야. 온도 뜨거워진다.”

차마 지선우에게만큼은 욕설을 뱉을 수가 없어 일렁이는 탕의 표면을 주먹으로 거세게 내려칠 뿐이었다.

팡!

[꺄아!]

물보라를 일으키자 아이들의 까르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뿌연 김 사이로 모양이 잘 잡힌 근육을 자랑하는 은발이 양 팔뚝과 어깨, 목 등에 아이들을 잔뜩 매단 채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새 손님들도 즐거운 목욕 시간을 즐기고 계신가?]

“자얀 씨. 안녕하세요.”

[안녕, 선우. 표정을 보니 좋아 보이네.]

X발 징그러워.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못 볼 걸 봤네. 핏줄이 바짝 선 녀석의 나체는 보기만 해도 껄끄러웠다. 아마 같은 사내라면 알 것이다. 자신보다 몸집이 크고 좋은 상대에게 느끼는 약간의 질투와 거부감을.

[아하, 도련님은 확실히 선이 굵군. 운동을 열심히 했나 봐. 이거 질투가 나는데?]

“우리 유성이 몸 좋죠?”

너…… 이 새끼랑 내 몸 얘기하냐? 샐쭉한 눈으로 흘겨보자 지선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왜. 사실인데 뭐.”

“하긴…… 너한테 잘 보이려고 키운 거긴 하지.”

“뭐?”

“왜 모른 척이야. 다 알면서?”

입술을 쭉 내밀고 뺨을 붉히는 지선우가 귀여워 괜히 더 추근거렸다. 아까의 더럽던 기분은 지선우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인해 전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왜. 응? 뭐가.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지선우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속삭이고 있는데 웬 떡대 하나가 우리 사이를 찢고 들어왔다.

[그보다 선우. 이런 곳에서 가이딩을 하면 기분이 매우 좋겠지? 아마 이번이 내 차례인 걸로 기억하는데.]

“아, 아…… 그, 그렇긴 한데. 지금은 좀.”

[으응, 안달 나게 하는 거야? 언제든 필요하면 얘기하라 했잖아. 설마 도련님 때문에?]

은발이 무어라 얘기할수록 지선우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간다. 저 개자식이 또 뭐라고 한 거지?

“개수작이야. 새끼가.”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선우를 내 뒤로 숨기며 은발의 어깨를 팍 밀쳤다.

[아야. 손자국이 났네?]

은발이 같잖은 울상을 짓고서 말했다. 이내 놈이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봤다.

[맨살에 닿는 건 위험한데……. 난 아리아 말곤 신사적이지 못해, 도련님.]

내 손이 닿았던 어깨를 나른히 내려다본 은발이 입꼬리를 올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서늘한 놈의 얼굴을 주시하며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하고 있을 때였다. 얇은 물줄기가 얼굴로 뾱 날아왔다. 나는 느릿하게 물줄기를 닦아 낸 후 은발을 쳐다봤다.

[오.]

놈은 광대를 씰룩이며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뭐 하자는 거지? 어이가 없어 화도 못 냈다.

“유성아, 너랑 친해지고 싶나 봐!”

“…….”

지선우가 기어코 나를 정색하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전부 욕설이라 내뱉을 수 없어 아쉬웠다. 지선우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이미 특기인 독설로 울리고도 남았을 거다.

[음? 아가라서 이런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봐, 뒤에 난리가 났잖아.]

은발이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의 뒤에는 눈을 빛내는 아이가 가득했다.

[구역장니임! 물총 알려 줘!]

[형아만 치사해. 나도! 나도!]

[아하…… 이상하군. 아가들은 다 좋아하는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린 은발이 나를 보고 픽 웃었다. 아무리 봐도 날 무시하고 있는 거 같은데 도통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다.

“풉.”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지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뭔데.”

“으응, 아냐. 그냥 잘 어울리는 말.”

뭐가 나랑 잘 어울리는 건데. 지선우가 어깨를 떨어 대며 웃는 걸 봤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엔 귀찮아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시비만 아니면 됐지 뭐.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 휘적휘적 다리를 움직였다.

“가게?”

“어. 너도 나와.”

“난 더 있다 갈래. 흐아,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아우, 좋다!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내지르며 지선우가 녹아내린다.

……그러니까 목욕도 매일 하고 밥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현대 시대로 넘어가면 될 문제 아니냐.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뻔한 불평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괜히 기분 좋은 지선우 건들지 말아야지. 또 싸우게 되는 건 사양이다.

‘하아, 참자. 금기의 술만 알아내면 이딴 곳 바로 뜰 거니까.’

짜증을 꾹꾹 내리누르느라 미처 주변을 확인하지 못하던 때였다.

촤아아악!

데자뷔인가? 뜨거운 물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것도 여러 번, 큰 바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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