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아악! 사람 잡아먹는 흡혈 벌레들이 다가오고 있잖아! 누가 어떻게든 해 봐!”
리이미아가 빽 소리치며 몸을 흔들었다. 그는 가능하다면 하늘을 날아서라도 벗어나고픈 듯했으나 여전히 손이고 발이고 묶여 있어 자리를 지켜야 했다. 문제는 이곳에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황이란 점이었다. 멍청하게 죽어 버린 찰스 덕분에 그들은 벌레를 위해 마련된 만찬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본래 찰스의 노림수와 썩 다르지도 않았다. 그는 애초에 레스토랑의 손님을 전부 웬드릭의 위장에 넣어 버릴 심산이었을 터이니. 어쩌다 보니 본인이 손수 모범을 보이게 되어 버렸지만….
“시끄러워, 대체 누가 이렇게 고함을 지르는 거야.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알아.”
구석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 속에서 우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생명이 경각에 달한 이들은 오감이 무척 예민한 상태였다.
“캐롯! 지금 잠꼬대할 때가 아니야, 빨리 일어나!”
알리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마 그녀의 절박한 비명이 캐롯에게는 달콤한 밀어쯤으로 들렸는지, 그는 눈을 번쩍 치떴다.
“알리스?”
캐롯은 알리스에게 다가가려고 상체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결박당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조리실의 차갑고 미끄러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윽!”
만약 살인 애벌레가 느릿느릿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는 도중이 아니었다면 서준은 테이블에 아랫배를 얻어맞은 원한을 듬뿍 담아 낄낄거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캐롯의 미련한 짓거리를 비웃을 여유가 없었다.
“오, 오고 있어요! 벌레가 오고 있어!”
가능한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캠리조차 속이 비칠 듯 투명하고 통통한 벌레에 질겁했다. 그녀와 리이미아는 한 몸처럼 바짝 붙어 오들오들 떨었고 알리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발을 휘둘렀다. 차라리 벌레를 터뜨리려는 작정인 듯했다.
그리고 올리버로 말할 것 같으면 양 콧구멍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휴였던 잔해를 말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서준이 소중한 뇌세포를 희생한 보람이 있는지 그는 더는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다만 연인이었던 파우더 인간이 기이한 덩어리로 분해되는 모습을 찬찬히 응시하며 장날에 팔려 가는 소처럼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눈빛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뭇사람들의 동정을 살 만했다. 물론 서준의 감상은 휴까지 저 벌레 대란에 끼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는 것이 전부였다.
휴의 육체는 팔이 잘린 후 급격히 무너졌다. 날렵한 콧날이나 매끈한 이마, 가지런한 손가락 따위는 옛적에 사라져 이제는 사람의 형체조차 이루지 못한 밀가루 반죽처럼 느껴졌다. 특히 웬드릭이 폭사하며 터뜨린 핏물이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젖은 부위일수록 더 빠르게 녹아내렸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악마가 홈쇼핑으로 팔아 치운 완벽한 연인을 만드는 비방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파우더였다. 나머지는 부재료에 불과했다. 그리고 파우더란, 수분을 흡수하지만 물에 풀어지기도 하는 물건이었다.
“…아.”
순간 서준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그는 꾸무적거리며 기어 오는 벌레를 내려다보았다. 저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파우더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저 벌레들은 단일 개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한 상황이기까지 했다. 그는 황급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리 시설이라면 응당 달려 있어야 할 물건이, 있었다!
“캐롯!”
“뭐, 뭐야?”
캐롯은 알리스의 곁으로 가기 위해 몸을 굴리는 중이었다.
‘알리스의 고기 방패가 되려는 건가?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서준은 내심 그의 희생정신을 흡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장 서준이 캐롯에게 시킬 일을 생각하면 저러한 살신성인의 자세가 필요했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송곳을 캐롯 쪽으로 찼다. 찰스가 조리대를 쳤을 때 떨어진 것이었다. 캐롯은 송곳을 덥석 주웠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표정이었으나 곧 이해했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환한 얼굴로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아, 알겠어! 이걸로 저 벌레를 찍어 누르라는 말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서준은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치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악, 미친!”
그 역시 캐롯의 둔한 두뇌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찬찬히 설명하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그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서준은 발치까지 다가온 벌레를 운동화 바닥으로 짓눌렀다. 기묘한 울음과 함께 벌레가 퍽 터졌다. 끔찍한 꼴을 목격한 그는 캐롯을 노려보았다. 천하의 얼간이를 보는 시선에 캐롯이 속에서 치솟는 울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저기 천장의 스프링클러에 맞혀. 기회는 한 번뿐이야. 진지하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네가 우리 전원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어! 무조건 성공해야 해. 알겠어? 우리가 살면 내 덕분이고, 죽으면 네 탓이야. 어깨가 빠져도 괜찮으니까 저걸 부셔!”
묶인 손을 번쩍 들어 천장의 스프링클러를 가리켰다. 부탁도 아니고 명령이었다. 거기에 내용은 책임 전가라니? 이번만큼은 캐롯도 분기를 참지 못했다. 그는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벌레를 용케 한 마리 밀어내고는 짜증이 깊게 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까부터 무슨 이상한 말을 쫑알쫑알…….”
“캐롯! 시키는 대로 해! 일단 해 봐! 너라면 할 수 있어!”
그러나 캐롯의 말은 알리스가 싹둑 잘라먹었다. 그녀는 핏줄이 벌겋게 선 얼굴로 캐롯을 돌아보았다. 다급한 알리스의 태도에 캐롯은 순한 양이 되었다. 그는 명징한 눈빛으로 겸허하게 송곳을 쥐었다. 분연히 일어난 캐롯의 근육이 불끈거렸다. 그리고 그는 괴성을 지르며 천장의 스프링클러를 향해 송곳을 던졌다.
“으아아악!”
서준의, 알리스의, 캠리의, 리이미아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다양한 원인이 있었다. 찰스는 웬드릭의 먹이를 조달하기 위한 덫을 구태여 훌륭하게 꾸며 놓았고, 우연히도 습식 스프링클러였으며, 마지막에는 홀로 죽는 미덕을 발휘했다. 하지만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역시 캐롯의 근육이야말로 일등 공신이었다.
깡, 하고 송곳은 스프링클러에 꽂혔다. 유리가 깨져 파편이 조금 떨어지고 칙 소리가 났다. 서준의 눈이 하염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탁, 물이 한 방울 떨어지더니 곧 스프링클러가 분사를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며 레스토랑 바깥에서 나던 소리가 조리실에서도 울렸다. 피와 살점으로 지저분해졌던 몸을 무겁게 때리는 물은 기꺼웠다. 반면 물에 젖은 벌레들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더니 아예 멈췄다. 그것들은 물줄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흐악!”
마침 벌레에게 발등을 뜯기기 직전이었던 리이미아가 안도인지 한숨인지 모를 비명을 빽 내질렀다. 그리고 스프링클러의 물이 멎었을 때 그들은 바깥의 폭우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이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웬드릭의 벌레와 찰스의 미라, 그리고 휴였던 것을 피해 조리실에서 케이블 타이를 풀 만한 도구를 찾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는 온몸에서 진이 다 빠진 후였다.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해낸, 이제는 주인이 없는 식당의 손님들은 지친 다리를 이끌고 조리실을 벗어났다.
그래 봐야 아까까지 그들이 있던 테이블로 옮긴 정도였으나 흉한 시체와 시체 비슷한 무언가가 있는 주방보다는 훨씬 나았다. 서준은 짐을 챙겨 깨끗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먹고 기절한 핫케이크와 커피가 차게 식은 테이블에서 떠들 용기는 없었다.
대부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그들은 가장 넓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알리스가 공허한 시선으로 바깥을 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비쳤다.
“해 떴네요.”
“그러게요.”
눈 밑이 검어진 캠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도 허공을 멍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게 되는대로 내뱉은 말 같았다. 다행히 알리스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벅벅 긁더니 또렷한 눈빛으로 서준을 쏘아보았다. 기세가 대단해 의자와 한 몸이 되어 가던 그조차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보다, 당신요. 서준. 혹시 당신은 엑소시스트인가 그런 건가요? 주방에서도 뭔가 아는 눈치였잖아요. 그 흉측한 벌레를 무찌르기도 했고요.”
알리스의 목소리에는 묘한 흥분이 어렸다. 아마도 서준이 떠들어 댄 악마 운운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알리스의 대담한 발언에 흐느적거리던 다른 사람들까지 서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기가 찬 서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그 정도의 행위에도 목이 뻐근했다. 그는 의기소침한 올리버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엑소시스트는 무슨, 그런 거 아닙니다. 사실…….”
화장실에서 주운 안경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본 사실은 쏙 빼놓기 위해 제가 악마의 홈쇼핑을 직접 보았다는 식의 각색이 필요했다. 서준은 완벽한 연인 만들기 파우더에 관해 설명했다.
“…그래서 올리버가 제 손을 보고 과도하게 반응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올리버도 손에 붕대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만일 휴가 파우더 인간이 아니었을 경우는 일부러 쏙 빠뜨렸다. 그 외에는 그럭저럭 이야기의 앞뒤가 맞았다. 홈쇼핑에서 했던 경고 문구가 생각나 찰스가 잘못된 재료를 넣도록 유도하고, 파우더로 만들어 낸 인간의 인체가 유독 무른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아채 스프링클러가 터지도록 했다는 것을 포함하여도.
“과연, 그보다 정말로 있나 보네요. 악마라는 존재가…. 아니, 설령 진짜 악마가 아니어도 악마의 이름을 달고 저지를 법한 일이에요.”
알리스는 악마가 판 파우더의 위력과 악의에 순수하게 감탄했으며 리이미아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뭐야, 그런 홈쇼핑 방송이 있었다고? 채널명 좀 말해 봐. 그런 걸 내 화이트 스타에 올리면 반응이 엄청날 텐데!”
끈덕지게 들러붙는 그에게는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캐롯은 서준이 말하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도대체 잘 받아들였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는 서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대신 신중한 얼굴로 알리스에게 말했다. 말투가 대단히 비장했다.
“그런 괴물 같은 파우더가 있다니 정말 소름 돋는 일이야. 알리스, 너만이 나의 완벽한 이상형이야. 나는 결코 저런 사악한 파우더 따위는 손도 대지 않아!”
“오, 캐롯…. 내가 아니라 네가 파우더로 만든 연인이면 어떡하려고?”
그녀가 장난스레 던진 말에 캐롯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알리스는 혼란스러워하는 캐롯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캐롯! 네가 내 이상형이었다면 더 똑똑했을걸.”
“응?”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알리스의 말에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비록 조리실에는 여전히 최소 한 사람, 사람의 기준을 넉넉히 잡을 시 최대 세 사람의 시체가 굴러다녔으나 적어도 그들이 앉은 테이블의 공기는 훈훈해졌다. 그리고 알리스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올리버의 손을 붙잡았다.
서준이 악마의 홈쇼핑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올리버가 느릿하게 움츠렸던 목을 펴자 진지한 표정의 알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올리버, 저렇게는 되지 말아요.”
“나, 나는…….”
“물론 나는 당신이 손톱과 발톱을 전부 뽑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죠. 우리는 오늘까지 친구도, 하물며 아는 사이조차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올리버, 찰스처럼은 되지 말아요. 그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봤잖아요?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서준…도 보세요. 그도 유혹을 물리쳤는걸요.”
서준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사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록색 눈망울은 무언가 감명을 받은 눈치로 그를 힐끔거리더니 머리를 푹 숙였다. 올리버는 한참을 흐느꼈고, 서준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 연락해 봤는데 도로가 지나다닐 만해졌다네요. 처음부터 그리 심한 게 아니었나 봐요.”
이별은 다소 맹숭맹숭했다. 알리스가 어찌어찌 연락해 도로의 상황을 알아냈고 서로 갈 길을 가야 할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말을 나눴으나 연락처를 교환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어쩌다 같은 식당에 머무르게 된 인연이었다. 함께 목숨을 건진 사이기도 했지만, 오래 곱씹고픈 추억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자명했다.
“아, 드디어 필리 에프가 갔던 흉가를 가는구나.”
리이미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챙겼다. 그의 가방 속에서 비타민 통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캠리는 아쉬운 듯 서준을 몇 번 보았으나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캠리와 리이미아는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걸어 나갔다. 알리스와 캐롯, 올리버가 나가고 서준은 느릿하게 발을 끌었다.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오자 비 온 후의 신선한 공기가 뺨을 때렸다. 햇볕은 따스했고 가볍게 부는 바람이 선선했다. 그는 기어가듯 제 트럭의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오자 드디어 살았다는 실감이 들었다.
“으으…….”
서준은 지끈거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거나하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쪽 눈을 번쩍 뜨더니 이를 갈았다.
그 불손하던 시선이라니!
마치 서준이라면 당연히 완벽한 연인 만들기 파우더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는 눈빛은 은근한 상처를 남겼다.
‘나도 나 좋다는 놈이 없지 않은데.’
구시렁거리며 운전대에 상체를 기댔다. 파우더로 만든 연인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된 그가 새삼스럽게 파우더에 미련이 생긴 건 아니다. 다만 서준은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상형이 그토록 확고할까?
이 세상이 공포 영화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기에 그간 성애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이상적인 연인을 꿈꾸기에는 정신머리가 빠져 있었다. 물론 그도 미추의 구분은 가능했다. 바로 지척에 크리스티나라는 미인이 살지 않았던가? 또 보비를 보노라면 추남이라는 단어가 왜 생겨났는지 절실히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음.”
그리고 언제나 이런 주제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요한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서준에게 연애 감정을 품었고, 품었노라 당당히 고백한 첫 남자였다. 게다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사랑을 떠들어 대기까지 했다.
눈만 껌뻑거리던 서준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는 혼자 귀까지 새빨개졌다. 꿍, 머리통이 운전대에 부딪혔다.
“아, 아아아. 곰 인형. 곰 인형이나 다시 달아야지.”
홧홧한 얼굴에 손부채를 부치며 주머니에 대강 쑤셔 박았던 비타민 통을 꺼낸 뒤 뚜껑을 돌렸다. 서준은 통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앙증맞고 귀엽고 조금은 낯선 이름을 가진 곰 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알약뿐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왔다.
통이 바뀌었다.
***
요한은 병원에서 나오며 홀쭉해진 지갑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결국 그의 노란 장난감 같은 차는 버렸다. 그건 도무지 펴서 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휴.”
한숨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거기에 더해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검진까지 받아야 했다. 뇌진탕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마법사가 손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운수 좋게 진료를 빨리 받았지만 운은 그것으로 동이 나 버렸다.
그는 아련한 시선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새파란 눈동자 속에 청명한 하늘이 담겼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거나 뇌출혈이 생기지도 않았다. 요한의 몸은 몹시 튼튼했고, 무엇보다 안전벨트를 맨 덕이 컸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맨몸뚱이 하나였다. 짐이라고 해 봐야 약간의 돈과 한 움큼의 레몬 사탕, 곰 인형을 떼고 남은 십자가와 용케 멀쩡한 휴대 전화,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준 공구 상자뿐이 없었다.
사실 다른 건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골치는 아무리 닥닥 긁어모아도 새 차를 살 돈이 모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도 히치하이크해야 하나….”
하지만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도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이제 요한은 서준이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물론 진정한 목적지야 한결같겠지만, 요한은 내심 조지아의 숙부댁에 도착하기 전 서준과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만남을 기대했다.
“이 방법만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는 우울한 낯짝으로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금세 기분을 전환했다. 어차피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법이다. 목에 십자가를 건 요한이 활짝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 요한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