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바닥에 양손을 짚고 머리를 푹 숙인 남자를 향해 루시엘이 거만하게 걸어갔다. 그녀는 남자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관 모양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멀미약을 한 병 꺼내 도르륵 굴렸다.
“나의 오른쪽 두 번째 날개여, 내 너에게 생명수를 선사하니 두 다리로 땅을 밟을지어다.”
“루, 루시엘……. 영광입니다…….”
욕지기를 억누르느라 엎드린 상태로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던 남자가 멀미약을 품에 소중히 껴안고는 비실비실 일어났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둘러 병의 뚜껑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느새 브라운이 루시엘의 곁으로 가 섰다. 서준은 그나마 안면을 익힌 그들의 곁으로 뛰어갔다. 긴 다리로 겅중거리자 몇 걸음 되지도 않았다.
“저 친구는 데니스예요. 루시엘하고 조금 통하는 면이 있죠.”
“아, 예…….”
저게 약간 장단이 맞는 정도로 나오는 대답이었나? 서준이 보기에는 데니스는 이미 옛적에 루시엘에게 경도된 게 틀림없었다. 지금도 보라. 그의 번들번들한 안광이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안경알을 넘어 빛났다. 봄날의 새순처럼 연한 풀색 눈동자로 저토록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데니스는 기본적인 용모는 나쁘지 않았으나 심하게 여위어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왔고, 턱이 좁아 예민해 보였다. 잔뜩 구부린 어깨며 파들거리는 다리가 주변인을 모조리 거절하는 듯한 분위기를 퍼뜨렸다. 동시에 루시엘에게 맹목적인 기색이 타인의 눈에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뭐, 남들 눈엔 나도 비슷하겠지.’
홀로 자조의 말을 삼킬 때였다. 스포츠카의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한쪽 팔에 종이봉투를 껴안은 그는 데니스와는 반대되는 의미에서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한 남자였다.
위아래로 맵시 있게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속에 입은 셔츠가 특히 화려했다. 채도가 진하고 명도는 낮은 초록색의 셔츠에는 뭘 표현하려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흰색 패턴이 찍혀 있었다. 또한 정장 재킷의 색 또한 단조롭지 않았다. 옷감에 옅은 붉은 기가 흐르고 은은한 광택이 돌아 뭇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선글라스를 접어 상의 주머니에 넣더니 진한 갈색 눈을 찡긋거렸다.
“오, 친구들. 벌써 도착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저쪽이 데니스라고 했으니, 이쪽이 맥컬란이겠군. 설마 데니스가 데니스 맥컬란이진 않겠지.’
마치 배우나 운동선수의 이름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건들건들 다가오는 그를 보았다. 맥컬란은 빈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짙은 색의 손가락이 그보다 더 어두운 흑갈색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왁스를 두껍게 발랐는지 굽실거리는 머리의 형태가 흐트러지기는커녕 단단했다. 말끔히 드러낸 이마에 한 올 흘러내린 머리카락조차 본인이 의도한 듯했다.
맥컬란이 높게 솟은 콧대를 긁으며 근처를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돌아가는 목이 참 바빴다. 하지만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불만스럽게 입술을 구겼다.
“브라운, 미나는? 미나도 오늘 나오기로 했잖아.”
맥컬란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데니스를 빤히 바라보던 브라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모임에 미나가 나오는 건 맞지만, 미나는 폐병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뭐? 그럼 내가 맥주를 챙겨 온 보람이 없잖아.”
옆구리에 낀 봉투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내용물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브라운도 눈을 살짝 찌푸렸다.
“술을 마시면 운전은 어떡하려고요.”
“내가 왜 여기까지 데니스를 태워 줬다고 생각해? 저 자식도 생각이 있으면 이번에는 제가 운전하겠지. 음, 잠깐. 이 미인은 또 누구야?”
맥컬란은 브라운의 옆에 인형처럼 얌전히 있던 서준을 발견하고는 돌연 목청을 높였다. 그러곤 브라운에게 과장되게 손짓하며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귓속말했다. 곁에 있는 서준에게도 뚫린 귓구멍이 있으니 반쯤은 들으라는 소리였다.
“이봐, 브라운. 이만한 미인이 참여하면 참여한다고 나한테 진작 알려 줬어야지! 대체 누구야? 다크루시퍼? 캘리포니포니? 설마 마테오는 아니겠지? 그 자식은 분명 남자라고 확신하거든. 키라도 아닐 테지? 난 저번에 그녀와 만났으니까. 그만하면 개성적이고 나쁘지 않았어. 아, 혹시 안지?”
이쯤 되자 그도 모를 수가 없었다. 멍하니 루시엘의 인사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데니스를 구경하던 서준이 황당하게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맥컬란은 두툼한 입술을 올리며 활짝 웃었다.
“맥컬란, 그런 거 아닙니다. 오늘 처음 온 사람이에요. 오컬트 나이트의 회원도 아니고요.”
브라운이 당황스러워하며 난봉꾼을 말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쌍방의 긴밀한 협력이 없었기 때문일까? 맥컬란이 혈관에 피 대신 버터가 흐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리따운 아가씨, 이곳에 온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나도 그렇고요. 우리는 오늘 아주 재밌는 경험을 할지도 몰라요. 저기 있는 작은 숙녀가 끼어들면 종종 신기한 일이 생기거든요. 한, 십 분지 일로?”
장담하기에는 미묘한 확률이었다. 서준은 자신만만한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블루종 재킷을 벌려 주었다. 웃는 낯이 서서히 구겨지고 맥컬란은 늘씬한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준은 오늘 목 근처가 깊이 파인 헐렁한 모래색 브이넥 셔츠를 입었다. 허리에는 검은 패니 팩을 둘러 살집 없이 납작한 배를 졸라매었고, 단단히 맨 끈 안쪽으로 셔츠의 옷자락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와 낡은 운동화를 맥없이 바라보던 맥컬란이 눈높이에 있는 쇄골 근처를 확인하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무리 옷이 넉넉해도 납작한 가슴팍과 마른 빗장뼈의 생김새, 그리고 튀어나온 울대는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었다.
“사내자식이면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해! 게다가 머리 꼴은 또 뭐야? 입술 색 하며, 어처구니가 없군.”
그는 굴절된 분노를 쏟아부으며 혼자 성을 냈다.
“와…….”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비죽 잡아당긴 서준이 이렇게까지 말문이 막힐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머리카락은 조금 덥수룩해지기야 했지만 어디까지나 미용실에 들를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었으며, 입술은 오늘따라 혈색이 좋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젠장, 나도 폐병원 쪽으로 가야 했어.”
맥컬란이 휴대 전화를 꺼내 매서운 손길로 번호를 눌렀다. 어찌나 빠르던지 잔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서준은 이토록 무례하게 여자에 목매는 남자는 또 처음 만나 얼이 빠졌다. 옆에서 브라운이 조그맣게 맥컬란은 늘 저러는 편이니 무시하라고 조언을 건넸다.
“아, 미나! 당신이 오지 않아서 놀랐지 뭐야. 내가 어디냐고? 여긴, 응. 해피 피그 공장 앞이지. 당신이 없어서 그런지 너무 쓸쓸해.”
그는 미나와 만나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고 싶다는 둥 온갖 기름칠한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 있는 상대방은 맥컬란의 관심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다른 이유로 흥분하는 중이었다.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서준에게도 약간 들렸다. 미나는 야유 섞인 비명을 질러 댔다. 만약 맥컬란이 바로 앞에 있었다면 그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을 것 같았다.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음, 뭐? 미나, 키라가? 남자를 데려왔다고?”
아무래도 맥컬란이 관심을 가진 여자는 미나만이 아니었는지 빠르게 대꾸했다. 서준의 귀도 덩달아 솔깃해졌다. 그는 곰 인형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다.
“혹시 남자 친구야? 그렇다고 해? 아, 그건 아니라고? 이름이 존? 욘? 저기, 미나. 말을 조금만 천천히 해 줘……. 엄청나게 잘생, 흠. 미나, 남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니야. 몸도 좋다고?”
아무래도 맥컬란은 얼굴보다는 몸에 자신이 있었는지 시무룩하게 자신의 가슴팍과 배를 내려다보았다.
“꽃다발을 사러 들어갔다고? 아니, 그 남자 정말 키라와 사귀는 거 아닌 거 맞아?”
미나는 맥컬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대신 마지막으로 오우, 갓, 지저스 따위를 부르짖으며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그녀는 맥컬란과 나누는 대화보다는 새롭게 등장한 뉴 페이스와의 만남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미나? 미나!”
오로지 맥컬란만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정하게 대기 화면으로 돌아온 휴대 전화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폐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던 오컬트 사이트 모임의 회원들도 새로운 친구를 데려온 듯했다. 그는 허리에 맨 힙색을 만지작거렸다. 편의점에서 산 건 비단 다친 손을 치료하기 위한 약만이 아니었다. 구시렁거리며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는 맥컬란에게서 시선을 돌린 서준이 브라운의 팔을 슬쩍 찔렀다.
“지금 들어가야 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듣지 못했는데 혹시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귀신이라도 나오는 걸까? 이제는 제법 귀신 친화적인 생각이 가능해진 그가 물어보자 브라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아. 그러고 보니 서준은 오컬트 나이트의 회원이 아니니 모르는 게 당연했는데……. 내가 말해 주는 걸 잊었네요.”
브라운의 통통한 손가락이 정면의 폐건물을 가리켰다. 이 근방에 차를 세워서 대강이나마 저곳이 목적지가 아닐까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홀로 가늠하는 것과 확답을 받는 건 체감상 큰 차이가 있었다. 브라운은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는 해피 피그 공장으로 불리던 돈육 가공 공장이에요. 본래는 근처에 농장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죠. 그 시작점이 바로 이 공장이었다고 해요.”
해피 피그 공장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옛날 이 일대를 주름잡던 회사가 있었다. 직접 돼지를 도축하던 발골사가 차려 차근차근 성장시킨 회사였다. 더불어 그는 시장의 흐름을 읽는 실력도 탁월해 수많은 공장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를 세운 사장의 경우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 발골사의 억센 팔도 가늘어졌다. 마침내 스스로 돼지 한 마리를 옮기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자식의 마음가짐은 아버지만 못했다. 발골사의 아들은 인생을 헛되이 보내며 빈둥거렸다. 애당초 부모만 한 향상심이 부족하다 못해 전무했다.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 그럴듯한 직함만 단 무능력자가 가장 위에 있었으나 회사도, 공장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계기가 모자랐을 뿐이다. 물방울이 연달아 같은 자리에 떨어지면 바위도 쪼개지기 마련이었다. 발골사의 아들, 회사의 사장, 무능력한 공장장의 공장에서 출하한 통조림에서 이물질이 나왔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굴러가던 회사는 그 이물질을 기점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통조림에서 나온 이물질이 마약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