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본색을 드러낸 후로는 싱글벙글하던 낯짝이 대놓고 정색했다. 찰스는 굳은 얼굴로 리이미아로부터 한 발짝 멀어졌다. 하지만 혼란에 빠진 리이미아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나름대로 위협할 작정이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와 캠리가, 우, 우리가 사라진다면 구독자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물론 눈물과 콧물을 쏟는 얼굴로 그래 봐야 별 효과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 아니 그의 말은 때마침 내리친 천둥소리에 파묻혔다. 귓구멍이 다 얼얼해지는 울림이었다. 그래도 찰스는 용케 알아들었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리이미아는 그가 더는 다가오지 않자 제 윽박이 먹힌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서준이 보기에 찰스는 그저 여자가 아닌 리이미아의 신체 부위를 웬드릭에게 넣어 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흐음.”
찰스는 도마 곁에 두었던 날이 넓은 식칼 대신 조리대의 서랍에서 뾰족한 송곳 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것을 툭툭 건드렸다. 서준은 그의 행위가 겁을 주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고민에 빠진 찰스의 버릇인지 헷갈렸다.
‘둘 다 별로야.’
쓸린 손목이 아파졌지만 서준은 탈출 시도를 늦추지 않았다. 만약 찰스가 제 손톱이 자라는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타인의 것을 갈취하기만 하려는 속셈이라면 어울려 줄 용의도 있었다. 고작 손톱 한 장이야 목숨값에 비하면 얼마나 저렴한가? 그러나 휴의 팔을 냉큼 잘라 버린 과감성과 잔인성을 생각했을 때, 찰스는 겨우 사소하고 조그만 조각을 원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말에서 유추해 보자면 서준과 토사에 발이 묶인 일행은 첫 고객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설득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버려야 해.’
잠깐이라도 온몸에 힘을 준 탓인지 근육이 다 저리고 쑤셨다. 하지만 연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살과 뼈를 빼앗을 마음이 만만한 살인자 앞에서 긴장을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준은 이마를 길게 덮은 머리카락 안쪽에서 눈을 빛냈다. 어떡해서든 틈을 발견해야 했다.
“남자라니, 쯧.”
찰스가 콧등을 씰룩거렸다. 리이미아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아래에 남성기가 달린 리이미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새로운 먹잇감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그로서는 다행히도 희생양 후보는 둘이나 더 있었다. 캠리와 알리스였다. 알리스는 찰스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남자예요. 내 팔뚝만 한 게 아래에 달렸죠.”
“…….”
“제기랄.”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리스가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찰스가 새로운 제물을 선택하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철퍽, 하고 웬드릭의 팔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누군가가 몰래 그녀의 몸에 상해를 입힌 게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할 때가 됐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끊어짐이었다. 헤진 살갗과 반쯤 썩어 뭉그러진 살점이 풍기는 악취……. 정육점에서 실한 고기를 고르듯 눈을 부릅뜨고 있던 찰스가 퍼뜩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오, 오오! 웬드릭! 안 돼, 나의 여왕.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장을 부렸어.”
“남편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요. 늘 저런다니까!”
웬드릭이 제 팔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고장 난 테이프 같은 말을 듣고도 찰스는 안절부절못하며 허둥거렸다.
“일단 급한 대로 해야겠어요. 미안해요, 내 사랑. 더 좋은 것만 먹이고 싶었는데. 아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잰걸음으로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찰스가 지나칠 때마다 꽁꽁 묶인 이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단잠에 빠진 캐롯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후!”
짧은 기합과 함께 거대한 믹서기가 조리대에 올라왔다. 믹서기 안쪽의 칼날이 어찌나 흉흉하던지 그야말로 무엇이든 갈아 버릴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찰스는 잠시 믹서기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더니 그곳에 휴의 팔뚝을 던져 넣었다. 텅, 다섯 개의 손가락이 칼날에 찍히고 피가 흘렀다. 올리버가 경기를 일으킨 건 당연했다. 그는 사색이 되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 휴에게 무슨 짓이야! 안 돼, 안 된다고! 지옥에 떨어질 자식 같으니! 개와 흘레붙은 아비한테 태어난 놈!”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거무죽죽해지고 두 눈의 핏줄이 터져 안구가 충혈되니 귀신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악스러운 목소리에도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이런저런 재료를 믹서기 안에 집어넣는 일에만 집중했다.
“반죽보다는 믹서기가 좋아요, 좋아요. 잘 섞여요, 섞여요. 그래야 살이 안 뭉치니까!”
웅얼웅얼하던 그는 제법 신이 났는지 흥겹게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거렸다. 올리버는 이제 눈깔이 뒤집혔다. 그가 잔뜩 쉰 목으로 저주를 내뱉었다.
“그런다고 네 연인이 제대로 만들어질 것 같아? 내가 침을 뱉고, 오줌을 싸지를 거야! 그래도 멀쩡한 게 나올지 두고 보자고!”
동시에 서준의 한쪽 눈 역시 번쩍 뜨였다. 그는 올리버의 흉악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올리버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오오, 웬드릭. 잠시만 기다려 주오. 내가 당신을 위해 특식을 만들고 있으니.”
찰스도 그렇다. 그는 올리버의 발악을 배경음 삼아 손을 놀리기만 할 뿐이었다. 덕분에 올리버는 잔뜩 약이 올랐다. 깨물어 피가 나는 입술이 한 번 더 열렸다. 서준은 직감했다. 더 말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묶인 손과 발을 빠르게 훑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머리가 있었다!
“…이, 꿉!”
“닥쳐!”
감은 눈 안쪽에서 별이 번쩍 튀었다. 정수리가 얼얼하고 코끝이 찡했다. 뻐근한 머리통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안면을 머리로 얻어맞은 올리버에 비하면 서준은 한결 나은 편이었다. 올리버는 하필 입을 크게 벌리고 있을 때 온 힘을 다한 박치기를 당한 터라 혀를 찧었다. 콧대가 눌린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올리버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해롱해롱했다. 오히려 주변의 알리스와 캠리, 리이미아가 경악한 채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저 살자고 애인을 실시간으로 잃고 있는 올리버를 공격한 무뢰배를 향한 경멸로 가득했다. 서준은 사정을 말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올리버도 그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옹다옹 다투는 동안 찰스는 모든 재료를 믹서기에 넣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기이하게 비틀리며 손톱 하나 없는 손가락이 믹서기의 버튼을 돌렸다. 요란한 소리였다. 칼날은 무자비하게 휴의 손을 썰었다. 아름다운 손가락과, 사내답게 단단한 손목, 그리고 늘씬하게 뻗은 팔이 너무나 쉽게 으깨졌다. 매끄럽던 피부는 종잇장처럼 찢기고 지저분한 색으로 변했으며 소금 알갱이며 새하얀 가루가 들러붙어 너저분해졌다. 순식간에 형체를 잃어버린 휴의 팔을 망연히 바라보던 올리버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이 흘렀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의식은 금방 끝났다. 찰스는 믹서기 안쪽에서 출렁거리는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를 것을 들여다보더니, 승리에 취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난, 나의 연인을 위해 뭐든지 할 거야. 뭐든지!”
컵에 담기에는 용량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는 걸쭉해진 그것을 거대한 통에 담았다. 그러고는 팔이 떨어진 채 홀로 서 있던 웬드릭에게 다가가 그녀의 턱을 살며시 붙잡고는 입술을 벌렸다.
“웬드릭, 내 사랑. 이걸 먹고 다시 건강해지길…….”
통을 기울이자 걸쭉한 그것이 웬드릭의 입 속으로 꼴꼴꼴 들어갔다. 그녀의 목이 꿀렁거리고 진한 액체가 점점 사라졌다. 이 엽기스러운 광경에 서준은 속이 불편해졌다. 그의 곁에 있던 알리스도 비슷한 감상이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올리버는 오히려 조용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웬드릭이 휴의 팔이었던 음료를 마시는 꼴을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거대한 통이 깨끗하게 비워지자 찰스가 감격에 차 속삭였다.
“아아, 웬드릭. 내 아내, 내 여왕. 이걸로 우리는 또 사랑을 나눌 수 있어.”
황홀경에 찬 듯 달뜬 목소리였다. 그런데 팔이 떨어져도 생글생글 웃던 웬드릭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음씨 좋은 중년 부인 같던 그녀의 표정이 우글쭈글해지고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변모에 찰스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웬드릭?”
그의 말에 대꾸하기도 전에 웬드릭의 배가 불룩 부풀었다. 배만이 아니었다. 배는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곧 그녀의 목, 옆구리, 팔, 이마가 울룩불룩하게 솟았다. 마치 무언가가 웬드릭의 몸을 뚫고 나오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황에 다들 입을 떡하니 벌렸다. 눈으로 보고 있으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웬드릭의 목이 아주 천천히 찰스를 향해 돌아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틀림없는 분노가 자리했다.
“나-한테-뭘-먹-인거-야?”
웬드릭의 말이 테이프를 늘린 것처럼 길어졌다. 불분명한 목소리가 노기를 품고 찰스에게 떨어졌다. 찰스는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몸에 섣부르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어, 어, 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찰스의 붉은 여왕은 더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뻥!
공기가 한계까지 찬 풍선을 터뜨리듯 굉장한 소리가 조리실에서 울렸다. 그것은 폭발에 가까웠다. 일시적으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새빨간 비가 내렸다. 솨아아……. 후드득 떨어지는 핏물과 살점이 사방팔방 들러붙었다. 얼굴을 적시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서준은 앞을 간신히 보았다. 상반신을 잃은 다리가 풀썩 쓰러졌다. 그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웬드릭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