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40)화 (140/156)

#139

캠리의 권유에 서준이 목젖을 만졌다. 별생각 없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걸 듣다 보니 목이 마른 것도 같았다. 캠리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빈속에 물만 부어 놓은 위장인데 커피까지 더하는 건 썩 좋은 식습관이 아닐 듯했다.

‘내가 요한처럼 끼니를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껏 위장이 멀쩡할 때 아껴 줘야지.’

서준은 부드러운 손길로 보온병을 밀었다.

“괜찮아요, 캠리. 아침에 물만 마셔서 지금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릴 것 같거든요.”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챙겨 줘서 고마워요.”

“그래요? 나중에라도 목이 마르면 말해 줘요. 아직 넉넉하거든요.”

캠리의 말투는 봄날의 바람처럼 온유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거칠고 쉰 기침이 남아 안쓰러웠다.

“캠리야말로 목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은데, 따뜻할 때 마시지 그래요?”

순간 캠리의 표정이 몹시 오묘해졌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눈썹도 둥글게 휘어졌다. 그녀는 마치 뜻밖의 인사를 들은 듯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의 변화였다. 캠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도 지금은 괜찮아요.”

그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던 서준과 캠리의 입술이 조개처럼 굳세게 닫혔다. 그들은 눈빛만 주고받으며 숨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몸을 숙였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사람인지, 바깥 복도의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며 힘겨워했다. 이윽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서준은 있는 힘껏 참았던 숨을 단번에 몰아쉬었다. 그가 부족한 폐활량으로 밭은 숨을 내뱉자 캠리가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겨우 가슴이 편안해진 후에야 서준이 약간 충혈된 눈으로 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문을 살짝 열어 보면 어떨까요?”

“글쎄요. 솔직히 제 의견을 말하자면, 서준. 이 방은 문이 워낙 뻑뻑해서 큰 소리가 날 것 같아요. 그러면 그, 리이미아가 말한 칼을 든 여자가 이쪽으로 되돌아오지 않을까요?”

바깥의 동정을 살피자는 의견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회의감을 드러냈다. 물론 서준도 가능하다면 안전해질 때까지 계속 방에 숨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그 안전한 때는 언제쯤 오는 걸까?

차라리 창문이라도 있다면 그곳으로 거리낌 없이 탈출을 감행했을 터였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방에 빛이 들어올 구석이라고는 문과 문틀 사이의 아주 조그만 틈이 전부였다. 서준의 머릿속에는 이 방에 오래도록 있다간 이산화탄소 중독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허황한 망상까지 비죽비죽 솟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나 그만큼 이곳이 희망도 가망도 없는 장소란 이야기였다.

‘여기에 있어 봤자 다 식어 빠진 커피가 세균의 번식지가 될 뿐이야. 아무런 이득도 없어.’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캠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결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만약 바깥으로 나가 칼을 가진 수수께끼의 괴인에게 습격당한다 해도 이쪽은 사람이 둘이었다. 즉 공격당할 확률은 2분의 1이란 뜻이다. 누가 안 좋은 제비를 뽑을지는 나가 봐야 아는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캠리의 등을 떠밀지는 않겠지만 결과가 비슷하다면 마찬가지였다. 서준은 속으로 심심한 사과의 말을 던졌다.

“하지만, 캠리.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동안 칼을 든 사람이 볼일 다 보고 돌아와서는 다시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릴지도 모르죠. 제 생각에 우리는 먼저 행동해야 합니다.”

“음…….”

“그리고 리이미아도 찾아야지 않겠습니까? 일단 리이미아를 찾으면 우리가 셋이고 저쪽은 한 명이에요.”

흉기를 든 사람 앞에서 쪽수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 그리고 리이미아의 안부도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서준은 일단 말부터 뱉었다. 그의 설득이 통했는지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캠리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동의를 얻자마자 서준은 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밀었다. 열리지 않았다.

“…….”

“서준? 괜찮아요. 저도 당신 말에 찬성이에요.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죠.”

캠리가 뒤에서 서늘한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서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캠리, 아무래도 이럴 때 문을 혼자 여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라는 믿음, 신뢰, 증거의 상징으로써……. 함께 힘을 합치도록 합시다!”

용맹한 선언이 끝나자 캠리가 조용히 보온병을 옆구리에 낀 후 문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서준과 눈을 마주치고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잘 안 열리죠? 여기 문이 좀 뻑뻑하더라고요.”

“…….”

간신히 문을 열자 방이나 복도나 흉가이긴 마찬가지건만 왜인지 더 깨끗한 공기가 폐를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준은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며 열린 문 사이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서늘하게 정적이 내려앉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뿐이었다.

복도에 있는 벽 때문에 첫 번째, 두 번째 방의 낌새는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건 다시 말해 그쪽에 누군가 있더라도 서준이나 캠리의 기척을 쉬이 알아채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걸 호재로 보아야 할지, 악재로 보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먼저 방에서 빠져나온 서준이 캠리를 향해 무언으로 손짓했다. 캠리도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움직였다. 방문이 너무 활짝 열린 것도 수상쩍을 듯해 서준은 그녀가 완전히 나온 뒤 그들이 있던 방의 문을 닫았다.

그때 본 문에 빼곡하게 박힌 못이란! 서준의 낯짝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손바닥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을 억누르고 혹여 제 장갑에 찢어진 부분이 없는지 유심히 바라보았다. 새파란 라텍스 장갑은 반들반들하니 멀쩡했다.

‘이런 게 흉가풍 인테리언가? 신체 건강, 정신 건강을 포기하고 취향껏 꾸며 보세요?’

서준은 만약 자신이 집을 마련한다면 접착제 분사기를 애용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가 쓰잘머리 없는 미래 계획을 세우는 사이 캠리는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서준은 그녀를 따라 하고는 큰 소리가 났던 네 번째 방을 향해 슬그머니 기웃거렸다. 그리고 제 주둥이를 틀어막지 않은 걸 후회했다.

“끕.”

돌연 터지려는 비명을 막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눈물이 비죽비죽 샘솟았다. 네 번째 방에 칼을 든 괴인이 잠복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못잖은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목이 잘린 인형이 주르륵 늘어서 전시된 방은 집주인의 정신 건강을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서준과 캠리가 숨어 있던 다섯 번째 방과는 달리 큼직한 창문이 있어 햇살이 들어왔다. 하지만 햇볕이 따땃하게 내리쬔다고 방의 음험한 분위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괴리감이 더욱 섬뜩해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시선이 방의 목 잘린 인형에게 못 박혔기 때문일까? 미처 바닥을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서준의 발이 무언가를 밟고 미끄러졌다.

“으, 헉!”

긴 팔과 다리가 휘청거리며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서준이 넘어지지 않은 건 순전히 요행이었다. 그는 선반을 붙들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캠리가 놀라 곁으로 다가왔다.

“서준! 안 다쳤어요?”

“괘, 괜찮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작게 낮추어 대화했다. 서준이 비실거리며 바닥을 보자 그곳에는 길쭉하고 검은 막대기가 굴러다녔다. 아무래도 저것을 밟은 모양이었다. 그가 쭈그리고 앉아 운동화 앞코로 그것을 툭 건드렸다. 정체를 알아보기란 쉬웠다. 서준의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삼각대네요. 여기 윗부분이 부러져서 버리고 갔나 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서준과 캠리가 칼을 든 괴인을 피해 숨어 다니느라 고생 중인 것이지, 원래 이 흉가는 일명 ‘아는 사람에게는 유명한’ 인기 명소였다. 그런데 삼각대 밑에 무언가 조그만 것이 깔려 있었다. 길이는 서준의 검지만 하고, 그리 두껍지는 않았다. 형태는 곡선적이었는데, 캠리가 그것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곧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이건, 리이미아의 구두 굽이에요.”

“예? 정말입니까?”

“맞아요. 착각할 수가 없는걸요. 저도 예전에는 이 브랜드 신발을 자주 신어서 알아요.”

캠리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신중한 캠리와 달리 서준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드디어 리이미아의 실마리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전망이 마냥 밝지는 못했다. 그래도 서준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입을 열었다.

“그럼 리이미아가 여기에 숨어 있던 걸까요? 혹시 아까 들린 큰 소리를 내거나, 복도를 지나간 사람이 리이미아였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건 아닐 거라고 봐요. 리이미아는 발소리가 더 가볍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리이미아라면 더 확실하게 구두 소리가 났겠죠.”

“아…….”

턱을 톡 두드린 캠리가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아마 리이미아가 이 방에 있다가 다른 방으로 숨은 게 아닐까 싶어요.”

“다른 방이라면, 음. 왜 우리가 있던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서준이 네 번째 방에서 가장 가깝고 흉측한 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 방은 문이 뻑뻑하잖아요. 열려 있었다면 모를까, 닫혀 있었다면 리이미아는 힘이 아주 센 편이 아니니까 쉽게 열지 못했겠죠.”

“그렇다면 남은 방은…….”

“하나뿐이죠.”

캠리가 조용히 2층에 마지막으로 남은 여섯 번째 방을 손가락질했다. 서준은 괜히 그녀에게 맞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살금살금 걸어 여섯 번째 방 앞으로 갔다. 그런데 여섯 번째 방에는 문패가 하나 걸려 있었다. 숫자가 ‘1’이라고 적힌 단출하기 짝이 없는 문패였다. 문패는 끄트머리가 살짝 닳긴 했지만 바른 유약도 반들반들하니 본디 흉가에 있던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다소 뜬금없는 물품에 서준이 하나뿐인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뭡니까? 혹시 2층의 방을 셀 때 여기서부터 셌어야 하는 건가요?”

그가 문패를 손가락질하자 캠리가 조용히 설명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요. 아마 흉가를 찾아온 방문객이 장난삼아 걸어 놨겠죠. 이런 장난을 치는 영상도 조회수가 꽤 되거든요. 그나저나 방을 센다고 말하는 거 보니 서준도 흉가에 얽힌 이야기를 아나 봐요?”

“아.”

그녀의 질문에 서준은 아무것도 숨긴 적이 없는데 지적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제 머릿속 구석에 처박힌 히치하이커를 꺼내 들었다. 당연히 그 빌어먹을 히치하이커의 역겨운 과거사는 깔끔히 잘라 냈다.

“예전에 차에 태워 준 히치하이커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티로 시작했는데 팀인지, 탐인지……. 뭐, 우연히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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