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하……? 이봐, 무시하지 마. 나 생각보다 여린 사람이야. 네가 가 버리면 내가 카오루에게 엉망진창으로 혼이 날걸? 훌쩍훌쩍 울 수도 있어.]
나갈 문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놈이 내 어깨를 잡고 말을 걸어왔다.
짜악! 곧바로 손을 쳐 내고 부슬부슬 내려온 앞머리를 다시 한번 휙 쓸어 올렸다. 머리도, 저 새끼도, 존나 거슬리네 진짜.
“야.”
[자꾸 ‘아?’라고 하는데…… 그게 네 이름인 걸까? 아무튼 재밌는 이름이네.]
참아 주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에스퍼 정신 교육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데.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놈의 가까이서 흔들리는 작은 촛불을 주시했다.
일렁일렁 타오르는 주홍빛 불꽃. 어두운 공간, 홀로 빛을 밝히는 불꽃.
그래, 불.
* * *
자얀은 말이 없는 소년을 바라봤다. 나이도, 이름도, 하다못해 언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소년. 도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까, 머리를 굴리던 와중 소년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는 걸 발견했다.
[……아하. 이런 망할 새끼가.]
자얀이 인상을 찡그리며 웃은 순간.
─콰앙!
촛불이 거대한 화염으로 변해 그를 집어삼켰다. 새카만 바다 위를 한순간에 장악한 번쩍이는 번개처럼, 어두운 공간은 소년의 불로 인해 화르르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얀은 입고 있던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갔다. 쾅쾅, 나무 문을 뚫고 화염의 소용돌이가 자얀의 뒤꽁무니를 쫓아 재빠르게 날아왔다.
[자얀 님!]
경계를 서던 보초들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하아, 더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하 감옥을 걸어 나오는 소년은 매우 나른해 보였다. 낯선 복장을 하고, 낯선 언어를 쓰는 미지의 소년 뒤로 새까맣게 그을린 것이 한가득했다. 그의 아래, 모든 것이 불타올라 한 줌의 재로 변해 갔다.
소년은 창을 들이미는 보초들을 향해 짐승과도 같은 금안을 빛내었다. 훅 다가오는 섬뜩한 시선. 보초들이 덜덜대며 창을 떨어뜨렸다.
“꺼져.”
[물러나.]
자얀과 소년이 동시에 말했다.
“이제부터 꽤 힘들 거야.”
[갑자기 사춘기라도 온 거야?]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두 남자의 손등 위로 핏줄이 울툭불툭 솟아올랐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오른 그때-
[카오루에게 작은 꼬마를 데려오라고 전해!]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각자 한마디를 뱉고 두 사람이 충돌했다.
* * *
내 가이드를 찾을 수만 있다면 폭주를 해도 상관없어.
최대 출력을 끌어냈다. 아예 상대를 소각시켜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덤벼드는 명실상부 협회 1위의 힘은 재앙급 괴물 그 이상이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온도. 붉은 불꽃이 파랗게, 점점 하얗게 변했다.
주르륵.
한계를 넘은 힘의 부담으로 코에서부터 뜨끈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온 신경이 하나에 집중된 감각이 싫지 않았다. 상대가 뭉개지고 녹아 가는, 내 아래 굴복당하는 일방적인 폭력은 언제나 고양감을 가져온다.
하아, 하. 오로지 내 목소리만이 들렸다.
‘조금 더, 강하게.’
화르르르!
은발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나조차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하얀 불꽃 안에서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녹아 버린 거겠지. 끝났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끄, 으, 자아…… 브다.]
휘익! 철퍽, 진득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상대를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피부도, 안구도, 머리카락도, 모든 게 녹아 버린 끔찍한 형상을 한 놈이 하얀 불꽃을 뚫은 채 웃고 있었다. 찐득한 무언가를 뚝뚝 떨어뜨리며 나를 잡아 넘어뜨린 놈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등을 들썩였다.
“끈질겨.”
나는 괴로운 숨을 내쉬는 놈의 머리를 한 손으로 콱 잡았다. 이대로 정말 끝을 내 줄게. 그렇게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하려던 찰나, 멀리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멈춰! 멈추라고! 으이씨, 야! 낙유성!”
* * *
[슬라임이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어.]
[그대로 죽지 그랬습니까.]
[으응, 화내면 주름 생겨. 카오루.]
나는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서 방싯방싯 웃고 있는 은발을 쳐다봤다. 놈의 엉망이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재생됐다.
역시 신체 강화계 능력은 귀찮다. 그것도 S급의 신체 강화계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다. 재생 능력은 사기 아닌가? 젠장, 바퀴벌레 같은 놈.
“저런 것들은 한 번에 죽여 버려야 하- 윽!”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너 진짜 사과 안 해?”
지선우가 내 머리를 쾅 쥐어박았다. 콩이 아닌 쾅이다. 호리호리하지만 나를 갈굴 때만큼은 신체 강화계가 되는 지선우다. 나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짜증을 냈다.
“돌았어?”
“이게 진짜.”
다시 한번 주먹을 들어 올리는 지선우를 한 번 노려보곤 고개를 팩 돌렸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건데? 대꾸 없이 입을 꾹 다물자 지선우가 대신 놈들을 향해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차피 말도 못 알아들을 텐데 헛수고는.
“죄송해요. 애가 좀 예민해서, 제가 혹시라도 나쁜 짓을 당했을까 봐 그런 걸 거예요.”
“하, 납치범들한테 잘도.”
“낙유성. 너 자꾸 그래라, 어?”
뭘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은발 옆에 있던 안경 쓴 기생오라비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무어라 대꾸했다. 마음 같아선 코미디 하냐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지선우에게 이 이상의 미움을 받고 싶진 않아서 그냥 침묵했다.
서로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던 때,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짙은 갈색 머리를 한 놈이 시끄럽게 들어왔다.
[너 이 새끼, 뭘 편히 앉아 있는 거야!]
“지랄 났다.”
내 멱살을 잡고 거칠게 일으키는 머저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두 번 말 안 해. 놔.”
[잘 들어. 구역장을 건드리는 건, 서블을 건드리는 거다.]
은발과 달리 눈앞의 머저리는 잘 쳐줘 봐야 B급이다. 내가 함부로 힘을 쓸 수도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뜻이다. 확 그냥 족칠까 싶지만, 지선우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는 뭘 할 수가 없다. 짜증을 삼키고 머저리의 손을 붙잡았다.
하아, 귀찮아. 이제 뭐가 됐든 상관없어. 지선우를 찾았으니 여길 나간다. 그거면 돼.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지선우에게 이만 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이봐요! 왜 애 멱살을 잡고 그래요!”
덥석. 지선우가 머저리의 손을 잡았다.
[으…….]
“손 놔요! 가만있는 애 멱살은 왜 잡고 그래요? 유성이 괴롭히지 말라고!”
[으아악!]
뭐지? 머저리가 발광하며 후다닥 저 멀리 떨어졌다. 혼자 참 바쁘다. 나는 황당함에 허, 실소를 터뜨리고 머저리를 쳐다봤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묘하게 느껴지는 에스퍼 특유의 불쾌한 기운. 이건 보통 자신의 가이드를 보고 육체적 혹은 심리적 흥분을 했을 때 발산되는 건데? ……설마?
“지선우.”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지선우가 어깨를 움찔 떤다. 아, 이걸로 확실해졌다.
“너 X발, 가이딩했냐?”
감히 나를 두고 다른 에스퍼한테 가이딩을 해? 믿을 수가 없다. 지선우가 나 말고 다른 에스퍼한테 가이딩을 했단다.
네 짝은 나인데, 어떻게 날 두고 다른 새끼한테…… 뭘, 했다고? 마음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울컥울컥 솟아났다. 동시에 눈가가 뜨끈해졌다. 열이 뻗쳐 뒈질 거 같았다.
“이런, 씹…….”
욕설을 짓씹듯 뱉자 지선우가 더욱 쪼그라들었다.
“따라와.”
“유, 유성아.”
“다물어.”
콱, 지선우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이 구역질 나는 공간을 나가야겠어. 내 건데. 내 가이드인데. 오로지 나만을 위한 존재인데.
“아, 읏, 아파……. 아파, 유성아. 미안해. 미안…… 읏.”
평소라면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소중히 다뤘던 지선우를 무작정 힘으로 끌었다. 뒤에서 절절매며 쫓아오는 지선우가 불쌍했지만 이 이상 참다간 내 머리가 돌아 버리는 게 먼저여서 배려해 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너 뭐 하는 거야! 얘가 아파하잖아!]
머저리가 내 손목을 붙들고 우리를 멈춰 세웠다.
“…….”
[놔. 함부로 대하지 마. 아파하는데 뭐- 컥!]
뭐라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펼쳐지는 상황도 모르겠다. 그래. 그냥 다 모르겠다. 짜증 나 죽을 거 같은데 네가 뭔데 나를 잡아. 감히 네까짓 게, 왜 지선우의 가이딩을 받느냐고. 내가 어디까지 참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머저리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야.”
[컥, 커억…….]
“짖지 마.”
“유성아, 낙유성! 너 뭐 하는 거야!”
“……형.”
내 팔뚝을 잡고 놓으라 소리치는 지선우를 내려다봤다. 크고 예쁜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내가 화를 덜 냈구나.”
“유성아, 제발…….”
“왜 가이딩을 해? 한국에서도 안 해 줬잖아. 나랑 짝은 괜히 했냐? 나밖에 없다며. 나만 해 준다며. 근데 네가 X발 다른 새끼한테 가이딩을 해?”
“알아. 알았어, 미안해. 네 허락을 먼저 구했어야 했는데 내가 실수했어. 형이 실수했다. 응? 근데 네가 잡고 있는 그 사람, 파장이 너무 불안정했어. 마치 오랫동안 가이딩을 한, 하…… 한 번도 안 받은 사람 같아서…… 자칫하면 폭주할 거 같았다고!”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