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9. 일일 체험! 도살 공장
밴 한 대와 트럭 한 대가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섰다. 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른 아침 바람을 맞은 갈대가 산들산들 흔들리고 맑게 지저귀는 새의 울음이 간간이 유리창 너머로 울렸다. 왼편에는 자유롭게 자란 풀이 부드러운 보리색으로 가득했고 오른편에는 비슷비슷한 건물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낡은 건물에는 하나같이 인적이 없는 곳 특유의 쓸쓸함이 묻어났다. 기묘한 향수가 느껴지는 한가로운 시골의 정경이었다.
서준은 나른한 기분에 젖어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같은 길을 앞서가는 밴을 뒤따르는 중이었고 저것을 모는 건 브라운과 루시엘이었다.
서준은 그들과 같은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고작 반나절이었으나 짧고 충실했으며, 몸이 간절히 바라마잖던 휴식이었다.
흉가를 빠져나온 서준은 반쯤 넋이 나간 채 브라운이 가는 곳을 좇았다. 상처가 터진 오른손은 욱신거렸고 갓 사지에서 벗어난 육체는 전신이 쑤셨다. 그는 브라운의 도움으로 근처 편의점에서 사소한 물품을 산 뒤 모텔방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먼지와 피를 씻어 내고 간단히 치료를 끝내자, 콩나물 같은 몸이 비척거리다가 침대로 쓰러졌다. 약을 바르기 위해 몸을 씻은 것도 기적에 가까웠으므로 그는 곧장 수마에 빠져들었다. 텅 빈 위장도 그때만큼은 잠잠했다. 꿈조차 찾아오지 않는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같이 잠에서 깬 서준은 끔뻑거리며 낯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뿐인 눈에서 생기가 맴돌았다. 이슬처럼 영롱한 눈빛이었다. 서준은 부드럽게 열렸다 닫히는 눈꺼풀을 비교적 멀쩡한 왼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깨달았다.
‘잠이 보약이구나.’
몸은 여전히 나른했지만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했다. 이후 그는 또 다른 이치를 깨우쳤다. 바로 사람은 제때 식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서준이 느릿느릿 세수하고 미적미적 옷을 갈아입자 귀신같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바로 루시엘이었다. 그녀는 어제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완벽하게 손질된 머리카락이 대단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브라운과 나란히 서준을 모텔 옆의 식당으로 이끌었다. 루시엘은 이렇게 말했다.
“금일 해가 찬란히 빛나고 달이 얼굴을 비칠 때까지, 바로 나 치천사 루시엘의 인도에 따라야 하느니 그 몸에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옆에서 브라운이 해석했다.
“오늘 종일 돌아다녀야 하니까 든든히 먹으라는 뜻이에요.”
서준은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에…….”
그리하여 이 기묘한 조합의 세 사람은 아침 식사치고는 실하게 차려 먹었다. 주문받던 종업원의 손길이 바빠지는 걸 보며 서준도 조금 얼이 빠졌다. 대체 얼마 만에 느끼는 평안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물을 홀짝거리며 의자에 등을 편안히 기댔다. 루시엘이 이상한 말투로 지껄이면 브라운이 명료하게 주문하는 광경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곧이어 식사가 나왔다. 비록 얼큰한 찌개와 갓 지은 뽀얀 쌀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국살이가 스무 해가 지났다고 위장이 얼른 밥을 내놓으라 투정을 부리진 않았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내 위장도 미국산이라고 볼 수 있잖아?’
그렇다면 한식을 그리워하는 건 영혼이란 말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가 옥수수수프를 떠먹었다. 따뜻했다.
식사하며 서준은 브라운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성명과 목적은 전날 말했으므로 시시콜콜한 잡담과 더불어 오늘의 일정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루시엘이 옆에서 음식을 흡입하는 동안 브라운이 조곤조곤하게 입을 열었다.
“네. 그러니까 우리는 아침 식사를 끝내면 해피 피그 공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거예요. 자차만 있으면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오전에 그곳을 탐사하고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다음 이동하는 거죠. 아마 키라는 오후에 갈 폐병원에서 만날 것 같아요. 이런, 루시엘. 흘릴 뻔했잖아.”
“우웅웅.”
양 볼이 설치류처럼 볼록해진 루시엘이 인간은 알아듣지 못할 의문의 의성어를 내뱉었다. 브라운은 익숙하게 루시엘을 돌봤다. 그들의 나이 차이는 거의 열 살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브라운은 30대를 목전에 두었으며 서준보다도 훨씬 연상이었다. 물론 서준은 내심 제 나이에 전생의 세월을 덧붙여 생각했으므로 유교적인 공경이 샘솟지는 않았다.
“오컬트 사이트 모임은 원래 그런 곳에서 합니까?”
서준이 빵을 결따라 찢으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루시엘이 흘린 지저분한 흔적을 대신 치워 주던 브라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온화한 푸른색 눈동자로 루시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지는 않아요. 경우는, 음. 반반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범한 곳에서 만날 때도 있는데 이번처럼 오컬트적인 소문이 나는 장소를 찾아가기도 하죠. 다들 이런 걸 좋아하고요.”
“그렇군요. 아, 브라운. 그보다 연락 말입니다.”
“네, 서준. 그러잖아도 그것도 말하려고 했어요.”
브라운이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컵을 내려놓았다. 그는 제 휴대 전화를 건드리며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우선 키라한테 연락을 남겨 두긴 했어요. 하지만 전 그녀와는 연락처를 교환한 적이 없고, 전화번호를 아는 건 루시엘인데 어제 보셨다시피…….”
옆에서 호기롭게 차가운 얼음물을 단번에 마신 루시엘이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우주는 한정되어 있으며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을 머리에 새겨 넣느니 더 올바른 선택을 했을 뿐.”
즉 휴대 전화를 집에 놔두고 온 것도 모자라 키라의 연락처를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뜻이었다. 더듬더듬 애매한 기억을 근거로 키라의 추정 연락처에 전화를 하고 문자도 남겨 보는 정도의 시도는 했다. 하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듣자 하니 키라는 배타적인 성격으로 어쩌면 본인이 저장한 번호 외에는 죄 차단을 해 놓았어도 놀랍지 않다고 했다. 서준으로서는 불운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제 주웠으면 어디 버리거나 팔아 치우지는 않았을 거예요. 키라도 피피페페 시리즈 인형을 좋아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렇지, 루시엘?”
“키라의 보잘것없는 안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드문 경우였도다.”
수많은 접시를 텅 비운 루시엘이 시치미를 뚝 떼며 입가를 닦았다. 도무지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바로 모텔에서 나왔다. 오후에는 연이어 폐병원을 찾아야 했으므로 서준은 트럭을 끌었다.
“흠.”
앞서가는 밴을 빤히 바라보던 서준이 창문을 조금 내렸다. 선선한 바람이 유리를 타고 넘어왔다.
“밴이라.”
육인승 승합차를 오래도록 눈에 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서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조그마한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서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연관성이 보일 때면 문득 떠오르곤 했다. 끔찍했던 옥수수밭과 지쳐 있던 피어가.
추억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짧았고, 기억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쓰라렸던 소녀였다. 아무리 그가 이기적인 삶을 살겠노라 마음먹어도 그만한 아이를 회상하며 악독해지기란 어려웠다.
‘뭐, 루시엘이랑 브라운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 같지도 않고.’
사실 피어의 부모라고 감히 내세우던 불륜 부부에 비교하면 멀쩡하지 않기가 더 어렵기는 했다. 일단 배도 갈라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훌륭한가? 하지만 루시엘이 진정 말짱한 정신머리를 가진 일반인이냐고 묻는다면 서준도 대답하기 거북했다.
다행인 점은 브라운이 두 사람 몫은 거뜬히 해치운다는 것이다. 그는 루시엘의 해괴한 언어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전달했다. 비단 루시엘의 일만이 아니라 브라운이란 사람 자체가 괜찮았다. 무던한 성미에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가 있었다.
게다가 서준은 개인적으로도 그에게 호감이 들었다. 브라운의 둥그스름한 턱과 배를 보노라면 톰팃톳에 있을 스테판이 생각났다. 그들의 두루뭉술한 체형은 어렴풋하게 망향을 자극했다.
“그래도 이런 곳에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지만…….”
밴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서준도 트럭을 밴 근처에 세우고 훌쩍 차에서 뛰어내렸다. 트럭의 문을 열자 흙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그는 질색하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낙후한 공장 지구는 사람 한 명 없이 외롭고 적적했다. 일렬로 늘어선 여러 공장 중 녹슨 철의 색을 한 건물도 유별나지 않았다. 서준이 보기에는 여전히 주변과 별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밴에서 먼저 내린 루시엘이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강렬한 확신에 차 빛났다. 서준은 루시엘을 힐끔거렸다. 오늘은 안대를 끼지 않아 더더욱 안광이 번쩍거렸다. 대신 양팔과 다리에 흰 붕대를 감아 놓았다. 아침을 먹을 때부터 저런 차림새였기 때문에 혹 다쳤느냐고 물어보았으나 브라운은 그저 웃으며 땀을 닦았다……. 주변을 홱 둘러보던 루시엘이 브라운에게 말을 걸었다.
“시종이여. 나의 발이 이곳에 가장 먼저 당도하였는가?”
“음, 어디 보자. 데니스하고 맥컬란이 같이 온다고 했는데……. 아, 거의 다 왔다는데?”
그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멀리서 요란한 굉음이 다가왔다. 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에는 작은 점으로 보였던 것이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바람을 가르는 촉감이 피부에 닿을 정도로 매서운 속도였다. 화려하게 도색한 스포츠카가 달려오자 바람이 세차게 스쳐 지나갔다.
“하하하!”
남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린 차가 서준의 트럭 꽁무니를 박을 듯 가까워졌다. 서준의 심장이 덜컹 흔들려 그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둔중한 차체가 반 바퀴를 돌며 땅바닥에 요란스러운 자국을 남겼다. 스포츠카는 아슬아슬하게 트럭과 반 뼘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차가 멈추자마자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내리더니 바닥에 후들후들 주저앉았다. 그는 헛구역질하며 상체를 들썩거렸고 이 모습을 본 운전사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낄낄거렸다. 브라운이 태평하게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데니스, 맥컬란!”
또한 서준은 다시금 깨달았다. 그의 짧은 행운이 끝났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