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서준은 마음속으로 캠리에게 칼을 챙기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던 자신의 뺨 서너 대를 후려갈겼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손바닥이 다 얼얼해졌다. 하필이면 흉기의 원 주인에게 칼을 잡으라고 종용하다니! 심지어 캠리는 저 칼을 사용해 리이미아를 야무지게도 죽여 놓았다.
‘애저녁에 홀린 게 분명해. 역시 이 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나?’
그렇지 않고서야 아래층에 칼을 든 괴인이 돌아다니는 판국에 유일한 무기를 홀라당 넘길 리가 없었다. 서준은 자신의 생존 욕구와 이기적인 심성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이해하는 인간이었다.
“내가 대가리에 구멍이 나긴 했나 봅니다. 눈 하나 해 먹었으면 작작 해야 하는데…….”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자 캠리가 꾸며 낸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내가 산 가재도구인 걸요. 대형 마트에서 리코타 치즈하고 같이 샀죠.”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노래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망가진 이유를 이제는 알기에 가벼운 콧노래조차 오싹해져 서준은 침을 삼켰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캠리가 칼을 든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가격은 얼마 안 했지만 좋은 물건이에요. 포장 뜯고 종이에 싸면서도 손이 베일까 얼마나 조심했다고요.”
그녀의 살갗 위로 검푸른 멍 자국이 드러났다. 한번 죽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표표히 떠올랐다. 유독 낮게 느껴지던 체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늘했고, 안색은 푸르러 도저히 산 사람의 낯이라 부르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두운 방에서도 캠리가 어디에 있는지 번연히 느껴지는 지독한 시취라니…….
이때껏 캠리와 태연하게 돌아다닌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창문조차 없고 문이 굳게 닫혀서인지 코가 삐뚤어지는 악취가 선명했다. 비강을 자극하는 냄새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칼을 드신 분께서 불쾌하게 여기기 충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캠리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치며 관대한 자세를 보였다.
“…….”
이는 더욱 서준의 경계심을 부추겼다. 그녀의 비인간적인 면모, 예를 들어 뚜렷한 체취에 비하면 입가에 조용히 걸린 미소나 부드럽게 풀린 자세 등은 보통 사람이라면 사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인자가 지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품행이었다. 더군다나 재차 살인을 감행하려는 때에 광인답지 않고 평안한 태도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괴했다.
만약 캠리가 살인을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살인마라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록 살인자이기야 했으나 명백한 분노와 원한을 지니고 리이미아를 죽이지 않았나.
‘뭐, 살아 있었다면 리이미아를 시작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할 재능이 숨겨져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루어지지 못할 내일이었으며 만약에 불과한 가정이었다. 캠리는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냉큼 죽어 버렸다.
그래서 이상했다. 그가 아는 캠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제법 냉정하게 저지르던 첫 살인도 끝으로 갈수록 격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걸 저토록 평화로운 낯짝으로 지껄이는 걸까? 심지어 본인의 주장에 따르자면 호감을 지녔다더니, 도통 이해 못 할 행보였다.
“잠깐, 잠깐만요. 나한테 호감이 있다면서 왜 죽이려는 겁니까? 상식적으로 누가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려 들어요? 아니면, 혹시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죽이고 싶은 성벽이라도 있으세요?”
“성벽!”
물론 잠깐의 호기심을 채우려 캠리에게 주절거린 건 아니었다. 하나뿐인 눈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안타깝게도 그보다는 캠리가 문에 가까웠다. 입술을 핥는 혓바닥에서 쇠의 맛이 났다. 긴장한 허벅지가 미약하게 떨렸고 발가락 사이로 땀이 고였다.
서준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다리를 억지로 눌렀다. 무작정 달려 봤자 칼에 찍힐 미래가 뻔했다. 가장 적절한 순간을 노려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칼을 든 캠리가 한눈을 팔 필요가 있었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휘두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알약을 주워 캠리에게 하나하나 던질 셈이 아니라면 세 치 혓바닥을 아낌없이 써야 했다.
“흠…….”
캠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서준을 재롱부리는 강아지처럼 바라보았다. 얕잡아 보는 눈빛이 어찌나 감사하던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적의 방심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받아들였군요? 세상에, 성벽이라니…….”
망가진 목이 거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을 그대로 둔 채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내 명예를 위해서도 이건 꼭 바로잡고 가야겠네요. 서준, 내가 리이미아를 죽인 것과 당신을 죽이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예요. 그래요. 난 여기서 리이미아를 죽였죠.”
캠리의 눈이 나무 바닥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애를 싫어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내가 정말 그러고 싶은 건지, 아니면 버릇처럼 생각할 뿐인지……. 혹은 잠깐의 충동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이 방에서 리이미아와 함께 거울을 봤죠.”
캠리가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개운한 얼굴에는 미련 한 점 없었다.
“결과는 당신한테도 말했죠? 내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확실해졌고, 난 리이미아를 죽였어요. 참 행복했어요. 서준,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건 의외로 괴로운 일이에요. 매 순간 내 감정을 의심하는 건 도저히 맨정신으로 견딜 만한 일이 아니죠.”
“이 지저분한 거울이 당신의 메시아 노릇이라도 했단 건가요?”
서준이 손등으로 툭 거울을 건드렸다. 날 선 질문에 온화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슷해요. 내가 품은 마음이 결코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였죠. 그때 느낀 개운한 기분을 도저히 잊지 못할 거예요. 뭐, 그 후에 나도 곧바로 리이미아에게 독살당했지만요.”
아무렇지도 않은 캠리와는 달리 흰 얼굴에는 질색하는 기색이 번졌다. 거울을 통해 본 과거 사건, 즉 고작해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을 무참한 광경이 서준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재생됐다. 금방이라도 토악질할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캠리가 칼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녀는 열띤 말씨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내 눈은 틀리지 않았나 봐요? 역시 당신은 특별해요, 서준.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독살당한 것도 당신이 먼저 알아차렸죠. 언제부터인가 모든 걸 꿰뚫어 본 것처럼……. 하기야, 악마의 홈쇼핑을 이용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일에는 익숙한가 보죠?”
서준은 단 한 번도 맨눈으로 직접 시청한 적 없는 악마의 홈쇼핑의 열혈 사용자로 찍혀 버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격한 감정이 치밀어 자기변호를 할 뻔했으나, 다행히 목구멍을 제때 틀어막았다. 자신이 지닌 진짜 능력을 들키느니 오해를 받는 편이 나았다. 그러잖아도 불리한 판국에 제 패를 다 까놓을 필요는 없었다. 대신 그는 허세를 부렸다.
“글쎄요? 어쩌면 나한테는 당신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려 줄 친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이 거울처럼 모든 걸 지켜본 친구가요.”
서준은 호기롭게 외치며 거울을 탕탕 두드렸다. 캠리의 안색이 시퍼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신체 활동을 정지한 시신의 낯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기묘하도록 별안간 이루어진 변화는 나타났을 적과 똑같이 빠르게 사라졌다. 대신 그녀는 목청을 높여 깔깔 웃었다.
“아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
캠리의 웃음은 이때까지 보인 것과는 정반대였다. 생각을 끊어 버리듯 매섭고도 낭랑했다. 서준을 죽이겠다는 살의를 드러냈을 때조차 점잖게 굴던 여자가 폐를 쥐어짜 내듯 웃었다. 확연히 다른 태도에 서준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캠리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리이미아를 깨우고 싶다면 거울을 치는 것도 말리지는 않을게요. 더 세게 치지 그래요? 그래야 잠꾸러기가 일어나죠!”
서준의 양손과 등이 모두 거울에서 떨어진 건 당연한 이치였다. 캠리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여기에 인성 파탄자이자 살인자 리이미아까지 가세한다면 그는 죽었다고 복창이나 해야 할 팔자였다. 허둥거리며 거울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자 캠리가 경고하듯 말했다.
“지금은 나와 당신뿐이지만 리이미아를 부르고 싶다면 얼마든지 거울을 두드려요. 하지만, 그래요. 지금 여기 있는 건 나와 당신밖에 없죠. 그리고 그게 내가 당신을 죽이려는 이유예요.”
어째서인지 살인 예고를 하는 얼굴에는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발치를 남몰래 살피던 서준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들어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이유였다. 차라리 흉가에 발을 디딘 게 잘못이라고 따졌다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빛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캠리의 행동 양식이 소위 말하는 지박령과 꼭 닮아 있지 않은가? 죽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모습이 똑같았다. 눈앞에 낀 안개가 개는 기분이었다. 귀를 어지럽히는 미사여구를 다 떼어 내자 답은 놀랍도록 간단했다.
서준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캠리와 거리를 재며 짐짓 당황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 나를 죽여서 당신 대신 이곳에 가두겠다, 그런 겁니까?”
하지만 그녀는 낮게 탄식하더니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리이미아라면 그랬겠죠. 정말이지, 서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군요? 섭섭하네요.”
손에 들린 칼의 날이 번뜩거렸다. 동시에 서준의 등골에도 소름이 돋았다. 캠리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건드렸다.
“요지는, 난 리이미아가 너무 싫어서 손을 더럽혔다고요. 그런데 나까지 죽어 버려서 여길 벗어나지도 못하는 꼴이 된 거죠.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세상에 또 어딨겠어요? 붙어 다니는 게 지긋지긋해서 죽였는데 영원히 끝도 없이 그 애와……. 정말로 끔찍하고, 또 끔찍한 날만이 나를 기다리는 걸 알았을 때는 죽었는데도 또 죽고 싶었어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억지로 만들어 낸 미소가 서준을 향했다. 시체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올라갔다. 심히 두려운 광경에 턱이 움찔 떨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건 리이미아도 마찬가지였나 봐요. 그 애는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준비하면 이곳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난 거울 속에서 모두 지켜봤죠.”
하지만, 하며 캠리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죽은 자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악스러웠다.
“난 다르게 생각해요.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에 넣고 싶은 사람과 함께한다면 이곳도 나쁠 건 없잖아요?”
“아……. 고백받은 건가요? 제가 혹시 지금?”
놀란 탓에 말의 순서가 엉망진창이었다. 시체는 수줍은 기색 하나 없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