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51)화 (151/156)

#150

찝찌름하게 혀를 적시는 맛은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한순간 커피를 캠리에게 다시 먹이는 방안을 고려해 보았다.

‘어렵겠어.’

고민은 생각으로 그쳤다. 캠리가 칼을 들고 다소 방만하게 굴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독이 녹아내린 커피를 얌전히 마셔 줄 정도란 말은 아니었다. 흉흉하게 날이 갈린 칼을 든 사람, 정확하게는 사람의 기준에서 벗어났지만 그에 준하는 운동 능력을 지닌 시체에게 강제로 음료를 복용시킬 실력이 서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분무기라도 있었다면 안면에 대고 뿌려 보기라도 했을 텐데 당장은 없는 물건이었다.

코웃음을 친 캠리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발로 찼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준은 그녀에게 또 독이 통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캠리는 이미 죽은 인간이었다. 그녀의 심장은 돌처럼 차갑게 굳었으며 호흡이 필요치 않았다. 워낙 활달하게 움직이는 탓에 그도 자칫 잊어버릴 것 같았지만 피부 위로 드문드문 떠오른 반점이나 칙칙하게 변색한 살갗, 뼈의 윤곽이 언뜻 드러난 광대 등이 자연스럽게 캠리가 망자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시체가 다시금 독을 섭취한다 한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란 기대는 다소 안일한 감이 있었다.

머리가 쥐가 난 듯이 뒷골이 찌르르하게 저렸다. 보온병으로 칼을 막아 보겠다는 야심 찬 기대는 캠리의 비웃음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다른 수를 강구해야 했다.

그러나 서준에게는 사유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걸리적거리던 가방을 벽 쪽으로 완전히 밀어 낸 캠리가 칼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그녀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고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살심이 담긴 날에 비친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 있었다.

“큭!”

사납게 다가오는 칼날에 서준은 손에 든 것을 세게 던졌다. 속이 반 이상 차 있는 보온병은 제법 묵직했다. 그러나 서준보다는 캠리의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칼로 보온병을 쳐 냈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보온병은 까앙, 하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거울에 부딪혔다. 노려서 쳐 낸 게 아니라 우연이었는지 그 소리에 캠리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고동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녀의 턱이 옆으로 돌아갔다. 어둡게 그늘진 옆모습은 콧대가 유독 날렵해 까다로운 인상을 남겼다. 검푸른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고 캠리는 놀라 다급한 시선으로 거울을 살폈다. 걱정과 달리 거울은 금 하나 가지 않았다. 보온병만이 초라한 몰골로 데구루루 구르며 먼지를 붙여 댔다.

순간 죽은 자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그리고 서준의 하나뿐인 눈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희게 질린 뺨을 경직시킨 채로.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의 캠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저토록 예민하게 굴던, 심상찮은 기색의 그녀를 조금 전에도 보았지 않았나?

그때.

그때 캠리는 억지로 목구멍을 조여 웃음을 뱉어 냈다. 생각을 끊어 내려는 듯 예리하게 날이 선 목소리를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했다. 본인이 우위에 선 상황이니 고압적으로 굴었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런 게 아니라 주의를 돌리려는 행동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때 난 뭘 하고 있었지? 서준이 자문하자 그의 손가락 마디가 움찔거렸다. 거울이었다. 그는 거울을 두드렸다.

캠리는 거울을 자극한다면 리이미아가 나올 것이라고 위협했다. 냉정하게 따져 보았을 때, 그녀가 정말로 서준을 죽이고 싶다면 리이미아가 가세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물론 음습한 연정으로 살인을 독차지하고 싶다거나, 혹은 리이미아가 꼴도 보기 싫었을 수도 있다. 캠리 혼자만으로도 서준은 변변찮은 대항은커녕 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목덜미가 자꾸만 근질근질하며 쭈뼛 소름이 돋았다. 발이 냉큼 움직이라며 호통을 쳤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었다. 늘 그렇듯 죽거나, 살거나…….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실패한다면 훤히 드러난 등짝을 캠리에게 내어 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틀리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칼을 들고 날뛰는 시체를 상대할 재간은 없었지만 고작 유리 한 장 깨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결심을 내리자 다음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긴 다리가 무릎이 배에 닿을 정도로 구부려졌다.

“멈춰!”

아직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지만 잠시 눈을 돌린 것만으로도 캠리는 자신이 패착이 될 단서를 흘렸다는 걸 깨달았다. 눈치가 빠른 여자답게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한 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그 순간을 노린 서준이 온 힘을 다해 서랍장을 발로 찼다. 탕! 다행히 속이 텅 비었는지 서랍장은 시원스럽게 밀려 나갔다.

“아!”

하필 공격하기 위해 스스로 가까이 온 캠리는 서랍장의 부피를 이겨 내지 못하고 함께 넘어졌다. 옅게 쌓여 있던 먼지가 부옇게 흩날렸다. 서준은 서랍장에 깔려 비틀거리는 캠리를 지나쳐 한달음에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안 돼, 안 돼, 안 돼……. 뒤에서 악랄한 비명이 들렸다. 서준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도망 다니기에 불리하다는 방의 악조건은 이제 이점으로 뒤바뀌었다.

거울 앞에 도달한 서준은 희뿌옇게 자신을 비추는 흉물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후…….”

기합은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대신 나온 것은 한숨에 가까운 조그마한 신음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이를 악문 잇몸이 얼얼했다. 검은 눈에 단호한 결심이 고였다. 주먹이 거울을 내리쳤다.

첫 번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연거푸 주먹질하자 어느새 상처가 터졌는지 장갑 안쪽에서 뜨끈한 액체가 흘렀다. 짙은 파란색 장갑을 진하게 물들이며 손목 아래쪽으로 선명한 붉은 피가 흘렀다. 혈관처럼 길게 흐른 피가 팔꿈치에 닿았을 때였다. 서랍장을 치운 캠리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만둬요!”

귀신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실선에 가까웠다. 금은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미세했다.

“으아아악!”

서준은 멈추지 않고 거울을 때렸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악을 질러 대며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렀다. 뒤에서 단말마가 울렸다.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었다. 그래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제 앞에 있는 거울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진 유리의 파편 사이로 새빨간 핏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의 몸이 부서지기라도 한 듯 생생한 냄새를 풍기며 한 줄기, 두 줄기 피가 흘렀다. 핏물은 곧 온 거울을 적시도록 울컥울컥 쏟아졌다. 일그러진 파편을 덮으며 나오는 피에 서준이 뒤로 물러섰다. 뒤에는 캠리가 있으나 두렵지 않았다.

거울에 비치는 그녀의 몸 또한 산산이 조각나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거울이 깨져 그리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캠리의 육신이 기이하게 쪼개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아악!”

어디선가 세찬 바람 소리가 났다. 거울의 깨진 유리가 덜덜 진동할 만큼 거센 돌풍이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니 그것은 겹겹이 쌓인 사람의 비명이었다. 그곳에는 서준에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 있었다. 바로 캠리와 리이미아였다. 그들의 귀곡성이 앞과 뒤를 구분하지 않고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아파, 아파, 아파! 그만해!”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귀를 막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면 문을 부수고 방에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아아, 그만해요! 그만 멈춰요! 나를 두 번 죽이려는 생각인가요? 제발, 나를 봐 줘요.”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서준은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고는 거울을 향해 두드렸다. 귀신들의 터무니없는 저주와 비방에도 삐걱거리는 목을 돌리지 않고 사심을 듬뿍 담아 주먹질했다. 고함을 아무렇게나 내지르며 거울을 산산조각 낼 기세로 흉포하게 부딪혔다. 흉가에 온 이후로 당해야 했던 온갖 고생을 토로하듯 거칠고 격렬했다. 그의 주먹은 거울에서 흘러나온 피인지 제가 흘린 피인지 구별도 되지 않을 지경으로 붉게 물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리는 절규가 뚝 멈췄다. 그뿐만이 아니라 거울에서 흐르던 피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기괴한 일이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박살이 나 온전한 상을 비추지 못하는 거울과 쓰러진 보온병,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파리하게 질린 낯짝이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캠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그녀가 찾던 리이미아처럼.

“아…….”

입에서 단내가 났다. 팔은 끊어질 듯했고,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서준은 더 버틸 이유를 찾지 못해 그 자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렇다고 깨진 거울에 등을 댈 수도 없어 반쯤 기어가 차가운 벽에 비스듬히 누웠다. 일어날 힘은 물론이거니와 기력도 모자랐다.

서준이 혀 아래 고인 침을 삼키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끝, 난 건, 아, 씨발. 주둥이, 주둥이.”

하마터면 캠리를 부활시킬 뻔했다. 그는 그나마 멀끔한 왼손으로 입술을 찰싹 때렸다. 진이 다 빠져 모기를 잡는 것보다 못한 손속이었다. 초췌한 눈길이 말없이 방을 훑었다. 쓰러진 서랍장이며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 두 개, 깨진 거울 조각과 밟혀 으깨진 알약의 흰 가루…….

“난장판이네.”

그래도 방에는 그 혼자였다. 영혼과 육체를 옭아매려는 유령을 발견하는 것보다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를 전부 세는 게 더 빠를 듯했다. 서준의 입가에 천천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살아남았다는 실감이 뒤늦게 몰려왔다. 팔과 다리는 대충 붙인 지점토 같았고, 머릿속은 텅 비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피로한 몸뚱이 탓인지, 이대로 한숨 자고 싶다는 안일한 마음마저 몽글거리며 솟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돼지와 같은 짐승을 잇달아 몰아 쫓듯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달음박질은 점차 가까워졌다. 잠기운은 삽시간에 달아났다. 눈이 번쩍 뜨이고 등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긴장으로 움찔 떨렸다. 하지만 서준이 무언가 방비를 하기도 전에 꽁꽁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옷자락이 크게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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