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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11)화 (11/115)

11화.

나는 웅성거리는 놈들을 무시한 채 황폐한 도시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무리 사이에는 은발과 안경, 머저리, 그리고 지선우까지 골고루 껴 있었다. 저 중 지선우를 제외하곤 모두 에스퍼였다.

불과 한 시간 전. 은발과 대화를 가장한 말싸움을 끝낸 지선우는 내게 몬스터 소탕을 부탁했다. 분명 식량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거 같은데 어째서 몬스터 소탕이지? 의문이 들었지만 뭐가 됐든 전투는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곤란해 보이는 지선우를 못 본 체할 수 없던지라 흔쾌히 수락했고, 그 결과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마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거지 같은 공간을 나와, 꽤나 높은 담을 넘어 인기척조차 없는 폐허로.

이곳에 몬스터가 나온다고? 나는 나른히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목도 뻐근하고, 옷도 찝찝하고,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피곤해.’

문득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대충 신고식이겠거니 생각하며 넘기기로 했다. 딱히 저놈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지선우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게 싫으니까 어느 정도 힘을 내보기로 결심하며.

거기다 내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 다른 놈들이 지선우를 쉽게 건들 수 없겠지. 특히 이렇게 힘으로 서열을 나누는 무식한 곳이라면 더더욱.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곤 주변을 훑어봤다.

전부 부숴도 되는 거잖아. 이참에 스트레스나 풀어 보자. 뚜두둑, 목을 꺾으며 천천히 올라오는 바닥의 진동을 느꼈다.

* * *

[캑, 절대로 안 도와줄 거야-! 이봐, 다들 저 녀석이 위험하대도 도와줄 생각은 말라고? 이건 시험이야, 시험! 서블의 일원이 되겠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흥. 적어도 일주일 치의 식량은 가져와야 해. 못하면 못 돌아올 줄 알라고.]

천천우가 저 멀리 홀로 서 있는 낙유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한번 개망신이나 당해 보라지! 지금 땅을 울리는 크기로 봐선 아주 독하고 강한 놈이 나타날 거 같은데.]

크크, 비열한 웃음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으악, 옹졸해도 이렇게 옹졸할 수가……. 사실 구역장님을 제외하고 혼자 사냥을 보내는 건 금기된 일이잖아. 저건 진짜 괴롭히기라고. 난 마음에 들지 않아.]

[난 중립. 상관없어. 귀찮은 식량 채우기를 대신해 준다는데 오히려 감사?]

[뭐어어어? 너희 제정신이냐! 선우를 봐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샤오랑 지애나는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다고. 내 가족을 함부로 건든 놈은 절대 용서 못 해. 서블에 머물게 해 주는 것만 해도 많이 참는 거야. 그렇지, 감독?]

[여러분 다 그만해요. 선우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감독이라 불린 카오루가 천천우와 동료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세계수 구역에 함부로 발을 들인 거나, 우리 가족들을 다치게 한 것 모두 큰 죕니다. 그러니 벌을 내린 거잖아요. 하지만 천, 당신도 알아야 해요. 이번에 소년…… 유성 군이 식량을 잡아 오면 더 이상 시비 걸지 말아요. 그도 우리의 일원이 된 거니 잘 대해 줘야 합니다.]

그들이 낙유성에 대한 평가를 하던 때였다. 땅이 크게 진동하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일었다. 메마른 땅이 갈라지고, 그 아래서부터 기다란 몸을 가진 몬스터가 끼에에- 징그러운 비명을 토해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지네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한 묘한 생김새의 괴생명체. 모두가 괴물의 등장에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으나 낙유성과 지선우만은 담담했다.

“뭐야.”

특히 낙유성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잡몹이잖아.”

굳이 따지자면 B급 에스퍼 두셋만 붙어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이트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급 몬스터 따위에 날 쓰다니, 고급 인력 낭비지.’

낙유성은 실망을 한 듯 지루하게 움직였다. 포효하는 몬스터 앞으로 다가가 팔을 뻗었다. 거센 바람이 불더니 기다란 몸을 꿀렁인 몬스터가 그를 향해 징그러운 입을 쩍- 벌렸다.

“건방지긴.”

웃음기 어린 낮은 저음이 흐른 바로 그 순간, 낙유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엄지와 중지가 마찰하며, 시원스러운 딱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거대한 몸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뜨거운 바람이 후욱 풍겨 갔다.

쿵! 몬스터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곤 육중한 몸을 바르르 떨다 곧 움직임을 멈췄다. 생명을 잡아먹는 불꽃, 낙유성이 유유히 몸을 돌렸다.

[압도적이군요.]

카오루가 순수하게 감탄하자 천천우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옆에서 싱글싱글하는 자얀을 가리키며 성난 원숭이처럼 대꾸했다.

[헛소리! 우리 구역장이 더 강해. 그렇지?]

[글쎄, 도련님에게 열일곱 번 태워진 건 기억나는데. 엄청 뜨겁다고?]

자얀이 맹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우의 속을 뒤집어 놨다.

[이익! 됐어!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놈을 건드렸으니 곧 몰려올 거야. 하, 저 새끼 표정이 기대되네-! 콱 잡아먹히면 더 재밌을 텐데!]

[천, 그를 미워하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심한 말은-]

카오루가 난색을 표하던 찰나, 다시 한번 땅이 울렸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강도였다.

그들에게 가족이 있듯, 몬스터에게도 무리가 있다. 동료가 당했으니 시뻘건 눈을 하고 달려드는 건 당연지사. 몰려든 몬스터의 수는 보기만 해도 전투 의욕을 상실할 정도로 엄청났다.

“유성아!”

끝난 줄 알고 뒤를 돈 낙유성에게 지선우가 다급히 외쳤다. 동시에 커다란 모래 폭풍을 뚫고 지네 몬스터가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우글우글한 떼거리가 소름 끼치는 초음파를 발사하며 낙유성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지선우는 낙유성이란 사람의 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현대 시대에서 활약하던 당시, 낙유성은 단 한 번도 궁지에 몰린 적 없는 무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선우조차 깜짝 놀랄 만큼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지선우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당신들도 에스퍼잖아요! 도와줘야죠, 뭐 하는 거예요!”

지선우가 자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소리쳤으나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다만 숨기지 못한 입꼬리를 보니 지금 이 상황을 꽤나 즐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재밌어요?”

[그러니까 ‘대가’지, 아가야.]

“하!”

지선우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당장 한 대 후려칠 것 같은 매서움에 자얀이 가증스러운 소리를 냈다.

[으응. 그렇게 노려보지 마.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아. 아야, 방금 피가 났어.]

“됐네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짜증이 난 지선우가 바닥에 있던 큼지막한 돌덩이를 주워 들었다.

‘나라도 갈 거야.’

침을 꼴깍 삼킨 그가 낙유성이 있는 곳으로 한 발 떼려 하자, 가만히 지켜보던 자얀이 지선우의 양 손목을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작은 몸이 그대로 끌려간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에스퍼의 무식한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요!”

[으응, 나랑 응원할까? 자아. 도련님, 힘내세요-!]

“자얀 씨!”

들려진 손이 강제로 휙휙 흔들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지선우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자얀은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이며 귓가에 나긋나긋이 속삭일 뿐이었다.

[저기는 위험하잖아. 선우, 난 네가 무척이나 소중해. 그러니까 우리는 응원이나 하자고.]

자얀이 능글거리며 웃었다. 바로 그때, 이제는 하나의 산을 이룬 시커멓게 쌓인 괴물들의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키잉-

하늘로 뻗은 올곧은 하얀빛. 몇 초의 반짝임 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수백 마리의 괴물이 폭발하듯 터져 우수수 쓰러져 나갔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얀과 지선우의 앞까지 매서운 이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야. 손 놔.”

저벅저벅 걸어온 건 상처 하나 없는 낙유성이었다.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얀을 향해 흉흉한 눈빛을 보냈다.

“태워 버리기 전에.”

* * *

하여간 벌레가 많이 꼬인다니까. 현대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까지 인기가 많다니. 나는 쯧 혀를 차곤 지선우를 은발의 품에서 빼앗아 왔다. 지선우의 얼굴이 약간 붉은 게 걱정이 됐다.

“아파?”

싱글싱글하는 재수 없는 상판을 무시하며 지선우의 손목을 꼼꼼히 살폈다. 혹여나 손자국이라도 나 있다면 당장 은발의 대가리를 지져 버릴 작정이었다.

“아니, 괜찮아. 유성이 너는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지?”

여린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자니 지선우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별.”

나는 피식 웃으며 지선우의 걱정을 덜어 줬다.

“돌아가면 가이딩해 줄게.”

“응.”

까치발을 딛고 내 머리를 쓰다듬는 지선우가 귀여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음껏 만져 달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지선우의 걱정을 즐기고 있는데 안경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유성 군, 수고 많았습니다. 역시 강하네요. 덕분에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걸로 당신의 벌도 끝입니다. 부디 서블에 잘 적응하길 바랄게요. 앞으로도 이렇게 서블을 위해 희생해 준다면 모두가 당신을 받아들일 겁니다.]

뭐라는 거야? 대꾸 없이 쳐다보자 안경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선 내 뒤를 가리켰다. 시선이 놈의 손가락을 따랐다.

……저게 뭐야? 나는 죽은 괴물들을 차례차례 운반하는 다수의 장정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내장이 터지고 살이 타들어 가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그것들을 왜 수레에 싣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두면 알아서 썩어 사라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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