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38)화 (138/156)

#137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은 본래보다 훨씬 어둡고 진한 색으로 빛났다. 긴 머리카락은 어깨와 등에 바싹 다가붙어 몸에 부딪히는 물방울을 흘려보냈다. 길게 기른 머리와 잘록한 허리는 언뜻 보기에 여성 같았으나, 허옇게 드러난 둔부와 이어지는 허벅지의 근육 형태가 남성적이었다.

반듯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요한은 흉가에서 태연하게 씻는 사람이 여자든, 남자든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저 사람은 평범하지 않고 이상했으며 또 의심스러웠다. 그는 팔을 뒤로 해 자신이 멘 배낭을 더듬었다. 현재 요한의 전 재산인 짐에는 크리스티나가 선물한 만능 공구함이 담겨 있었다. 비록 그녀는 기계에 사용하라고 준 도구였지만, 요한은 때때로 유연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성별 불명인은 작게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는데, 목소리가 낮고 음률이 그리 고상한 편은 아니었다. 특히 물소리와 섞여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흘렀다. 그때 성별 불명인이 팔을 뻗어 물을 잠갔다. 그리 매끄럽지 못한 소리가 몇 번 나고 샤워기 호스에서 나오던 물이 뚝 멎었다.

그러나 희뿌연 수증기는 아직 남아 있어 욕실의 인영을 오묘하게 가렸다. 성별 불명인이 연극적인 태도로 목을 틀자 척척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빠르게 나부꼈다. 그리고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씻었는지 눈가가 약간 검었고 점이 찍힌 눈꺼풀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얌전히 깜빡였다.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아랫눈시울로 떨어졌다. 곧 어두운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악! 너 뭐야? 변태 자식! 뭘 훔쳐보는 거야?”

카랑카랑한 비명이 욕실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성별 불명인은 성을 내며 양팔과 머리카락으로 가슴팍을 가렸다. 물론 하체는 고스란히 내보여 고간이 덜렁거렸다. 이 꼴을 본 요한이야말로 당황스러웠다. 요한은 그답지 않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돌렸다.

“가릴 부분을 착각한 거 아니에요?”

“입 닥쳐! 뭘 가릴지는 내가 결정해!”

태평하게 콧노래를 부르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실컷 성질을 부리더니 등을 돌리고는 재빨리 옷을 입었다.

그의 옷차림은 짧은 치마와 블라우스, 그리고 스팽글이 잔뜩 붙은 겉옷이었다. 막 씻고 나온 몸은 물기가 덜 닦여 습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과연 그도 썩 편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까슬까슬한 겉옷을 단단히 차려입고는 단추까지 일일이 채웠다.

굽이 높은 신발까지 야무지게 챙겨 신은 채 호기롭게 걸어오더니 그는 삐딱하게 문가에 기대어 요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때쯤 요한은 세상에는 양성이란 것도 있다고 들어 본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덕분에 한결 평화로운 낯짝으로 뻔뻔스럽게 매서운 눈빛을 받아넘겼다. 상대에게서 사나운 목소리가 질책하듯 튀어나왔다.

“너 뭐야? 내 스토커야? 뭘 야금야금 숨어서 보고 있던 건데?”

팔짱을 낀 그가 자신의 팔뚝을 불만스럽다는 듯이 검지로 툭툭 쳤다. 솔직한 말로 요한도 이런 흉가에서 태평하게 씻는 사람이 도통 제정신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물어볼 게 있었고, 이 패악스러운 성미의 소유자를 살살 긁어 보았자 제대로 된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요한은 순순히 사과했다.

“화났다면 미안해요. 사실, 난 여기가 흉가라고 알고 왔는데 갑자기 물소리가 나서 무서웠을 뿐이에요. 왜 흉가는 종종 귀신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하, 귀신이라니! 귀신이 무섭단 말이야? 네 덩치가 아깝다.”

다행히 변명이 통했는지 조롱 가득한 대꾸가 돌아왔다. 요한은 샛노란 배낭을 앞으로 끌어안으며 맞장구쳤다.

“제가 좀 겁이 많아요.”

“흥.”

정체 불명인은 코웃음을 가볍게 치고는 요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보다는 키가 작아 살짝 턱을 치켜들고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는데 눈빛이 집요하고 탐색하듯이 끈질겼다.

“내 얼굴, 몰라?”

“얼굴요?”

요한은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이나 촉촉한 뺨, 뾰족한 눈초리를 뜯어보았다.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모르겠어요. 혹시 우리가 구면이던가요? 어머니 쪽 친척이세요?”

“아니, 아니야. 나는…….”

잠시 말을 끊은 정체 불명인이 뒤를 돌아 욕실의 흐린 거울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더니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

“나는 캠리야. 매디슨 캠리. 화이트 스타의 인플루언서.”

“매디슨?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요한이예요. 여행하는 중이죠.”

매디슨은 요한의 인사를 어영부영 받았다. 기껏 악수하자고 내민 손이 허공에 홀로 놓이자 요한은 섭섭한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디슨은 자신이 한 말을 혼잣말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상당히 기괴했다. 그러더니 돌연 머리를 치켜들고는 두 눈을 형형히 빛냈다.

“내가 씻은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야. 그냥 친구하고 놀다가 옷하고 몸이 지저분해져서 씻었을 뿐인걸.”

“그렇군요.”

요한이 매디슨에게 궁금한 건 흉가에서 어떻게 씻을 수 있는가였지, 그가 욕실에 틀어박힌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친근한 사이라고 부르기 어려웠고 본래 아쉬운 사람이 지고 들어가는 법이었다. 요한은 살금살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물어볼 게 있어요, 매디슨. 혹시 이런 사람 본 적 없어요? 키가 나보다는 약간 작고, 말랐지만 팔하고 다리는 보기 좋게 길고, 얼굴은 갸름하니 예쁘고…….”

매디슨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설명한다고 알겠어? 차라리 사진이 있으면 그걸 보여 주지 그래?”

“아.”

요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는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매디슨은 이미 흥미가 가신 듯 지루하게 신발 앞코로 바닥을 두드렸다.

“여기요. 이름은 서준이라고 하고, 오른쪽에 안대를 꼈어요.”

“그런데 봐도 모를걸? 나는 친구랑 여기 온 후로 너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거든…….”

공교롭게도 그들의 말이 서로 겹쳤다. 매디슨이 옹알거리며 요한이 내민 휴대 전화의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요한은 휴대 전화를 내밀고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늦었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서준이 기니피그에게 뺨을 맞는 사진을 본 매디슨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아주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말해서 이런 녀석은 여기 오지 않았어.”

“아…….”

요한이 시무룩하게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의 여린 마음이 몹시 쓰라렸다. 요한은 자신이 때를 잘못 잡았다는 것에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여기서 만나지는 않았지만 아는 얼굴이기는 하네.”

하지만 매디슨이 이어 말하자 그의 얼굴에서 반지르르하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요?”

“여기 오기 전에 들렀던 레스토랑에서 만났어. 거기서……. 벌레가 나와서 손님끼리 합심해서 잡았지.”

“준이에게 여기에 올 거라고 말했었나요?”

매디슨이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그래. 헤어질 때 인사하면서 말했던 것 같아.”

그렇다면 서준은 매디슨을 만나기 위해 난데없이 흉가행을 결정했던 걸까? 요한의 눈빛이 한층 더 깐깐해졌다.

“그나저나 얘는 왜 여기서 찾아?”

“준이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나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침 이 근처라서 들른 거죠. 어디까지나 우연히 말예요.”

“뭐?”

매디슨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눈꺼풀에 찍힌 점이 살짝 일그러졌다. 곧 매디슨의 입술이 교묘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아하……. 그렇지, 역시 그랬구나. 그 녀석이 캠리를,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는걸?”

“네?”

매디슨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군데군데 배어 있었다. 그는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눌러 참았다. 그러나 우월감에 도취한 얼굴은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 한바탕 폭소한 매디슨이 덧붙였다.

“뭐, 그렇지. 나는 그 매디슨 캠리니까.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있어. 흥, 그래 봤자지!”

떠벌리는 매디슨을 코앞에 두고 요한의 목이 삐걱거렸다. 조용히 매디슨의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요한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원체 낮았는데 지금은 욕실에서 나오는 물기와 어우러져 습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매디슨은 서준이 당신을 좋아해서 이곳에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배꼽을 움켜잡고 눈물을 닦던 매디슨이 깔보는 말투로 대답했다.

“뻔하고 뻔한 일이지만 그것까지 내가 알 게 뭐야? 그리고 나한테 중요한 건 서준인지 써전인지가 아니야.”

그는 요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지금쯤 내 친구가 혼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걸? 나를 따라 하기만 하고, 개성 따윈 설탕 부스러기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거든.”

“친구요.”

요한이 매디슨의 요란한 상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나야말로 매디슨과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걸요.”

앞서가던 매디슨이 우뚝 멈췄다. 그는 키가 작지 않은 데다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고 몸이 마른 편이라 마네킹이 서 있는 듯했다. 매디슨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이상한 말인걸? 분명 두 번째 방에 계속 있었을 거야. 리이미아는 그럴 거야.”

그러고는 다시 걸어 두 번째 방문 앞에 섰다. 그곳은 이미 요한이 한바탕 뒤적거린 장소였다. 요한은 정말로 두 번째 방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으니 어깨만 으쓱거렸다.

“리이미아?”

매디슨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흉가답게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으나 내부는 요한이 보았던 때와 똑같았다. 흩어진 알약과 역한 비린내, 멀끔한 가방 두 개에 큼지막한 거울 하나. 요한은 무표정하게 검붉은 나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매디슨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웅얼거렸다.

“이상하다. 리이미아가 어디로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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