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지르문다. 보통 이런 상황이 안타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일단 난 그 ‘보통’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동정이 든다 해도 그건 어느 정도 상식선 안에서만 통하는 동정이다. 대뜸 모르는 차원으로 끌려와 ‘우리가 살기 좀 팍팍해서 잘 먹고 잘 살던 널 좀 납치했거든?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우리를 위해 개고생을 해 주겠니?’ 하면. 도와주는 새끼가 정신병자 아닐까.
내 손목을 걸고 얘기하는 건데, 그런 새끼들 백이면 백 전부 사짜니까 피해 다녀라.
“더 얘기할 가치 없고. 다 뒤엎기 전에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
나는 몸을 돌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또 헛소리하면 괴물이고 나발이고 내가 직접 너희 씨를 말릴 거니까.”
피곤하다. 빨리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서, 지선우를 끌어안고 죽은 듯 잠만 자야지. 눈가를 비비며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들려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 “못 해.” ]
이건 또 뭔 헛소리야? 팩, 고개를 돌려 가짜를 노려봤다. 진짜 나랑 끝까지 해 보자는 거지.
[ “그래. 네 말이 맞아. 다짜고짜 납치해서 억지 부리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모든 걸 버리고 소중한 걸 직접 놓을 만큼 나는 간절해. 얼마든지 욕해. 너희들에게 나는 악마일 테니까 부정하지는 않을게. 난 너와 이 아이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어. 맞아.” ]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이 줄줄 이어졌다.
[ “그러니까 난 너랑 협상 따위 안 해. 요구도, 부탁도 안 들어줄 거야. 어떤 방식으로든 목표를 이룰 거니까. 누군가를 이용하는 방법뿐일지라도…… 모든 걸 이용한 악인으로 남을래. 정의를 배반한다 해도 그럴 거야. 내 사람을 위해 기꺼이 할 수 있어.” ]
그러다 돌연 어깨를 으쓱이며 가짜가 능글맞게 말했다.
[ “왜. 네가 그렇게 말하면 쩔쩔매며 보내 줄 거라 생각했어?” ]
지선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육체 없는 영혼이 바스러진 웃음을 지었다.
[ “그런 거라면 얘, 너 너무 순진한 거 아니니?” ]
그녀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 “꿈 깨.” ]
“야, 너 진짜 죽고 싶냐?”
콱. 나는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힘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하다. 몸은 지선우의 것이니까. 내가 감히 어떻게 상처를 내겠는가.
[ “이 몸이 죽는 거겠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
가짜 녀석의 태도가 돌변했다. 위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나를 올려다본다. 새까맣고 예쁜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속된 말로 아주 돌아 있었다. 지선우의 얼굴로 이 정도의 빡침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하. 나도 모르게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씹.”
치아를 꽉 깨문 탓에 턱이 부들거렸다. 당장에라도 가짜의 사지를 찢어 버릴 듯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으나 사실 내가 하는 경고는 모두 허세였다.
X발! 결국 나는 소리를 지르며 잡고 있던 손을 놨다. 하아, 하, 열이 올라 숨을 거칠게 골랐다. 피와 땀으로 떡이 된 앞머리를 휙 쓸어 올리고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이를 드러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야. 좆까.”
[물러서.]
위협하고 있자니 은발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건들지 마, X발!”
나는 은발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반응했다.
[……어린 새끼가.]
“꺼져. 처맞기 싫으면.”
[망할!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리아, 이 어린 새끼가 널 모욕했나?]
은발과 나는 서로를 노려봤다. 하지만 은발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행동에 나 역시 코웃음을 쳤다. 놈과 나는 당장에라도 터질 시한폭탄이었다. 그런 와중 그녀는 내가 아닌 은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자얀.” ]
겨우 이름 한 번 불린 걸로 은발의 성난 기운이 사그라든다. 무슨 짐승 사육사도 아니고.
[ “네게는 사과할 게 너무 많아. 설명도 없이 세계수가 되어 버린 나를 끝까지 지켜 줘서 너무 고마워. 해 줄 말이 수두룩한데…… 시간이 없어. 아직 이 아이의 몸으로 오래 있을 수가 없거든.” ]
[아리아…….]
[ “자얀. 자얀, 내 사랑. 제발 부탁이야. 이 두 아이를 지켜 줘. 내 욕심으로 인한 피해자들이자 이 세계의 유일한 구원자야. 그러니…… 아, 아아. 미안해. 몸의 주인이 일어나려 해. 다시, 다시 만나자. 자얀.” ]
[아리아, ……난 또 착한 강아지처럼 기다려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 “꼭 다시 만나러 올게.” ]
[너무 힘들어. 하지만, ……그래, 사랑해.]
은발의 눈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고, 그녀를 쓸어내리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얼굴의 웃음만큼은 잃지 않았다.
나는 지선우의 몸으로 은발에게 안겨 있는 그녀를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둘이 아주 쌍으로 염병을 떠는구나. 저것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뭔 짓거리를 하는 거야.
“안 떨어지냐?”
황급히 두 사람을 분리하며 빨리 진짜 지선우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즉시 이 거지 같은 곳을 떠날 거니까.
* * *
“제정신이 아니구나, 지선우.”
맹세컨대 나는 지선우를 향해 진심으로 욕을 한 적이 드물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내 성격이 모나고 드세도, 입에 담기 힘든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해도, 지선우가 아닌 우리 사이를 망치는 쓰레기들을 향한 거지 그를 향하지는 않았다. 혹은 멍청한 나를 향하거나.
그런데 오늘만큼은 다르다.
“너 또라이야. 알아?”
그를 가리킨 손가락이 부들거렸다.
“유성아. 유성아! 진정하고 형 말 좀 들어 줘, 응?”
나를 잡는 지선우의 여린 손길을 거세게 뿌리쳤다.
“놔, X발!”
짜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평소라면 감히 하지 못했을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 지선우의 하얀 손등이 붉게 부어오르는 게 보여 눈가가 움찔했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지금은 그를 달래 줄 상황이 아니었다. 지선우는 미쳤다. 정말, 정말로 말이다.
“……유성아.”
“내 이름 부르지 마. 지금 형 상처 주는 말밖에 안 떠오르니까, 제발 좀 내가 닥치고 있게 도와줘라. 어?”
내가 이토록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건 정확히 두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정확히 두 시간 전, 가짜가 사라지자마자 본래의 지선우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어서 지선우를 데리고 우리가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야지.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방법이야 그 제정신 아닌 녀석이 말했던 ‘시간을 넘는 금기의 술’만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 며칠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래서 나는 멍한 상태의 지선우를 끌어안고 ‘돌아갈 수 있어, 형’이라고 반복해 속삭였다. 당연히 지선우도 기뻐할 거라 믿으며.
분명 그렇게 믿었는데…….
‘유성아…….’
나를 보는 형의 얼굴이.
‘미안해.’
그 말뜻이.
‘나, 이대로는 못 가.’
나를 한순간에 지옥으로 처박았다.
그렇게 우리는 합의 되지 않는 의견으로 두 시간 내내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돌아가자는 나와 방법을 찾을 때까지 여기서 머물자는 지선우로 말이다.
“네 말 다 이해해. 누가 여기서 평생을 살재? 내 말은 지금 당장 ‘금기의 술’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까 이곳에 머물면서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잖아. 의식주가 해결되는 곳을 두고 왜 굳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건데!”
“하…….”
“거기다, 여기서 사람들을 도와주면 아리아 씨도 우리에게 고마워서 금기의 술에 대해 알려 줄 수도 있는 거잖아. 가능성은 여기가 더 많아. 무턱대고 나간다고 해결이 돼? 똑똑한 애가 왜 그래!”
“얼마나 머물 건데? 일주일? 한 달? 아니면 일 년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뭘 믿고 여기에 있자는 거야. 저 새끼들이 뭘 요구할 줄 알고! 정신 차려. 그 사기꾼이 우리한테 퍽이나 돌아갈 방법을 말해 줄까, 응?”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지선우를 압박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겁을 먹은 형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바짝 힘을 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납치당한 거야! 피해자라고!”
“나도 안다고! 그럼 당장 돌아갈 방법을 구해 오든가! 대책도 없이 나가면? 나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여기보다 더 위험하면,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으면? 내가 감정적으로만 이러는 거 같지. 넌 항상 네 말만 다 맞고 나는 틀리지?”
“야, 논점 흐리지 마.”
“어. 너는 이성적이고 상황 판단도 빨라서 좋겠다. 나는 그게 안 돼. 넌 모르겠는데, 난 아니라고! 나도 미칠 거 같아. 내 마음에 아리아 씨의 것이 섞여서 나도 미칠 거 같다고!”
“그러니까! 형…… 제발, 제발 좀 가자고. 내가 책임질게. 형 다치게도 안 하고, 밥도 안 굶길게. 내가 더 노력하면 되잖아. 날 좀 믿어 주면 안 돼?”
짜증스러운 손길로 마른세수를 했다. 안 그러고 싶은데 자꾸만 거친 태도가 나왔다.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잠시 서로 무거운 침묵을 유지하던 중 지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