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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6)화 (6/115)

6화.

샤워실이 가까이에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평범한 소리가 아니란 걸. 무언가 되게 거슬리는 힘이 느껴졌다. 언뜻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나는 홀린 듯 그 힘을 따라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물속에 빠진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하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몸을 감싸는 안정, 나를 진정시키는 따뜻한 감각. 가이딩을 받을 때와 아주 흡사했다.

그러나 가이딩은 아니다. 애초에 가이드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가이딩이 될 리가 없다.

누구지. 누굴까. 뭘까. 뭐가 나를 부르는 걸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라 깊은 지하까지 걸어 들어왔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뭐야.”

목소리가 울리는 어두운 지하 한가운데에 선한 빛을 내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주위로 폭포 같은 물줄기가 솨아아아 흐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묘한 힘. 한 발 내딛자 반딧불 같은 작은 노란 빛들이 사방에서 흩날려 왔다.

웅장하면서도 초라했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작은 세계 같았다. 더럽기만 하던 공간 제일 깊은 곳에 이토록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니. 계속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것과 별개로 약간 기괴하기도 했다.

“…….”

허리를 숙여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힐 때, 희미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넌 누구-”

“유성이니?”

나도 모르게 나무를 향해 말을 거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자 눈을 크게 뜬 지선우가 보였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지선우가 나무로 시선을 돌리며 먼저 선수를 쳤다.

“누가 자꾸만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나와 비슷했다. 마찬가지란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지선우가 나무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우와……! 이게 뭘까. 예쁘다.”

“글쎄. 하지만 평범한 나무는 아니야.”

“협회로 갈 때 이 나무에 대한 보고도 해야겠네.”

나는 나무에 집중하고 있는 지선우의 고운 옆태를 흘긋거리며 대꾸했다.

“솔직히 난 형이 왜 그 새끼들한테 그렇게 집착하는지 잘 모르겠어. 가이딩을 못 받은 게 신경 쓰인다면 협회를 부르면 되잖아. 일단 나랑 나가서 협회에 도움을 청하는 게 훨씬 현명해. 도대체 뭘 노력하겠단 건지 난 이해가 안 가.”

“가끔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이 맞을 때가 있잖아. 내가 지금 그래. 저 사람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 우리가 협회로 돌아가는 동안 폭주하지 않을 거란 확신을 주는 에스퍼가 없어. 모두가 불안정해. 몸의 흐름이 엉망이야. 조금만 안정을 시킨 후에, 설득해서 다 같이 이동하는 게 좋아.”

“지선우.”

“팔이 나을 때까지는 있기로 했잖아. 유성아.”

‘유성아’. 내 이름을 부른 의미. 그만하라는 거겠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지선우를 쳐다봤다. 탐탁지 않다는 시선을 읽었는지 지선우가 어설프게 웃는다. ……그런 표정이면 나는 더 따질 수가 없잖아.

“걱정 마. 내 에스퍼는 유성이 너뿐이야.”

“당연한 말 하지 마.”

“하하! 아기네, 아기야.”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지선우를 품에 안고 머리를 비볐다. 가득 맡아지는 특유의 체향에 몸의 긴장이 녹아 간다. 작은 몸이 버겁게 나를 감싸 안았다. 낑낑거리며 등을 도닥이는 작은 손이 너무 귀여웠다. 그게 좋아서 웃음이 설핏 새어 나왔다.

하지만 지선우, 넌 알아야 해. 에스퍼가 제 가이드의 가이딩을 조금이라도 나눈다는 건 꽤나 커다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 걸.

“그냥, 하아…… 싫다. 형이 다른 새끼 가이딩하는 거.”

투덜거림이 이어지자 지선우가 눈꼬리를 축 내리며 더 다정히 내 몸을 조물조물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편안했다.

그렇게 나른한 시간을 즐기던 중이었다. 오싹. 경고가 온몸을 울렸다.

* * *

“유성아? 유성아, 왜 그래.”

어리광을 부리던 낙유성이 갑작스럽게 몸을 떼어 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낙유성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돼 있었다. 지선우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자얀이 서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옅게 흔들리는 은발, 서늘한 물빛 눈동자. 모든 게 같았으나 웃음기 없는 얼굴이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바로 그때, 불안정한 파장이 느껴졌다.

‘이건…….’

가이드인 지선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피부를 마구 찔러 오는…… 기분 나쁠 정도로 시린 기운. 아마 낙유성이 반응한 것과 비슷하리라.

‘폭주……? 위험해.’

불안정을 넘어 모든 걸 파괴하려 드는 흉포함이 지선우의 전신을 감쌌다. 꿀꺽, 침이 삼켜지고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걸 알아챈 건지 낙유성이 지선우를 감싸 안았다. 어리광을 부리던 아까와 달리 보호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유성아.”

“나도 느껴져.”

“저 사람 지금 당장 가이딩이 필요해.”

“안 돼. 이미 틀렸어. 폭주할 거야.”

“놔줘.”

“뭐? 내가 돌았냐?”

낙유성이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선우 역시 무리라는 걸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지선우는 가이드였고,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가 몹시 강했다. 눈앞에 도움을 청하는 에스퍼가 뻔히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럴 성격도 안 되고.

“한번 해 볼게.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 볼게. 구할 수 있어.”

지선우의 부탁에도 낙유성은 완강했다. 그야 당연하지. 흥분한 호랑이 아가리에 제 짝을 밀어 넣는 병신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아직 폭주한 거 아니잖아!”

지선우가 답답하다는 양 소리를 질렀으나 낙유성은 단호했다.

“폭주할 거야. 안 돼. 죽이는 게 빨라.”

“뭐? 야, 너…….”

“지선우. 선우 형, 제발 좀. 지금 무슨 상황인지 형이 더 잘 알잖아.”

낙유성은 제 팔을 감싼 나무 판 따위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이런…….]

내내 침묵하던 자얀이 입을 열었다. 지하만큼 습한 목소리였다.

[우리 꼬마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았을까.]

“멈춰. 다가오지 마.”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자얀에게 낙유성이 손을 뻗어 경고를 전했다.

[아하…… 우리 도련님.]

“…….”

자얀의 눈동자는 이미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극도로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다. 낙유성은 숨을 낮게 고르며 자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틈이 보이면 죽일 생각이란 건 피차 마찬가지.

[우리 힘겨루기 한번 해볼까.]

당장에라도 폭주할 만큼 불안정한 파장을 뿜어 내고 있는 자얀은 그와 반비례하듯 아주 나른하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보였다.

‘저런 몸 상태로 스스로를 컨트롤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데.’

지선우는 희망을 봤다.

‘기운만…… 기운만 억누르면 돼. 그럼 유성이가 싸우지 않아도 돼. 유성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거야.’

“형! 이 X발, 지선우!”

“미안해!”

자얀에게 집중하느라 조금 느슨해진 낙유성의 손을 뿌리치고 지선우가 그에게로 뛰어갔다.

[…….]

지선우는 자얀의 앞에 서 조금 겁먹은 얼굴로, 그러나 절대 굽히지 않은 눈빛을 빛내며 그를 올려다봤다.

“당신, 지금…… 불안정한 거 알죠.”

“뭐 하는 거야, 당장 돌아와. 지선우!”

[……흐음?]

세 사람의 숨이 한데 얽히며 찰나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지선우가 고개를 돌리곤 낙유성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

“선우-!”

낙유성의 두 눈이 커졌다. 흡, 놀라 들이켠 숨으로 가슴이 크게 팽창했다. 그의 가이드 지선우가 자얀에게 입을 맞췄다. 한참 높은 상대에게 맞추고자 까치발을 딛고, 한껏 몸을 부들거리며.

“하아…….”

뜨거운 숨이 서늘한 적막을 깼다. 하아, 하. 호흡을 고른 지선우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냈다. 확실히 자얀의 거친 파동이 조금이나마 잠잠해진 게 느껴졌다.

자얀은 고개를 내려 지선우를 쳐다봤다.

[아하…… 그래. 그렇군. 천이 왜 그토록 자지러졌는지 알 거 같아.]

말꼬리를 끄는 소리가 배부른 사자 같았다.

[직접 겪어 보니 유감스러울 정도로…….]

자얀의 시선이 굳어 있는 낙유성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물빛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여전히 좋지 못한 기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신비한 힘이구나. 작은 꼬마야.]

“지, 진정된 거지 당신…….”

지선우의 귓가에 속삭인 자얀이 하, 짧은 웃음을 토해 냈다.

[큰일이야, 도련님.]

자얀은 여전히 낙유성을 주시한 채 말했다.

[네게 탐이 나.]

그가 히죽 웃는다.

“봐! 유성아, 성공했- 읍!”

그러곤 낙유성에게 돌아가려는 지선우를 거친 손길로 낚아챘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지선우는 다시 한번 입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전의 입맞춤과 다른, 집요하고 간질거리는 키스였다. 그래, 가이딩이 아닌 키스. 그저 욕망을 채우는 행위 말이다.

질척하게 혀를 얽으면서 자얀은 낙유성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완벽한 도발이었다. 자얀의 눈이 뱀처럼 음습하게 빛났다. 제 것을 빼앗긴 어린 짐승의 분노가 닿아 오는 게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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