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뭐라고 떠드는 거야? 무슨 저런 말이 다 있지?]
[애들한테 겁주지 마.]
[애드을? 허, 멍청아. 넌 저게 애들로 보여? 저 불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천천우가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동료에게 미친 소리 말라며 질색을 해 댔다.
동료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곤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저런 불꽃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거기다 아이들…… 이라고 하기엔 유독 한 놈의 덩치가 듬직했다.
[헹, 너 말고 참모의 생각을 물어야지. 이봐, 카오루. 어떻게 생각해. 잡아?]
[심문하고는 싶지만……. 과연 저들과 말이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통어를 모른다니, 거짓말 같군요.]
카오루는 슬쩍 시선을 돌려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자얀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무섭도록 솟구치는 불길 앞에 바짝 서서 검은 머리의 소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늘 그랬듯 웃음 어린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반짝거리는 이유가 따로 있을 터. 굳이 정답을 짐작해 보자면 아마 저 큰 체구의 소년 때문이리라. 동경의 패왕 말고 자얀의 적수가 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자얀. 저 아이들을 어쩔까요? 아무리 봐도 저기 키가 큰 소년은 저희 같은 신비한 힘의 소유자 같은데…….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걸까요.]
[곱게 따라올 것 같지는 않은데. 자얀, 어서 명령을 내려! 난 저 애새끼랑 붙어 보고 싶어. 핫,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눈깔 봐, 캑! 완전 재수 없어.]
[난 뭐가 됐든 상관없어. 가서 멜리나와 애들을 봐야 하니 후딱 해치워 버리자고.]
마치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것처럼, 햇빛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듯한 하얀 피부의 자얀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무리의 중심이라 말하기엔 너무도 가벼운 제스처였으나 주위 사람 모두 놀라울 정도로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사나운 사냥개 여러 마리를 데리고 있는 주인 같았다.
[초대는 정중히 해 보도록 하지. 뭐, 내가 워낙 배운 게 없어서 바라는 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하던 대로 저희가 보조를-]
[아니.]
화르르! 다가오지 말라는 양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낸 불기둥을 본 자얀은 제 부하들을 향해 나른히 웃어 보였다.
[너희들은 작은 꼬마를 맡도록 해. 저 들개는 내가 맡지.]
[괜찮겠습니까? 저 소년, 어쩌면 뤙보다 더욱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으음. 내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 그러니까, 그래서……. 오래오래 살아야지. 카오루.]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얀은 타오르는 불기둥을 뚫고 맹렬히 달려 나갔다.
결과적으로 소년은 잘 싸웠다. 적어도 카오루가 보기에는 그랬다. 인정하긴 싫지만 소년의 힘은 우두머리 자얀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강력했다.
자얀의 공격이 예측할 수 없게끔 변칙적으로 날아가 소년을 매섭게 몰아붙였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대응했다. 어디선가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소년에게 자얀은 ‘버틸 수 있는 수준’의 위험. 딱 그 정도로만 보였다.
그러나 몇몇 불운이 소년을 패배로 이끌었다.
하나는 자얀이란 남자의 끈질김이 생각보다 굉장하다는 것이다. 소년이 아무리 잘났다 한들 전혀 지치지 않는 상대를 대적하며 다른 졸개들까지 신경 쓰는 건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둘은 상황의 불리함. 전투하는 와중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격자는 큰 위험을 진다. 서블은 그런 소년의 약점을 노리기로 했으며, 당연하게도 그건 정답이었다.
자얀이 시선을 끌어 준 덕에 작은 꼬마를 인질로 잡을 수 있었고, 소년은 인질을 확인하자마자 패배를 선언했다.
* * *
“퉤, X발…….”
나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바닥으로 뱉으며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걸 어필했다. 양 손바닥을 보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저 멀리 한 사내에게 잡혀 울상을 짓고 있는 지선우가 보였다.
미안해. 입술을 벙긋거리는 녀석의 얼굴이 죽상이다.
미안하긴, 멍청한 건 나다. 아무리 떼를 써도 지선우를 먼저 보냈어야 하는 건데. 형을 지키며 싸울 수 있다고 판단한 내 오만이 전투를 패배로 이끌었다. 만약 이대로 지선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겠지.
[아하? 저쪽 꼬마가 네 소중한 사람인가 봐. 바로 꼬리를 마는 걸 보니.]
앞으로 다가온 은발을 쳐다봤다. 뺨에서 피를 흘리며 배시시 웃는 은발의 개새끼. 당장 면상을 날려 버리고 싶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뭐라 지껄이는데, 어차피 조롱이나 욕설이겠지. 나는 원하는 바를 말하기 위해 놈을 불렀다.
“야.”
[들개, 재밌었어.]
“건들 거면 나만 건드려.”
[부디 너와 저 꼬마가 뤙이 보낸 끄나풀이 아니길 빌어. 난 아이를 조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어우,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해. 야만적이야.]
“지선우한테 손대기만 해.”
내 경고에 은발 녀석이 어깨를 으쓱인다. 알아들은 건지, 아닌 건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지선우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폭주고 나발이고 다 죽여 버릴 테다.
[들개, 배에 힘 푸는 걸 추천할게.]
“한국말로 씨불여, 새끼야.”
[경험에 의한 조언이니 값어치는 있을 거야.]
“뭐라는- 윽!”
가까이 다가와 웃던 녀석이 순식간에 내 명치로 발을 꽂아 넣었다. 묵직하게 들어온 공격은 무방비한 상태의 나를 손쉽게 제압했다. 일반인이 아닌 비슷한 급의 에스퍼에게 이토록 일방적으로 맞은 건 처음이었다. 입 밖으로 침이 주르륵, 떨어졌다.
바닥에 엎드려 콜록콜록 기침하자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맷집 좋은데?]
“이, 씨, 발…….”
가까스로 고개를 드니 히죽 눈을 접는 놈이 보였다.
[유감이야.]
“죽, 여 버릴…….”
[꽉 깨물어. 이 나간다.]
빠악-! 놈이 화려하게 돌려 찬 발차기에 직통으로 머리를 맞았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지선우가 발버둥 치며 고함을 내지르는 게 보였다.
젠장…… 선우 형, 건들기만 해. 나는 중얼거리며 끝내 정신을 놓았다.
* * *
기절을 한 건 아주 어릴 적 스스로의 힘을 컨트롤하지 못한 머저리 시절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찰캉, 손목을 강하게 죄고 있는 쇠사슬을 올려다보며 낮은 숨을 골랐다.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힘을 쭉 빼고 있던 몸의 근육을 조금씩 긴장시키며 고개를 휙휙 털어 내자 슬슬 정신이 또렷해졌다.
[으응, 안녕. 좋은 오후지?]
개 같은 언어, 말투, 목소리. 눈뜨자마자 다시 감고 싶어지네.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유일한 촛불 아래, 은은히 빛나는 은발이 보인다. 음영 진 얼굴은 퍽 익숙했다. 낮에 봤던 그놈이었다.
“…….”
어차피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나는 대꾸하지 않고 녀석을 조용히 응시했다. 놈은 바위 따위에 앉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주위가 습하고 소리가 울리는 걸로 봐서 지하인 것 같다. ……꼴에 감옥도 있나? 거지새끼들이 아주 고급지게도 노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선이 굵어.]
뭐라는 거야? 기분 나쁜 새끼.
[나 혼자 떠들면 너무 이상하잖아. 대화가 통하지는 않아도 반응 정도는 보여 주지 그래.]
녀석이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바람 냄새와 옅은 피 냄새가 한데 섞여 풍겼다. 녀석에겐 나와 비슷한, 꽤나 짙은 살육의 냄새가 났다. 많은 생명을 죽인 자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언제나 그렇듯 역했다.
나는 놈을 무시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차렸으면 제일 중요한 걸 되찾아야 할 시간이다. 나의 가이드, 지선우.
‘여기에는 없어.’
지선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볼일은 없지.
우지끈, 철그렁! 손목을 강하게 죄고 있던 쇠사슬을 가볍게 부숴 바닥으로 던졌다. 녀석도 겨우 이따위 걸로 나를 붙잡을 수 있다 생각한 건 아닌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는 게 전부였다.
“지선우 어디 있어.”
[정말 통어를 모르는구나. 무는 법은 배워도 짖는 법은 안 배운 건가?]
“야.”
나는 팔짱을 끼고 흥미로워하는 놈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네 X같은 말 몰라.”
마음 같아서는 당한 것의 열두 배를 돌려주고 싶지만…… 됐다. 지선우를 지키지 못했던 값이라 치면 억울할 것도 없지. 지선우를 찾고 여기를 떠난다. 나의 분노보다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안 그래도 오늘 오프여서 지선우랑 영화나 보러 가기로 했는데, 보고 싶다는 영화는커녕 힘든 경험이나 시키다니.
“에스퍼란 새끼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하아, 짜증스러운 숨을 뱉고 손목에 채워진 워치를 다시 한번 만졌다. 혹시나 작동할까 싶었지만 역시나. 욕을 중얼대며 거칠게 워치를 풀어내 터뜨렸다.
펑! 매서운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쩌렁 울렸다. 돌아가면 이사장의 멱살을 잡고 뭐 이딴 걸 만들었냐고 따귀라도 날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들개, 아직 나와 대화 중이잖아. 연장자를 무시하는 건 좋지 못한 습관이야.]
“문이 어디야.”
[아, 혹시 네가 연장자일까? 원한다면…… 으음, 형이라고 부를게.]
“하, 뭐가 보여야지. ……씹.”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