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미래
“유성아, 낙유성. 정신 좀 차려 봐!”
간절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선우가 보였다.
“너 괜찮아?”
지선우가 한 번 더 내 상태를 확인했다. 가이드답다고 해야 할지, 그냥 지선우답다고 해야 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지선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절로 안 좋은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그란 눈으로 내 걱정을 하는 지선우의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산발에 피부 이곳저곳에는 생채기가 나 있다. 가뜩이나 몸도 유리 인형 같은 게.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지선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네가 끌어안고 있어서 그나마 나아. 그래서 내가 너보다 먼저 정신 차린 거고.”
“내 걱정은 쓸데없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에스퍼랑 가이드가 같냐?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지선우의 하얀 뺨을 매만졌다. 괜히 속이 쓰렸다. 제 가이드 하나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머저리가 된 기분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내 표정이 안 좋았는지 지선우가 군필 대한 남아를 우습게 보지 말라며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그보다 여기가 어딘지 넌 알겠어?”
지선우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물었다.
“워치도 작동을 안 해.”
손목에 채워진 워치를 딸깍이며 말하는 지선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주위를 훑어볼 생각이 들었다.
곳곳이 부식된 낡은 건물이 죽 늘어서 있는 게, 꼭 버려진 도시 같았다. 왜, 미디어에 나오는 괴담 속 장소들 말이다. 거기다 넓은 평야까지 더해지니 이런 곳이 한국에 있었나 의아했다. 아니면 어디 다른 나라로 이동을 한 건지도 모른다. 다른 에스퍼의 능력에 휘말린 거라면 꽤나 가능성이 있다.
지선우의 말대로 손목에 채워진 워치는 먹통이었다. 핸드폰 전파도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나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현재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건 에스퍼 특유의 날 선 감각뿐이었다.
그때, 아주 작은 소리가 바스락하고 들려왔다.
“주변에 누구 없을까? 그런 포털은 처음 봤어. 에휴…… 다른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어떻게든 협회에 도움을 요청-”
“지선우.”
나는 지선우의 말을 뚝 끊어 냈다. 지선우가 맑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응?”
투명한 목소리를 끝으로 지선우를 재빠르게 내 뒤로 숨겼다. 익숙한 거부감이 가까워져 목젖이 절로 꿀렁이고, 손끝이 저릿해졌다. 긴장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여실히 느꼈다.
짐승처럼 거칠고 잘 벼른 검의 날처럼 소름 돋는 기운.
“……에스퍼.”
멀리서부터 주변의 공기를 일렁일렁 엉망으로 만들며 날 선 내 기운과 맞닿아 온다. 기 싸움부터 나를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쩍 벌리는 게 보통 싸가지가 아닐 수 없다. 내 얼굴을 본 지선우가 따라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웅웅웅, ‘놈’이 점차 나를 자극하며 다가왔다.
‘건방진 새끼.’
하, 실소가 터졌다. 굳이 유치한 기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넙죽 엎드리는 취미 역시 없다. 나는 등을 살짝 구부리고서 애써 억누르고 있던 본능을 끌어 올렸다.
“……유성아.”
능력을 쓰기 직전의 나를 알아서 일까. 지선우가 조심스럽게 내 옷자락을 잡아 온다. 이 작은 행동 역시 본능이었다. 상대를 강제로 찍어 누르고 싶어 하는 에스퍼와는 다른, 가이드만의 본능.
제 짝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서포트. 작은 접촉으로 에스퍼의 흥분을 누르고, 능력으로 인한 부담을 줄이며, 상대 에스퍼보다 더한 출력을 낼 수 있도록. 즉 제 에스퍼가 상대 에스퍼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게 보조하는 거다.
특히나 각인까지 한 상태라면 다른 페어보다 더욱 좋은 효과를 보여 준다. 바로 그게 나와 지선우였다.
“에스퍼라면 혹시 다른 협회 사람들 아닐까? 싸우지 말고 얘기해 보자. 응?”
“너도 알잖아, 에스퍼끼리의 전투는 곧 나라 간의 전쟁을 의미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벼 온다면 둘 중 하나지. 미쳤거나-”
“미등록 에스퍼거나.”
지선우가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래도…….”
“걱정 마. 저쪽이 선만 안 넘으면 나도 움직일 생각 없어.”
그렇게 ‘놈’과 대치하며 지선우를 달래 주고 있을 때였다.
[뭐야. 애들이잖아?]
[정말 그 기운이 쟤네들한테서 느껴진 거라고?]
[아직 상대를 모릅니다. 가까이 다가가지 마세요.]
버석한 먼지바람이 불고, 청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세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 나라말이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다. 나는 시선을 내려 지선우와 눈빛을 교환했다. 지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에서 영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기 죄송한데, 뭐 좀 여쭤볼게요. 저희는 한국 이능력 협회 소속입니다. 제 이름은 지선우고, 가이드예요. 되게 당황스러운 질문이란 건 알지만 지금 혹시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지선우가 얘기할 동안 나는 숨어 있는 한 놈에 대한 경계를 더욱 바짝 세웠다. 앞에 있는 잔챙이 세 마리와 수준이 다른 놈에 대한 경계였다.
건방진 미등록 에스퍼가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나를 자극한다. 이렇게까지 까불거리는 걸 보면 한판 해보고 싶다는 거 같은데. 들개는 훈련받은 군견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톡톡히 가르쳐 주도록 해야겠지.
[에엥, 뭐라는 거야. 너희들 통어 사용할 줄 몰라? 허 참. 카오루, 얘네 좀 이상한데?]
[확실히. 옷도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고, ……거기다 깨끗하군요.]
[동경의 놈들이라면 통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도대체 뭐야, 너희!]
“에휴, 그래.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유성아, 어떡해? 이 사람들 영어 할 줄 모르나 봐.”
“…….”
“유성아?”
* * *
지선우는 제 앞을 막고 선 낙유성을 쳐다봤다. 낮고 느린 호흡, 무섭도록 한곳에 집중하고 있는 눈빛. 절로 소름이 돋았다.
‘유성이가 반응하고 있어.’
어지간해선 자극할 수 없는 SS급 에스퍼를 감히 누가 이토록 건드리고 있는 걸까. 이 정도의 흥미를 보이는 건 예전, 도시 한복판에 재앙급 몬스터가 출현한 이후 처음이었다.
“유성아. 낙유성!”
하아, 하……. 차가운 숨소리와 함께 낙유성의 동공이 세로로 좁아졌다. 아오, 젠장! 큰일 났다는 느낌에 지선우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유성이 목줄을 더욱 단단히 죄어야 해. 아니면 이 새끼 사고 칠 각이야.’
침을 꿀꺽 삼킨 지선우가 억지로라도 점막 접촉을 시도하려던 찰나, 낙유성의 주변으로 거대한 화염이 승천하는 용처럼 웅장히 솟아올랐다.
[이런.]
일렁이는 화염 속에서 누군가가 여유롭게 나타났다.
[반가워서, 장난을 좀 친다는 게.]
휘날리는 로브 아래, 채도 높은 은발이 반짝인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기다란 속눈썹 밑으로 물빛의 눈동자가 서늘히 드러났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살아생전 저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일 만큼.
지선우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세상에! 유성이보다 잘생긴 사람은 처음이야.
[통구이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유려하게 들려왔다. 꼭 노랫말 같았다. 지선우는 그를 흘끔거리면서도 낙유성의 넓은 등 위로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올렸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느껴졌다.
‘진정해, 제발.’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부드럽게 가이딩을 시도했다. 아주 천천히 자신을 느낄 수 있게.
다행히 낙유성은 진정하기 시작했다.
“유성아.”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를 불렀는데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지선- 아니, 형.”
웬일로 형이라 하냐? 지선우가 눈을 껌뻑거리고 있자 낙유성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퍽 진지했다.
“뒤로 길을 뚫을 테니까, 뛰어.”
“뭐?”
“아무 건물로 들어가서 몸을 숨겨.”
“널 두고 혼자서 가라고?”
“저 새끼.”
“은발인 사람? 저 사람이 왜?”
“내 한 급 아래.”
낙유성은 이런 걸로 농담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등록 에스퍼가 S급인 데다 혼자도 아니라는 소리다.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치만-”
“놈들을 봐. 복장이 같아.”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거야?”
“반정부 테러 조직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 말 듣고 뛰어. 저 세 놈만 있다면 문제없겠지만, 은발이 있는 이상 널 끼고 싸우는 건 무리야. 적어도 네가 도망갈 시간은 벌 수 있으니까, 가.”
낙유성은 단호했다.
“최대한 멀리 숨어 있어. 어떻게든 내가 찾아갈게.”
혼자 보내서 미안해. 낙유성이 작게 웃는다. 반달로 접히는 눈과 옅게 풍겨 오는 낙유성 특유의 체취,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소중한, 나의 에스퍼.’
마음속 어딘가가 울컥했다. 또 혼자서 얼마나 아프려고? 지선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싫어. 널 두고 갈 수는 없어.”
“선우 형.”
“그렇게 불러도 안 돼.”
“지선우, 말 안 들어?”
“안 되는 건 안 돼. 저 사람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고집 피울 때냐.”
에스퍼만 가이드에게 집착이 있는 게 아니다. 가이드 역시 ‘내 에스퍼’에 대한 강한 보호 본능을 느낀다. 자신이 없으면 혼자 열에 들떠 헐떡이는 작은 존재. 자신이 지켜야, 품어야 하는 아이.
“넌 내 에스퍼야. 절대 혼자 못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