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50)화 (150/156)

#149

같이 흉가의 귀신이 되어 썩어 가자니 혀가 마비될 정도로 저릿한 고백이었다. 캠리의 고백을 못 들은 척하고픈 마음이 가슴속에서부터 물씬 피어났다. 서준의 시선이 힐끔 잘 갈린 칼을 향했다. 고기를 가르는 데 아주 유용한 물건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덕분에 그는 예의 바른 청년이 될 수 있었다. 서준은 정중한 말투로 거절을 입에 담았다.

“캠리,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우리가 서로를 안 지 너무 짧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저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드릴 수도 있어요. 보비 톰슨이라고, 키는 작지만, 장래성이 유망한 녀석이죠. 지금쯤 백만장자가 됐을지도 몰라요. 꿈이 컸거든요.”

하지만 온순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캠리는 입을 크게 벌려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서준. 인제 와서 돈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할 날은 앞으로 많은 걸…요!”

그녀는 말하는 것과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살기를 담은 칼이 빠르게 다가왔다. 단번에 죽일 생각은 아닌지, 목이나 머리가 아니라 배를 노린 움직임이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캠리는 결코 노련한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표적이 넉넉하다면 사냥꾼의 실력이 모자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충분하리라.

물론 서준도 가만히 서 있다가 이곳이 배꼽이고, 더 안쪽을 찌르면 고불고불한 창자가 있습니다, 하며 가만히 내줄 마음은 없었다. 그는 구르듯이 옆으로 피하며 고함을 질렀다.

“아악!”

내심 꿍꿍이속이 담긴 비명이었다. 아래층에서 들리던 인기척의 주인을 향한 외침. 이제는 진짜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운 검은 옷을 입은 여자라도 좋고, 그저 근처를 배회하던 노숙자라도 환영이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소리를 듣고 달려오길 원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염원이 깃든 비명치고는 한심했지만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칼은 거울에 부딪히기 전에 우뚝 멈췄다. 유리 앞에 가만히 멈춘 칼끝이 빙글빙글 돌았다. 살빛에 핏기가 없고 푸른 기가 도는 얼굴이 벙긋거렸다. 심장이 떨어질 만큼 대단한 미소였다. 캠리는 슬쩍 눈을 접어 웃으며 검푸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뭘 기대하는지 알겠어요. 나도 꼭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독을 마시고 피를 토할 때도, 리이미아가 미워서 견딜 수 없을 때도……. 하지만 소용없어요.”

아무래도 서준의 속내가 너무 빤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상냥하게 설명하면서 칼을 쥔 손의 엄지에 힘을 주었다. 핏기 없는 손가락이 칼을 단단히 붙들고 다시금 공격해 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이곳에 있는 건 나와 당신뿐이라고!”

“큭!”

이미 죽은 사람이라 폐활량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라도 했는지 캠리는 나불나불 잘도 떠들었다. 칼은 사선으로, 또는 직선으로, 어떤 때는 아래에서 위로 그어졌다. 장난치는 것처럼 가벼운 손놀림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래도 원한다면 마음껏 비명을 질러요! 당신의 성에 찰 때까지, 아하하하!”

반면 서준은 한 번이라도 칼에 베일까 봐 격렬하게 몸을 피했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에 부아도 치밀지 않았다. 캠리가 작정하고 칼을 찔러 댔다면 서준은 진작 그녀의 친근한 유령 동료로 편입당했을 것이다.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를 들으며 그는 턱을 뒤로 젖혔다.

‘뭐지? 아래층에 사실은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자칫 목젖이 잘릴 뻔한 아찔한 순간을 넘기고 서준의 몸뚱이가 문에 턱 부닥쳤다. 그는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캠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문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이 열리지 않고 손잡이는 계속 헛돌기만 했다. 창백한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기대가 어긋나 당황하는 그를 캠리가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거봐요. 문은 열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그러니까 포기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칼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어깨를 뒤로 당겨 칼을 크게 휘두르는 작태에 서준이 다리를 뻗었다. 그는 캠리의 발목을 세게 찼다.

“으아악!”

괴성이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누군가 듣길 바라며 지른 고함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악을 내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뻑, 사람의 살이 아닌 딱딱한 나무토막을 차는 느낌이 발바닥으로 찌르르 전해졌다. 새삼스럽지만 진저리가 나는 감각이었다. 다만 서준에게는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그는 명중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결심했다.

“아!”

캠리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하지만 그녀도 만만찮은 독기의 소유자였다. 캠리는 앞으로 기울어 쓰러지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발목을 당한 원한을 발목으로 풀려는 속셈인지, 바닥을 기는 뱀처럼 몸을 낮춘 상태에서 팔을 날렵하게 뻗었다.

“악!”

서준은 이제 의미도 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줄넘기를 뛰듯 펄쩍거리며 다리를 사수했다. 그는 캠리가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곳은 칼을 든 사람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에는 너무나 좁은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어찌 된 영문인지 문도 열리지 않는 마당이었다.

서준은 도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무기라도 손에 쥐고픈 욕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원체 가구랄 게 없는 방인지라 그도 쉽지 않았다. 텅 빈 방에는 벽에 달라붙은 수상쩍은 거울과 캠리와 리이미아의 가방이 올라간 묵직한 서랍장이 전부였다.

그나마 들 수 있는 건 가방뿐이 없었다. 문제는 캠리와 리이미아의 가방은 딱딱한 하드 케이스가 아니었고 무르고 부드러운 재질이라는 점이다. 몇 번 휘둘러 공격을 막는 게 가능해도 무기 대용으로는 써먹지 못할 물건이었다. 그래도 빈손보다는 나아 서준이 가방을 하나 덥석 집어 들었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캠리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걸로 어떡하려고요? 아, 마음에 들면 가져요. 리이미아는 이미 죽었고, 나도 죽었는데 가방 하나둘쯤이야……. 그리고 당신도 죽어 버리면 주인이 전부 죽어 버린 가방이 생기네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에 등을 기댔다. 완전히 도주로를 차단한 캠리가 한결 여유로운 기색으로 칼을 까딱거렸다. 서준이 가방을 꽉 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캠리는 키가 큰 축에 속했다. 체형도 늘씬하니 팔과 다리도 길었다. 즉 칼을 휘두를 때 범위가 크다는 뜻이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이었다.

사실 기분만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방의 구석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형편이었다. 하필 이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서준은 벽을 곁눈질하며 혀를 찼다.

‘하기야 창문이 있어도 못 나갔을 수도 있겠군. 문도 이상하게 안 열렸고.’

이 흉가에는 문이 뻑뻑해 잘 열리지 않는 방이 몇 있었다. 그가 캠리와 함께 몸을 숨겼던 2층의 다섯 번째 방이 가장 대표적인데, 그때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뇌를 찔러 댔다.

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귀신과 기이한 공간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환경은 전혀 달랐지만 옥수수밭이 그러했고, 사거리가 그러했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지 않고는 벗어나지 못한 장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방에서도 무언가를 해야만 나갈 수 있는 요건이 있는 걸까?

“…….”

도대체 어느 세월에 그걸 찾으며, 또 그동안 캠리가 가만히 있을 리도 만무했다. 서준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고민해 나갔다. 아예 무작정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면 어떨까? 터무니없는 가정에 곧바로 혀를 깨물었다. 묵직하게 쑤시는 고통이 현실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아마 손은 난도질당하고, 출혈과 통증으로 더뎌진 몸뚱이를 캠리가 기쁘게 다져 놓을 터였다.

서준은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뿐인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방에 있는 건 여전히 서랍장 위의 가방 두 개와 거울, 흩어진 알약과 캠리가 내려놓은 보온병으로 끝이었다. 눈이 깜빡거렸다. 검은색 눈동자에 스테인리스 특유의 둔탁한 빛이 들어왔다.

속에 든 건 사람에게 해로운 독일지언정 겉의 재질은 스테인리스가 아니던가? 캠리가 든 칼도 그녀가 용도를 달리 써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부엌칼이었다. 즉슨 스테인리스강이라는 소리다. 자세히 따지고 들면 다르겠지만 그나마 칼하고 재료가 비슷했다.

희망 비슷한 것이 몸집을 부풀렸다. 서준은 두 번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캠리에게 집어 던졌다.

“손버릇이 나쁘네요, 서준!”

당연히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가방을 쉽게 붙잡았다. 그러나 큼직한 가방은 확실하게 캠리의 시야를 방해해 주었다. 그만하면 서준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캠리가 팔뚝으로 가방을 쳐 낼 때를 노려 바닥에 얌전히 세워진 보온병을 낚아챘다. 캠리가 그토록 한 입만 마셔 보라고 노래를 부를 때는 꺼림칙하던 물건이 지금은 그토록 어여뻤다. 그리고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성가시다는 듯 머리를 흔든 캠리는 보온병을 양손으로 잡은 서준을 목격했다.

“…….”

“…….”

그들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한 사람과 시체 한 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곧 뻣뻣한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풋.”

캠리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맹세하건대 이 웃음은 정말로 비웃으려는 게 아니라 얼결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서준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러한 판국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이라도 뚜껑을 열어서 마시는 게 어때요? 칼에 찔리는 것보다는 시신이라도 멀쩡한 게 좋잖아요. 후후, 하하하…….”

기어이 폭소를 참지 못하고 캠리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녀는 발치에 거슬리는 가방을 함부로 마구 짓찧었다. 아무래도 서준이 던진 가방의 주인은 리이미아였던 모양이다.

“나, 리이미이가 몸에 구멍이 나서 돌아다니는 꼴을 거울 속에서 몰래 지켜봤어요. 어찌나 흉하고, 볼품없던지! 그런 꼴로는 어디 가서 나인 양 행세하지도 못하겠죠?”

눈을 접고 배꼽을 부여잡은 캠리는 거짓 없이 말 그대로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서준은 웃지 못했다. 캠리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에 자극받았는지 그녀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지고 뺨은 핼쑥해졌다. 흘러내린 피는 입술과 턱을 적시고 가슴께로 떨어졌다. 몸이 들썩거릴 때마다 옷에 번져 나가는 피의 양도 많아졌다.

서준은 이 기괴한 모습을 꼼짝없이 목도해야 했다. 그는 괜히 자신도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마른 입술에 스며든 피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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