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그래도 영 이해가 가지 않아요. 매디슨, 대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요한은 손에 든 구두를 여러 번 고쳐 쥐며 입을 열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무기로 잡은 건 생전 처음이라 여러모로 난항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휴대 전화의 동영상에 혹평했나 잠시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극찬을 하지 않았던가? 조금 억울해진 요한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난 영화에 토마토를 던진 적도 없는데!”
“토마토? 무슨 헛소리야. 아하, 네 가슴팍이 곧 터진 토마토가 될 거란 사실을 드디어 깨달았나 보구나?”
매디슨의 눈이 어둡게 번뜩거리며 악의를 줄줄 흘렸다. 그는 손가락의 마디가 희게 비치도록 칼을 세게 잡았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내젓는 데 약간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알겠어. 너, 머릿속이 아주 꽃밭이네. 아니면 지능이 부족하거나. 알 만해. 둘 다겠지. 너 같은 녀석은 인터넷에 많거든. 대가리가 텅텅 비어서는 반반한 낯짝 하나만 믿고, 멍청하게 키운 근육 덩어리들. 요전에 만난 자식도 그랬어. 주제에 반반한 계집애를 끼고 다녔지.”
매디슨이 자유로운 손으로 겉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화려하게 장식한 손톱이 단추와 부딪히며 톡, 톡 소리를 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스팽글이 무수하게 붙은 겉옷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가 어깨를 반듯하게 펴자 몸을 씻고 나오며 곧장 가렸던 하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참하게 난도질당한 흔적 또한 온전한 모습 그대로 노출되었다. 요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에 헤집어진 피부와 그 밑의 벌건 근육, 뭉개진 살점 따위가 피에 젖고 찢어진 옷 사이로 엿보였다. 매디슨은 요한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듯 입술을 벌렸다.
“이 모든 게 장난처럼 느껴져?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오, 혹시라도 요즘은 특수 분장이 정말 뛰어나네요! 꽥, 꽥! 이따위 말을 하려거든 차라리 주둥이를 다물어. 모든 건 현실이야. 논픽션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는 은밀한 희열이 묻어 있었다.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맛을 보는 데 사용하는 길고 둥근 살덩이는 피부 안쪽의 색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그러자 요한이 눈과 입을 귀엽게 움직이며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매디슨의 요청대로 굽이 없는 구두를 든 손으로 입가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후회할 짓이었다. 요한이 코를 살짝 씰룩거리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매디슨이 분노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가 조롱하던 때의 달뜬 목소리를 집어치우고 험악하게 소리쳤다.
“개자식! 내 발은 냄새 같은 거 안 나!”
“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이해해요…….”
요한은 안쓰럽다는 듯 대꾸했지만, 전혀 이해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매디슨의 창백한 얼굴이 더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그가 이를 빠드득 갈더니 눈을 매섭게 치떴다.
“머리가 모자란 듯하니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줄게. 그 밀랍으로 막은 듯한 귓구멍을 열고 잘 들어. 가엾은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살해당했어. 응? 들어 봐. 이러니 내가 억울하지 않겠어? 흉가의 거울 괴담은 들어 봤겠지? 그건 사실이었어. 거울 앞에서 살해당한 나는 육신과 영혼을 모두 거울에 붙들렸지. 대신할 걸 넘겨주지 않는 이상 이 거울은 날 해방해 주지 않을 거야. 이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게 됐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분노로 일그러졌던 입술이 맞다물리고 끝이 날카롭게 올라갔던 눈초리는 촉촉해졌다. 요한은 역시 매디슨은 훌륭한 배우감이라며 내심 손뼉을 쳤다. 그는 어룽어룽한 시선으로 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끝냈다.
“그러니까, 난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의 목숨을 끝낼 거야. 네 가치 없는 몸뚱이를 나를 위해서 바치란 말이야.”
물론 내용은 이기적이다 못해 괴악할 지경이었다. 요한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거울을 힐끔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아까 본 동영상이 편집을 가하지 않은 순수한 촬영물이라고 쳐요. 이 거울이 마법의 거울이나……. 뭐, 그런 거라고 치자고요.”
요한의 긴 발이 거울을 툭 쳤다. 사람을 잡아먹고 영혼까지 구속한다는 거울은 자비롭게도 그의 발을 썩둑 잘라 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진짜 매디슨 캠리라는 여자는 당신이 준 커피를 마시고 죽어 버린 것도 사실 아닌가요? 매디슨, 그런 당신을 가엾다고 하기에는 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매디슨은 지금까지 보여 준 성격처럼 패악질을 부리는 대신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활짝 폈다. 덕분의 가슴에 난 상처가 더 길게 벌어졌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과정이었어. 내가 진정한 매디슨 캠리가 되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절차에 불과했지. 애벌레가 번데기로, 번데기가 성충으로 우화하듯 꼭 지나야 하는 길. 제발 부탁인데, 아리따운 나비에게도 애벌레인 시절이 있다는 것조차 내가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요한은 매디슨의 자칭 나비우화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대거리하기조차 귀찮아 대강 한 귀로 흘려 넘겼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제가 뱉는 말만 중요히 여기던 매디슨이 기민하게 청자의 불성실한 태도를 알아차렸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눈치였다.
매디슨이 칼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요한은 그의 손과 시선을 확인하며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죽인다고 부르짖던 매디슨이었지만 이번의 일격은 단순한 공갈에 불과했는지 그는 다음 공격을 하는 대신 야유를 보내왔다.
“멍청한 자식, 이래서 인기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놈들은 이해를 못 해!”
다만 이번에는 요한도 할 말이 있었다. 그는 구두를 교차로 쥐어 가슴 부근을 보호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인기는 좋아하는 애한테만 있으면 충분해요. 불특정 다수에게 얻는 애정을 뭐에 써요?”
그런데 말을 하던 도중 요한의 입매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선은 어느새 몽롱하게 풀렸다.
“아, 그래도 질투는 해 주면 좋겠는데.”
“이래서 하트도 못 받는 자식들하고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이렇게 변변치 못한 소리나 들어야 한다니, 내 귀에 미안해서 더는 못 들어 주겠어!”
부정형을 엄청나게 사용한 매디슨이 진절머리를 내며 칼을 앞으로 내찔렀다. 요한은 매디슨이 벗어 던진 구두로 칼을 수월하게 막고는 그대로 옆으로 밀쳤다. 칼에 모든 무게 중심이 쏠려 있던 매디슨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흔들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요한이 한 발짝 더 다가갔으나 매디슨도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가 무릎이 꺾이면서도 칼을 크게 휘두르자 허공에 반원이 그려졌다. 치마가 튿어지는 소리가 길게 났다.
“흡!”
요한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물러섰다. 그와 매디슨의 위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뀌었다. 파란 눈이 서늘하게 매디슨을 훑었다. 저 칼이 문제였다. 애당초 칼에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면 진작 결판이 났을 터였다. 그만큼 요한과 매디슨의 체구와 완력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매디슨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장 요한의 관심사는 매디슨의 야멸찬 눈빛이 아니었다.
“하트라……. 그러고 보니 매디슨, 지금 당신의 심장이 안 뛰고 있다는 건가요? 신기하네요.”
다소 엉뚱한 질문에 손가락을 우그려 칼을 단단히 잡던 매디슨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입술을 비틀며 탄식을 터뜨렸다.
“내가 죽던 때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런 전략이야? 대단해! 정말 사특하고 심보가 고약하기 짝이 없구나!”
그런데 울분을 토하던 입이 점차 길게 올라갔다. 매디슨이 눈을 반짝거리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사자라고 주장하는 그의 얼굴에 역설적으로 생기가 감돌았다.
“아하하, 내 심장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그래, 알려 줄게. 그 정도의 적선이야 못 해 줄 것도 없지. 곧 네 처지가 될 테니까.”
매디슨의 손가락이 가슴 중앙의 상처를 매만졌다. 손가락은 곧 길게 난 상처로 들어갔다. 그는 제 몸에 난 구멍을 마구잡이로 쑤시기 시작했다. 역겨운 광경이었다. 매디슨은 아직도 이어져 있는 혈관을 끊고, 살을 파헤치고, 덜렁거리는 근육을 뜯어냈다. 그렇게 고생해서 보여 준 심장은 초라했다. 이미 멈춰 버린 장기는 거무죽죽한 색깔이었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봐. 이건 너의 미래이기도 하거든. 아하하! 하하하하!”
미치광이처럼 웃던 매디슨이 심장이 더욱 잘 보이도록 상처를 헤집었다. 그리고 요한은 매디슨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는 넓어진 구멍을 통해 한결 수월하게 매디슨의 육체 내부를 구경했다. 꼼꼼하게 살피던 시선이 곧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요한이 매디슨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하게 주장했다.
“매디슨, 내 생각에 당신은 귀신이 아니라 강화 인간 같은 게 아닐까 해요.”
다만 그것은 터무니없이 황당무계한 의견이었다. 매디슨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전부 말이 되잖아요. 당신은 사실 모르는 사이 정부나 불법 연구소의 시술을 받은 거죠. 그리고 이런 가짜 영상을 보고 착각하게 된 게 틀림없어요.”
매디슨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생각한 추론이 진실이라는 양 눈을 반짝거리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매디슨은 제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기도 싫은 판국에 부정까지 당하자 분통이 터지다 못해 어처구니가 다 없었다.
“내 몸 상태를 내가 잘 알지, 네가 알아?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는데 왜 네가 아니라고 이 난리야?”
“매디슨이 유령학의 권위자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람이 자기 몸 상태를 그렇게 잘 안다면 병원은 응급실만 필요하겠죠. 사고가 난 환자만 받으면 되고요. 하지만 세상에 병을 키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다 알았다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겠어요?”
이 떳떳한 태도에 매디슨은 잠시 살의를 잊을 정도였다. 그는 기가 막혀 칼을 든 손으로 삿대질했다.
“내 심장이 멈춘 걸 봐 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뭘 믿고 그리 당당하게 굴어?”
“왜, 머리가 없는 닭도 한 달쯤은 멀쩡히 살았다고 하잖아요. 뇌도 심장 못잖게 중요한 장기인데 둘이 비슷하겠죠. 당신도 심장 없이 한 달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야, 너 지금 내가 닭대가리란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