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웬 고함일까?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자 멀리서 진동하듯이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거칠고 세찬 어투임은 분명했다.
눈꺼풀을 올린 요한이 꾸물거리며 검지를 폈다. 손가락에 힘을 실은 그는 매디슨의 어깨를 꾹 눌러 보았다. 질긴 고무를 누르는 촉감이었다.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한숨을 흘렸다. 아무리 건드려도 매디슨은 자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매디슨, 계속 그러면 두고 갈 거예요.”
짐짓 엄한 어조로 으름장을 놓아 봤지만 탁한 눈동자가 다시 뜨이고, 촉새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요지부동인 매디슨의 모습에 요한은 하는 수 없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왔을 때 그는 소리의 진원지가 의외로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2층의 다섯 번째 방이었다. 못이 잔뜩 박힌 문이 쿵쾅거리며 요란을 떨었다. 문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뭉개진 발음이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아 몹시 화가 난다는 한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욕설이 추임새처럼 군데군데 끼었다. 보아하니 문이 잘못 닫혔거나, 아니면 홀로 열기에는 너무 뻑뻑한 듯했다.
“음…….”
요한은 다섯 번째 방에 있을 사람의 얼굴을 상상했다. 어쩌면 이 문을 열면 그가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진짜 ‘매디슨 캠리’가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은 곰 인형을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여자라든가…….
전자라면 살인 귀신을 풀어놓는 셈이지만 후자라면 손익을 따졌을 때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요한의 마음속 저울이 문을 여는 방향으로 살살 기울어졌다. 그러던 중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칼이 손아귀에 있었다. 만약 진짜 캠리가 나온다면 상관없었으나 다른 사람이라면 귀찮아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쿵쿵거리는 문 앞에서 요한은 왼손 엄지로 턱을 받치고 고민했다. 놀라운 일이지만 요한에게도 상식이 있어 살인자나 그에 준하는 범죄자로 보이는 건 사양이었다. 칼을 어디에 숨길까 고심하던 요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묘수가 떠올랐다며 자찬하던 그가 가벼운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후 다섯 번째 방 앞으로 돌아온 요한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빈손으로 가뿐해진 그는 못이 잔뜩 박힌 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누구 계세요?”
한참 동안 이어지던 여자의 성난 고함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연달아 문을 때리는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문을 좀 열어 달라는 목소리가 낮고 괄괄했다. 요한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는 크게 외쳤다.
“지금 열어 볼 테니까, 문에서 떨어지세요.”
그는 팔에 힘을 주고는 강하게 밀었다. 빠드득, 하고 문틀 윗부분에서 틀어지는 소리가 났다. 과연 뻑뻑한 이유가 있었다. 삐걱거리며 헛돌던 손잡이가 단단히 걸렸다. 요한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문을 발로 찼다. 썩은 나무 조각과 먼지가 부슬부슬 떨어지며 문이 시원스레 열렸다.
어두컴컴한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곧 검은 그림자가 복도로 불쑥 뛰쳐나왔다. 허겁지겁 달려 나온 여자는 요한의 옆에서 멈추더니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녀는 여러모로 독특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안색은 햇빛을 못 받고 살아온 듯이 희었으며 눈 아랫부분을 검게 칠한 화장이 눈에 띄었다. 양쪽 귀는 빼곡하게 링 피어스를 착용했고, 입술에도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하는 은색 피어스가 하나 있었다. 부숭부숭하게 자른 머리카락은 먹색으로 길이가 어깨에 간신히 닿았다.
옷 역시 새까만 색이었는데 겉에는 펑퍼짐한 후드 점퍼를 걸치고 속에는 민소매 셔츠, 그리고 하반신에 빈틈없이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었다. 홀쭉하게 긴 다리의 말단에는 징이 잔뜩 박힌 부츠를 신어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마른 빗장뼈를 넓게 벌리고는 신선한 공기가 그리웠다는 듯 크게 호흡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버럭 성을 냈다.
“제기랄, 내 평생에 이따위 고물 같은 문은 처음이야! 이봐, 도와줘서 고마워. 까딱하면 며칠은 더 고생해야 할 줄 알았다고.”
투덜거리던 여자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요한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 정도로 뭘요.”
요한은 그녀가 ‘캠리’와는 전혀 다른 외모를 했다는 점에 만족하며 빙긋 웃었다. 그녀는 캠리나 매디슨과 닮지 않았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마른 몸은 서준을 연상시켰다. 특히 눈가가 시커먼 것이…….
아니지, 노란 머리통이 살래살래 흔들렸다. 최근 들어, 그러니까 톰팃톳에서 나가기 전에는 서준의 뺨이 예전보다는 동그스름해졌다. 물론 요한이 보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더 계획적으로 서준의 식단을 짜 주고픈 욕망에 자주 시달렸다. 하루 세끼로 시작해서 가능하다면 평생토록.
음험하고 소박한 망상이 복도에 부풀어 오르는 사이 여자가 제 후드 점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곰 인형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담배를 입에 물던 여자가 오른팔을 뻗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멈춰.”
그녀가 잔뜩 구긴 얼굴로 주변을 흘깃거렸다. 요한은 양손을 순순히 올려 최대한 자신이 해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 애썼다. 다만 그의 체구 탓에 썩 고되었다. 그래도 요한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새파란 눈이 애처롭게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는 이 과도하게 결백한 표정에 진절머리를 내며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 끝에 불이 붙으며 새빨간 점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 답답해 뒈질 뻔했네.”
그녀는 긴 연기를 내뱉으며 혼잣말하더니 부츠 뒷굽으로 문을 꽝 때렸다. 얕게 박힌 못 몇 개가 자르르 떨렸다.
“너, 이 방 들어가 봤어? 머리 아파. 잘 열리지도 않고…….”
“들어가 보지는 않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까 들어갈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졌어요.”
요한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여자가 입술을 힘없이 터뜨리며 싱겁게 한 번 웃었다. 그녀는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난 키라야. 넌?”
“요한이예요.”
마주 손을 잡자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에서 억센 힘이 느껴졌다. 손이 풀리고 난 후 키라가 담배 연기를 뿜었다. 지저분한 천장에 회색 연기가 부딪히는 모습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심드렁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래. 꺼내 준 건 고마운데 갑자기 다가온 이유가 뭐야?”
“아, 그 곰 인형 말이에요.”
“이거?”
키라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머니에서 곰 인형을 꺼냈다. 요한이 손바닥 위에 올라간 곰 인형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역시나 제가 서준에게 선물했던 그들의 기념비적인 기념품이 맞았다.
“주운 거야. 피피페페 스몰라인 전기톱을 빼앗긴 피피……. 중고품도 찾기 어려운데, 누가 버렸는지는 몰라도 나야 고맙지.”
키라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상당히 음험한 미소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곰 인형이 대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요한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거 제 친구 거예요.”
“뭐?”
검게 화장한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키라는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며 따지듯이 말했다.
“지금 내가 점유 이탈물 횡령죄를 지었다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요한은 어쩌다 얻은 곰 인형이 이토록 인기가 많을 줄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도 섣불리 물러날 수는 없었다. 요한은 진심은 반드시 전해지는 법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두 손을 꼭 모아쥐고 간절하게 내려다보았다.
“난 사실 여기에 내 친구가 올 예정이라고 들어서 온 거예요. 그 인형도 친구한테 줬던 거고요. 어떻게 된 일이냐면, 큰고모가 새 차를 산다고 저에게 쓰시던 차를 통째로 넘겨주셨는데 그때 룸미러에 달려 있던 열쇠고리가 그 곰 인형하고 이 십자가예요. 원래는 같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원래 하나였던 게 아니라 큰고모가 같이 달아 둔 거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렇게 생긴 차에 처음으로 친구를 태웠는데 그때 곰 인형에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선물로 준 거죠. 아, 그리고 그 차는 지금은 사정이 생겨서 버렸는데 원래는 노란색의 장수풍뎅이 같은 차였어요. 사고가 났거든요. 거기서 겨우 건진 한 줌의 물건이 이 배낭에 든 전부죠. 맞아요. 그 곰 인형, 피피페페 시리즈의 인형과도 인연이 끊긴다면 내 손에 남는 건 대체 얼마나 될까요? 참, 그러고 보니 혹시 여기서 제 친구 못 보셨어요? 이름은 서준이라고 하는데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머리는 검은색, 눈도 검은색, 혀는 빨간색, 잘생겼고, 귀엽고…….”
“그, 그만. 알았어. 피피는 돌려줄게. 인증 사진만 찍고.”
구구절절 쏟아지는 사연에 키라가 질색했다. 요한은 곰 인형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혓바닥을 놀릴 수 있었으므로 살짝 아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그의 사연이 통했는지 키라의 낯이 진중해졌다. 그녀가 곰 인형을 꺼내 흔들며 중얼거렸다.
“흉가 체험이나 하러 온 줄 알았더니만……. 그런데 난 여기서 누구 마주치고 그러지는 않았어. 피피도 그냥 복도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을 뿐이야. 그리고 잘생겼는데 귀엽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두 묘사가 같이 쓰일 수 있느냐며 키라는 코웃음 쳤다. 그러던 중 문득 매디슨이 했던 사람을 찾을 때는 사진도 함께 동봉하라던 충고가 떠올랐다. 요한은 서둘러 휴대 전화를 꺼내 키라에게 내밀었다.
“이 사진을 봐 주세요. 사족 보행을 하지 않는 쪽이 내 친구예요.”
그가 서준이 기니피그에게 뺨을 맞는 사진을 크게 확대했다. 그러나 키라는 눈을 홉뜨고 모호하게 요한과 휴대 전화의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사진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긴 해?”
“있던걸요.”
적어도 매디슨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혹 그것은 사람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신의 예리한 육감이었던 걸까? 요한의 어깨가 의기소침하게 늘어졌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휴대 전화를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요한은 별 기대 없이 덧붙여 말했다.
“아, 그리고 오른쪽 눈에 안대를 했어요.”
“…안대?”
그런데 키라의 반응이 묘했다.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잠깐, 안대를 썼다고?”
“네? 네.”
“알 것 같아. 누군가 했더니 루시엘이 만나기로 했다는 놈인가 보군.”
키라는 몹시 귀찮아 떨쳐 내는 몸짓을 하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남이 잘 알아듣지 못할 목소리로 불만을 웅얼거렸다.
“쯧, 그럼 벌써 여기에 왔다 간 건가? 내가 먼저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미 늦었잖아.”
혀를 찬 그녀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요한은 키라의 손아귀에서 짜부라지는 곰 인형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검게 칠한 손톱이 곰 인형의 목을 절단할 기세였다.
“루시엘은 또 누구예요?”
“있어. 제가 여섯 장의 날개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정신 빠진 계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