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54)화 (154/156)

#153

혼자 미소 짓는 요한을 뒤로하고 키라가 먼저 계단에서 내려갔다. 만지면 손바닥에 검게 때가 탈 듯한 난간을 잡을지 말지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층계를 밟았다. 요한 역시 제가 구멍을 낸 부분을 기억하는지라 묵직한 몸뚱이를 요령 있게 껑충거렸다.

“쯧.”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뻥 뚫린 부분이 잘 가려졌는지 힐끔거린 후, 약간 흰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계단은 흉가의 입구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당장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신비로운 흉가 체험은 끝난다.

마지막 계단을 밟은 키라가 1층 내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미간 사이로 조그마한 골이 파였다. 아쉬운 걸까? 키라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2층으로 올라와서 곰 인형을 줍고 난 뒤로는 다섯 번째 방에 내내 갇혀 있었다. 매디슨과 함께 이곳저곳을 쑤석거리고 다닌 요한에 비하면 사실상 제대로 된 구경은 아직 못 해 본 셈이다.

아까는 흉가에 더는 볼일이 없다는 식으로 굴었지만 실은 더 쏘다니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한은 아직 키라에게 잘 보여야 했으므로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관광 가이드 노릇도 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키라는 고요한 눈빛으로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확하게는 벽이 아니라 거대한 초상화였다. 요한도 막 흉가에 들어왔을 적 잠시 본 적 있는 그림이었다.

“키라, 왜 그래요?”

“저 그림, 원래 저랬나?”

키라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요한도 초상화를 향해 턱을 들었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관심을 피하듯 곁눈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음…….”

막 흉가에 들어와서 본 당시에는 초상화와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똑바른 시선이었다. 그가 모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눈 위치가 바뀐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착각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어요? 창작물에서도 종종 나오잖아요. 이런 장소에서는 저런 물건들에 대해 두려움을 품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는 하죠.”

“그래? 그런데 내가 여기 들어왔을 때 저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거든.”

“…….”

후드 점퍼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키라가 팔을 높이 뻗어 사진을 찍었다. 환한 빛이 몇 번이고 점멸했으나 초상화 속 여자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만 있었다. 셔터음 소리가 열 번을 넘기고 나서야 키라가 찍힌 화상을 확인했다. 그러나 썩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지 근심에 잠겨 신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어. 어이, 나 좀 도와줘.”

그리하여 키라는 요한의 어깨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올라탔다. 그녀도 작은 키가 아니었기에 초상화와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제법 수월했다. 키라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후드 점퍼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냈다. 날이 몹시 예리하게 갈린 칼이었다. 곧 콧노래와 천을 찢는 소리가 겹쳤다.

그리고 요한은 마른 다리가 휘청이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주며 키라가 왜 막 마주쳤을 무렵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아차렸다. 과연 이 흉가에는 매디슨을 제외하고도 칼을 든 사람이 존재했다.

“다 됐어.”

발이 가볍게 흔들리며 요한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의 어깨에서 훌쩍 뛰어내린 키라는 초상화에서 도려낸 얼굴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만면에 흡족한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왔다 간 증거물로 이만하면 부족하지는 않겠지. 이왕이면 얼굴이 아니라 액자째로 가져가는 게 좋겠지만, 내 바이크에 싣기에는 너무 크잖아. 아, 혹시 차 가져왔어? 트렁크 넉넉해?”

“키라, 솔직히 말하자면 난 당신 차를 얻어 타고 가야 해요. 얼마 전에 내 차를 폐차했거든요. 여기까지 온 것도 요행이었어요. 그런데 함부로 잘라 내도 괜찮나요?”

요한은 가엾게도 얼굴을 잃어버린 초상화에게 값싼 동정을 날렸다. 하지만 우려하는 말과는 달리 대수롭지 않은 낌새가 여실했다.

“어차피 버려진 집인데 뭐 어때?”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와, 키라는 정말 도덕과 윤리가 부족하군요.”

“그래? 그럼 내가 널 안 태워 줘도 상도덕이 없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이해하겠군?”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딱 좋은 성품이란 뜻이었어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요한이 서둘러 말했다. 키라는 코웃음을 치더니 오린 초상화의 얼굴을 꾸깃꾸깃 접어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이제는 정말 미련 한 점도 남지 않은 듯 유쾌하게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요한은 매우 귀하게 챙긴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이번에야말로 서준과 만나리라는 기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푸르른 눈동자는 희망으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는 막 문을 여는 키라의 뒤를 쪼르르 따라가며 상기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장소는 어디예요?”

그때 문틈으로 햇살이 들어와 요한의 전신에 길게 선을 남겼다. 이렇다 할 조명이 없는 집 내부로 남몰래 비집고 들어온 자연광은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따스했다. 문 뒤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있던 키라의 입술에 장난기가 어렸다.

“말했잖아. 우리는 오컬트 사이트 관련 모임이라고. 모이는 위치도 그런 소문이 있는 곳이지.”

붉은 혀가 입술에 걸린 피어싱을 툭 쳤다.

“성 몽고메리 병원.”

그리고 문이 활짝 열리며 밝은 태양 빛이 쏟아졌다.

***

문을 박차고 들어온 여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그녀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가 이 몸을 이곳으로 이끌었으니 안심하라, 우매한 자여. 내가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서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얼이 빠졌다. 그러잖아도 기력이 죄 사라졌던 그는 반쯤 드러누운 상태였다. 겨우 벽에 기댔던 허리에서 힘이 빠져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고딕 로리타 복장이었다. 복장은 온통 검정 일색으로 무릎 위로 오는 치마는 과도하게 부풀렸고, 허리와 가슴을 가볍게 조이는 벨벳 끈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매끄럽게 윤기가 흐르는 리본이 어깨, 가슴, 허리 할 것 없이 달려 길게 늘어졌고 치마와 가슴팍에는 역십자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박쥐와 장미꽃 자수가 들어간 검은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었다. 머리는 더욱 대단했다. 양 갈래로 묶은 새까만 머리카락은 과하게 말린 모양이었다. 머리에 쓴 보닛 안쪽에도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붙었으며, 소매와 치마 끝단에는 프릴이 잔뜩 잡혀 시원스러운 동작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얼굴 또한 사정은 비슷했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자리 잡았으나 정도가 지나친 화장 탓에 눈은 심각하게 큼직했고 입술은 쥐를 잡아먹고 며칠은 지난 듯 시꺼멨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외모였다. 서준은 기가 죽어 그녀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누구시길래…….”

그런데 막상 질문을 듣자 고딕 로리타 복장을 한 여자가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반쯤 녹아내린 서준을 빤히 주시하더니 등에 멘 가방을 부스럭부스럭 뒤졌다. 가방의 모양은 거꾸로 된 관 모양이었다.

관 뚜껑이 열리고 여자는 원하던 물건을 찾아냈다. 바로 조그마한 날개가 달린 안대였다. 그녀는 주섬주섬 안대를 착용하더니 머리카락을 호쾌하게 뒤로 넘겼다. 턱을 치켜드는 꼴이 무척 당당했다.

“나는 여섯 장의 날개, 위대한 힘의 치천사 루시엘! 전생에는 타락 천사였으나 그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언 능력을 지녔고, 영안이 트인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할이 준비된 자다.”

그리하여 서준은 깨진 유리를 사이에 두고 고딕 드레스를 걸친 자칭 치천사이자 자칭 전생의 타락 천사, 자칭 예언 능력과 영안을 지닌 위대한 루시엘과 마주 보게 되었다. 서준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설정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심지어 실컷 떠들던 와중에도 안대에 달린 날개가 콧잔등을 간지럽혔는지 재채기를 할 듯 말 듯 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용케 기침을 참은 루시엘이 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말하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네놈인가?”

“내가 천지신명 토착신 외래신 가릴 것 없이 도움을 구걸하는 편이기는 한데, 너한테는……. 글쎄…….”

서준이 머뭇거리며 힘겹게 대꾸할 때였다. 복도에서 밭은 숨소리가 났다. 거기에 더해 묵직한 발걸음이 쿵, 쿵 울렸다. 진동의 주인은 금방 나타났다.

“루, 루시엘. 혼자 가지 말라고 했잖아. 헉, 헉.”

그는 땀을 뻘뻘 흘리는 살찐 남자였다. 볼과 턱, 어깨며 배 할 것 없이 온몸이 동글동글한 남자는 체력이 부족한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빽빽한 머리숱하며 갓 껍질을 깐 달걀처럼 뽀얗고 반들반들한 피부 때문에 연령대의 구별이 잘 안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청소년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는 서른을 목전에 둔 성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가 제 목을 열심히 닦았다. 루시엘이 뒷짐을 지며 한쪽 손을 팔락거렸다.

“흥, 나의 시종이여. 네 발은 둔하고 느리고 무겁다. 그보다 저것을 보아라.”

“저거? 뭐, 어, 으힉!”

루시엘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남자가 좁쌀만 한 눈을 댕그랗게 뜨며 해괴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깨지고 박살 난 거울과 칼이 널브러진 방,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의 한가운데서 편안히 몸을 늘어뜨린 서준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남자는 허둥거리며 서준과 루시엘의 사이로 몸을 옮겼다. 나무 바닥이 힘겹게 삐걱거렸다.

“이 난장판은 어떻게 된 겁니까? 괜찮아요? 당장 구급차를 부를까요? 아니면 경찰이 필요합니까?”

남자의 정상적인 발언에 서준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이 대체 얼마 만에 받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대우란 말인가……. 그러나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제가 당한 짓거리가 비상식의 최고봉을 달리는 게 문제였다. 그는 바닷물처럼 짠 물을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괜찮아요. 거울이 깨진 건 사소한 실수였거든요.”

실수라고 하기에는 고의성이 다분했으나 누가 본 것도 아니니 당당했다. 서준은 남자가 내민 손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겨울철의 나뭇가지 같은 몸뚱이가 똑바로 중심을 잡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때 루시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브라운, 비켜. 이 얼굴 인제 보니 내 꿈에서 봤던 눈과 같아. 우매한 자여. 나는 꿈에서 그대를 보았노라.”

“뭐?”

서준조차 일순 그녀가 예언자인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너무나 확고한 태도였다.

“그래, 이 눈……. 칠흑의 별을 품은 눈동자가 틀림없어.”

물론 루시엘이 한 마디를 더 붙이자 그러한 믿음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사춘기 특유의 망상벽이 심각하게 진행된 듯했다. 그는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게 생긴 남자를 향해 말을 꺼냈다.

“저기,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냥 잃어버린 물건 찾으러 온 겁니다. 그쪽 분들은 흉가 탐험하러 오신 건가요?”

브라운이라고 불린 남자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브라운의 거대한 몸에 가려진 루시엘을 힐끔거렸다.

‘캠리가 말한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이, 루시엘이라는 사람인가? 아주 헛소리를 한 건 아니었군. 그나저나 이름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귀에 남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보아도 루시엘을 찾을 수 없었다.

‘미카엘이나 가브리엘처럼 엘 자 돌림자로 끝나서 헷갈렸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넘겼다. 무엇보다 서준은 피곤했고 당장이라도 퍼질러져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루시엘과 브라운이 흉가를 돌아다녔다면 그는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서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혹시 여기 복도에서 곰 인형 못 보셨습니까? 아니, 꼭 복도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크기는 별로 안 크고 털은 그래도 고른 편인데 때가 탔을 수도 있고요.”

그는 있는 힘껏 곰 인형을 설명했다. 흉가에 온 이후로 그리 대우받지 못했을 터이니 때가 타 지저분해졌을 가능성까지 전부 첨부했다. 이상한 말이나 지껄이던 루시엘도 서준의 설명에 집중했다. 그녀는 브라운의 어깨에 뺨을 붙이고는 종알거렸다.

“브라운, 우리가 1층의 큰방에서 봤던 인형들 사이에 있던 거 아닐까?”

“그 침대 안쪽에 있던 인형들? 그건 인형 몸밖에 없었는데……. 아!”

루시엘과 대화하던 브라운이 둥그스름한 턱을 흔들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내 서준에게 내밀었다. 브라운이 보여 준 것은 어느 인터넷 사이트의 화면이었다. 자세히 보니 당장 연결된 건 아니고 따로 저장한 듯했다.

그것을 내려다본 서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화면에는 그의 곰 인형이 흉가의 너저분한 바닥과 벽을 배경으로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브라운이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혹시 이거 아닌가요?”

“맞아요.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침을 제대로 삼키지 못한 목이 기괴하게 비틀린 목소리를 내놓았다. 서준은 목을 주무르며 충혈된 눈으로 조그마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건 확실하게 서준이 잃어버린 곰 인형이었다.

“인형은 언제 잃어버렸어요?”

“어제요. 어제였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하루라는 시간을 통째로 날린 것이 분해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서준은 리이미아와 캠리가 죽은 다음 날 흉가에 방문했다. 기생 연인 파우더의 일을 겪고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훌쩍 하루를 넘겨 버렸다. 당연히 서준도 억울했다. 설마 그들이 헤어지고 곧장 서로를 죽여 버렸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브라운이 탄식을 내쉬었다.

“그럼 맞나 봅니다. 이 게시글도 어제 올라왔거든요. 여기는 우리, 그러니까 루시엘과 제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사이트인데 게시글을 올린 회원도 마침 어제 흉가에 왔었답니다. 아마 그때 곰 인형을 주운 모양이에요.”

“그 외에는 다른 말은 없습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도통 가려지지 않았다. 서준은 간절하게 브라운과 눈을 맞췄다. 브라운이 안타깝다는 듯이 눈썹 끝을 내렸다.

“희귀한 인형이라고 자랑하는 문장 외에는 그다지…….”

“키라? 키라가 올린 글이야?”

또다시 루시엘이 브라운의 휴대 전화 근처에서 기웃거렸다. 브라운이 한숨을 내쉬며 루시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시엘, 네 휴대 전화는 어쩌고?”

“후……. 우매하고, 어리석고, 몽매하도다. 전자 기기는 나의 예지력을 좀먹지. 필연적으로 멀리하며 나의 영력을 갈고닦아야 하는 때가 있는 법. 그 시기가 돌아왔을 뿐이도다.”

“내 휴대 전화는 잘만 쓰더니…….”

허무맹랑한 소리에 브라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서준은 당장 루시엘의 헛소리에 어울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브라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간절하게 입을 열었다.

“이 곰 인형, 정말로 제 것 같아요. 어떻게 돌려받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인형입니다.”

“으음. 이 게시글을 올린 사람하고 우리도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라서요…….”

두툼한 팔이 루시엘을 뒤로 밀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탄력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자 두 걸음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브라운을 옆으로 밀치며 서준의 앞에 섰다. 양손이 허리에 얹힌 게 아주 대범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자를 무시하는 건 위대한 힘을 가진 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인형이야 직접 만나서 돌려받으면 될 일이지. 칠흑의 별을 품은 눈동자여, 지옥까지 따라올 준비는 되었느냐? 우리는 내일 끔찍하고 참담한 곳으로 떠날 것이다.”

“내일 정모가 있다는 말이에요. 지옥은 루시엘 식의 농담이죠. 하긴, 이번에는 키라도 온다고 장담했으니까 차라리 직접 만나서 받는 게 좋겠네요. 그래, 우리와 같이 갑시다. 키라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사정을 이야기하면 잘될 거예요.”

브라운이 더운 땀을 닦으며 덧붙였다. 그는 성능이 좋은 루시엘어 번역기나 다름없었다. 서준도 연락처도 모르는 사람에게 우편 배송을 부탁하느니 그 편이 나았다. 우선 곰 인형을 가져간 사람이 확실히 돌려줄지도 미지수였으며 만일 진짜 고이 넘겨주더라도 배송 사고가 일어나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어느새 등이 축축했다. 그렇게까지 긴장했던가. 서준의 입꼬리가 우는 듯, 웃는 듯 구분하기 어렵게 꿈틀거렸다. 그는 치솟는 열기를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대신 루시엘과 브라운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런데 정모 위치는 어디로 가야 한답니까?”

루시엘의 시커먼 눈매가 씩 휘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처럼 억지로 누른 게 아닌 경쾌하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루시엘 본연의 음성이 그러하다는 양.

“해피 피그 공장과 성 몽고메리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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