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10)화 (10/115)

10화.

“뭐?”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선우를 쳐다봤다. 못된 말은 지선우가 했는데,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것도 지선우였다. 그는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 입꼬리를 축 내리고서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서로 거친 호흡만 내뱉으며 대화의 단절을 알렸다. 지선우가 고개를 푹 숙인다. 나 역시 머리가 차가워졌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를 상처 주기 위한 준비가 끝난 사람들 같았다. 스스로가 너무 못나 보였고, 그 사실에 숨이 막혔다. 형에게 이렇게까지 밑바닥인 태도를 보인 적이 있던가.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냐?’

지선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 맞아. 내가 못 지켰어. 그런 주제에 큰소리 치고, 화만 내고. 내가 가이드라도 이런 에스퍼를 믿고 따를 리가 없지.

나는 불안정한 호흡을 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며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마른 입술을 적시는 혓바닥만 바빴다. 마음속에선 사과의 말을 뱉을 용기가 충분한데, 왜 입 밖으론 나오지 않을까.

“…….”

머뭇머뭇하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미안해.”

지선우가 사과를 해 왔다. 젖은 목소리, 떨리는 어깨, 가쁜 호흡. 그가 운다. 내가 지선우를 울렸다. 누군가 내 뺨을 세게 후린 것처럼 얼이 빠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지선우, 울지 마. 응? 형, 나 봐. 나 봐 봐. 제발. 미안해.”

맥이 탁 풀렸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지선우를 품에 안고 달래고 있었다.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

“내가 미친놈이야. 소리쳐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작은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고 그의 이마와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볐다. 웅얼거리며 계속해서 울지 말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젖은 물기가 닿으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심한, 심, 흐…… 으, 심한 말 해서, 미, 미안…… 해.”

지선우는 토끼 같은 얼굴을 물에 푹 불린 찐빵으로 만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촉촉이 젖은 지선우의 속눈썹을 엄지로 쓸고, 뺨에 입을 맞추며 괜찮다고 속삭여 줬다. 내가 무능한 게 맞으니까 지선우는 실언한 게 아니다.

결국 나는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형 말대로…… 하자. 몰아붙여서 미안해. 미안해, 지선우.”

나는 지선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 평생 여기 머물겠다는 것도 아니고. 형 말대로 금기의 술을 찾을 때까진 있을 곳이 필요하니까.’

그를 토닥이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다른 새끼 가이딩하는 걸 계속 참아 주면서? 내 앞에서 바람피우겠다는 건데.’

아냐, 아냐. 괜찮을 거야.

‘지선우가 우니까. 내가 못 지켰잖아.’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해도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차오르는 불안감에 나는 입술을 깨물다 작게 고개를 털었다.

“……괜찮아.”

“응…….”

그건 지선우가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 * *

“해서, 저와 유성이가 이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어요. 아, 제 이름은 지선우예요. 이쪽은 낙유성이고요.”

[선우라는 이름이었군.]

놈들이 고개를 끄덕이곤 무어라 말을 건네 온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지선우뿐이었다. 그 가짜가 몸에 들어갔다 나온 후, 이들의 언어가 알아서 번역된다나 뭐라나. 물론 상대 쪽에서도 ‘지선우’의 말만은 알아듣는 모양이다.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가이드가 뭔지 에스퍼가 뭔지 알려 드릴 거예요. 여러분은 너무 불안정해요.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는 방법이나, 능력을 다루는 방법도 아주 어설프니 제가 도와드릴 거예요.”

지선우가 열정적으로 놈들을 향해 줄줄 연설을 이어 갔다. ‘제대로 된 에스퍼’에 대한 설명과 ‘가이딩과 폭주의 상관관계’, 또 ‘과거, 평화롭던 시대’에 대한 말들이었다. 놈들은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선우에게 집중했다.

무슨 유치원 선생님도 아니고. 나는 언짢은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하품만 연신 해 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꾸벅꾸벅 졸다 정신을 차렸다.

“합의된 스킨십으로……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지선우는 굉장히 뿌듯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이 멍청하다 느끼지만 좋아하는 지선우를 보니 나름 좋은 점도 있다는 어벙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나도 벌써 미치는 중이거나.

[너무 재밌어요. 모든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됩니다. 음, ……그리고 선우 씨의 세계는 정말 아름다웠군요.]

안경이 무어라 하자 지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나만 빼고 전부 말이 통하는 게 억울하진 않았다. 어차피 저 새끼들과 사담을 나눌 생각은 없으니까. 그저 빨리 금기의 술이 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뚱하게 있자 지선우가 다가와 내 머리를 부스스 흩뜨렸다.

“왜 삐졌어, 잠만보.”

“금기의 술은-”

“알아. 아리아 씨가 나타나면 여쭤볼 거야. 걱정 마.”

투정이 바로 차단당했다. 나는 이어 말하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리곤 지선우의 손길에 나른히 머리를 맡겼다.

지선우가 슬금슬금 힘을 푸는 게 느껴졌다. 여우 같은 형. 내 기분을 달래려 하는 걸 알기에 괜히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사이가 좋군.]

유일한 만족감을 즐기던 중 방해가 들어왔다.

[썩 대화하기 좋은 성격은 아닐 텐데.]

은발이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나와 지선우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도련님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꼬운 내 얼굴을 보며 은발이 으음, 목을 울린다.

“예? 도련님이요?”

[아하, 찰떡이지?]

은발이 어깨를 으쓱이자 지선우의 시선이 내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더니 푸학! 허리를 구부려 미친 듯이 웃어 대기 시작했다.

뭐야, 왜 저래.

“도련님이란 말이죠?”

한참을 웃어 댄 지선우가 나를 보며 샐샐 눈웃음을 쳤다. 예쁜 얼굴 위로 둥둥 떠오른 장난기. 나는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보다 선우, 할 말이 있어.]

“응, 하세요.”

[우리 도련님에 대한 얘긴데…….]

은발은 눈썹 부근을 긁적이며 말끝을 늘였다.

[아무래도 벌을 받아야 할 거 같아.]

또 입으로 무슨 똥을 싼 건지, 은발의 말을 듣던 지선우가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빨리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저 오랜만에 형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때, 은발이 나른한 얼굴로 입가를 매만지며 나를 쳐다봤다. 뭘 꼬나봐?

[아니면 대가를 치르든지. 너무 많은 인원이 당했잖아. 나 혼자서 그들을 설득하기엔 무리가 있어. 이건 도련님이 용서를 구해야 할 문제야. 모두가 도련님이 이곳에 남는 걸 탐탁지 않아 하고 있거든.]

말을 끝낸 은발이 웃었다. 아주 화사하게.

[그래…… 모두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 보는 건 어때?]

“뭐, 뭐요? 무르읖?”

지선우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곤 은발을 째려봤다. 화기애애하던 두 사람의 사이가 험악해지는 게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은발이 지선우에게 손을 올릴까 걱정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머리털 한 올이라도 건드려 봐,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래요? 진짜 다들 너무하네!”

지선우의 격앙된 목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한쪽 말만 이해가 되는 상황 속에서 대략 추측해 보건대, 아마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이 썩 좋은 쪽의 일은 아닌 거 같고.

[흥분하지 마. 나도 매우 유감스러워, 선우.]

나는 턱을 괸 채 은발을 쳐다봤다. 놈은 지선우가 버럭버럭 화를 내도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지선우는 계속해 다다다 쏘아붙였다. ‘우리도 피해자예요’라든가 ‘아리아 씨의 말을 자얀도 들었잖아요. 유성이한테 함부로 대하는 거 용서 못 해요. 자꾸 우리 애 괴롭히지 마세요. 안 참아요’라며 말이다.

와중에 ‘우리 애’라는 표현이 지선우다워서 피식 웃음이 샜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우리 애라니. 웃기지 않는가.

“땅꼬마가…….”

“야!”

괜히 중얼댔다가 욕을 얻어먹었다. 나는 입술을 입안으로 쏙 말아 넣고 어깨를 으쓱였다.

[앙앙 짖는 게 너무 무서워. 그렇지, 원래 작은 짐승이 더-]

“짐승?”

[아하…… 이제는 다 알아듣지?]

지선우가 눈을 샐쭉 뜨자 은발이 아차 하는 얼굴로 능글댔다. 도통 뭐라는 건지 모르겠으나 표정이 재수 없는 걸 미루어 별 좋은 말은 아닌 듯했다.

[꼬마야. 꼬마야, 쉬이-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봐. 네가 내 말을 조금 오해한 것 같은데, 도련님을 묶어 두고 매질하거나 고문하겠다는 게 아냐. 그저 이곳을 위한 작은 ‘희생’을 보여 주면 돼. 거기다 우리 도련님은 매우 강하잖아? 그러니…… 그렇지, 식량을 구해 온다든가 하면 문제 될 게 없을 거 같은데, 어때?]

“누가 꼬마예요. 군필을 우습게 보시네, 이 양반?”

[자꾸 화내지 마. 너무 무서워.]

“……하아, 식량은 어디서 구하는데요.”

식량? 나는 지선우의 말에 집중했다. 은발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으응, 여기? 맛 좋은 놈으로 부탁해.]

은발이 헤실헤실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이자 지선우는 끝내 참았던 주먹을 들어 올리며 짜증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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