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캠리와 리이미아는 한참을 핫·쿨·프레시한 여자에 관해 혓바닥이 닳도록 떠들어 댔다. 점잖아 보이던 캠리도 이 화제에 관해서는 리이미아와 의견을 같이했다. 덕분에 서준은 배가 고픈 것도 잊었다. 그는 식당 주인을 부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선홍색 살덩이가 감자튀김의 소금기가 묻은 손가락을 핥았다. 혀를 날름거린 리이미아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끝냈다.
“장담하는데, 필리 에프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될 거예요. 사실 지금도 거의 그런 상태이기는 하죠.”
이름을 날린 배우나 가수도 아니고 단순히 SNS의 인플루언서가 그렇게까지 영향력을 끼칠까 의문이 들었으나 괜히 말 꺼냈다가는 저 가공할 인조 손톱에 낯가죽이 죄 벗겨질 듯한 위기감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서준은 침묵은 금이라는 현명한 옛말을 따르기로 했다. 실컷 떠들고 만족했는지 리이미아가 가방에서 또다시 비타민 통을 꺼내 흔들었다. 그녀는 알리스를 향해 은근하게 떠보듯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요즘 유행은 종합 비타민이다, 이거예요. 한 통쯤 먹어 보면 효과가 놀랍다니까요? 알리스, 당신이라면 특별히 저렴하게 드릴 수도 있어요. 리뷰 쓰고 내 화이트 스타 계정에 태그를 걸면요.”
그러나 리이미아의 틈을 탄 판촉은 두툼한 팔뚝에 가로막혔다. 캐롯이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자랑스레 떠벌렸다.
“알리스와 난 이미 챙겨 먹는 제품이 있어. 식전, 식후 모두 완벽하게 구비해 뒀다고.”
리이미아가 작게 혀를 찼다. 그녀는 손에 든 비타민 통을 의미 없이 흔들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서준은 그제야 제 곰 인형을 기억해 냈다. 그는 허둥거리며 리이미아에게 삿대질했다.
“내 열쇠고리나 돌려줘요.”
“열쇠고리?”
“곰 인형 말입니다.”
기껏 곰 인형이라는 단어를 피해서 말했더니 리이미아가 못 알아듣는 척 비타민 통을 툭 건드렸다. 결국 서준의 입에서 곰 인형이라는 귀엽고 깜찍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흥, 누가 그깟 누더기 훔쳐 갈까 봐? 애당초 내 취향도 아니었어.”
리이미아는 가방에 있던 비타민 통을 잡아 서준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비타민은 서비스야. 넌…. 좀 챙겨 먹고 다니지그래? 비리비리해서는. 뭐, 소용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버석하게 마른 몸을 살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곰 인형을 되찾은 서준은 서둘러 블루종 재킷 주머니에 비타민 통을 확인도 하지 않고 쑤셔 박았다. 그는 몹시 내키지 않는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물어보았다.
“저도 그 리뷰 이벤트 해야 합니까?”
질문을 들은 리이미아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녀는 서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광대뼈를 씰룩거렸다. 대단히 험악한 기세였다. 서준의 연약한 심장이 쪼그라든 것도 당연했다. 무시무시한 눈길을 받던 그가 입을 꾹 다물자 캠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 참여하면 좋죠. 혹시 화이트 스타 계정 있어요? 있으면 알려 주세요. 나랑 친구 해요.”
이때 캠리의 입에서 친구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더더욱 살벌한 눈빛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혹 구멍이 나진 않았나 걱정될 지경이라 서준은 무심결에 제 뺨을 매만졌다. 하지만 캠리는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지 명랑한 표정으로 서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겨우겨우 침을 꼴깍 삼킨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아니, 그러니까 계정이 없어요.”
“오, 저런.”
잠시 침묵하던 캠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름을 쓰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화이트 스타는 꼭 본명을 기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리이미아도 가명이거든요.”
“캠리!”
화들짝 놀란 리이미아가 캠리와 눈을 맞추었다. 반면 캠리는 대수롭잖은 눈치였다. 그녀가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입술을 질겅거리던 리이미아는 양 손바닥을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맞아, 리이미아는 라미아에서 따온 가명이야. 솔직히 말해서, 난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가 별 고민도 없이 붙인 이름이 정말 싫거든.”
“라미아라면 아이를 잡아먹는 신화에 나오는 뱀 귀신이 아닌가요? 개성적이네요.”
알리스가 라미아라는 이름의 유래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리이미아는 제법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머리를 기대며 알리스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잘 아네요?”
“알리스는 폭넓은 지식과 지혜를 두루 갖췄으니까.”
왜인지 캐롯이 끼어들어 우쭐거렸다. 그러자 알리스가 옥방울 굴러가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캐롯! 그렇게 따지면 나와 매번 같은 대회에서 마주친 너를 자찬하는 것처럼 들려.”
“그, 그건.”
“대회요?”
서준은 대체 어쩌다 알리스 같은 온화한 성품의 미인이 캐롯처럼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듯한 남자와 만났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이러한 호기심은 캠리나 리이미아, 심지어 뼛속까지 동성애자인 듯한 올리버까지 가진 듯했다. 물론 파우더로 만들어진 연인인 휴는 끝까지 올리버만을 주시했다. 화려한 팔찌를 찬 손이 캐롯의 둥그스름한 턱을 간지럽혔다.
“오, 정말 다양한 대회였죠. 스도쿠,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애너그램 같은 말장난 대회까지! 차라리 체스 대회에서나 만났으면 이렇게 긴 인연이 되지 않았을 텐데.”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이었다. 그 눈빛을 받은 캐롯의 눈동자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거슴츠레해졌다. 그는 황홀한 미주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그때, 몽타 배 애너그램 예선전에서 탈락하지 않은 게 내 평생 가장 잘한 짓이었어…….”
“애, 애너그램이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인 루이스 캐럴의 이름도 본명의 애너그램이죠.”
기웃거리던 올리버가 볼쏙 끼어들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그는 토사를 피해 뭉친 일행으로서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모양새였다. 서준은 그와 자신의 자리를 바꾸고픈 욕망이 샘솟았다.
“아, 귀여운 올리버. 이 작은 머리통으로 똑똑하기도 하지!”
물론 휴의 앞자리에 앉아 저런 찬사를 듣고픈 것도 아니었으므로 저들을 한데 뭉친 다음 한꺼번에 옮겨 버리고 싶었다. 알리스가 웃으며 화답했다. 미인의 웃음이란 효과가 대단했다.
“맞아요. 루이스 캐럴의 원래 이름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라고 하죠.”
“그러고 보니 여기 주인 이름도 찰스던데. 식당 이름도 앨리스라니 공교롭네요. 일부러 맞춰서 지었나?”
메뉴판을 뒤적거리던 서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는 어쩌다 생각난 걸 말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알리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더니 곧 먹구름이 낀 듯 흐려졌다. 그녀가 조리실 쪽을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여기가 찰스와 웬드릭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마련한 식당인가 봐요. 그래서 딸의 이름을 땄고요. 저에게 말하기를, 앨리스가 살아 있었다면 스물이 됐을 거라고 하더군요.”
낮은 속삭임에 테이블 근처가 잠시 숙연해졌다. 여러 사람이 전부 입을 다물자 바깥에서 후두두 쏟아지는 빗소리가 유독 선명해졌다. 새삼스레 서늘하게 느껴지는 기온에 서준은 어깨를 떨었다.
“여러분, 다시 전화를 해 봤는데 비 때문에 무너진 흙을 치우는 게 조금 늦어진다고 합니다.”
그때 중후한 음성이 귀를 때렸다. 어느샌가 찰스가 조리실에서 나와 다가왔다. 마침 그의 이야기를 했던 일행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찰스는 친절하게 웃으며 큼직한 쟁반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커피와 핫케이크라도 드시죠. 우리 여왕님이 만든 앨리스의 간판 메뉴입니다.”
그는 두툼한 제빵 장갑을 낀 손으로 능숙하게 접시를 날랐다. 불편한 분위기를 일시에 날려 버리는 달콤한 향에 서준의 시선도 그곳으로 쏠렸다. 과연 간판 메뉴라고 자랑할 만했다.
푹신하게 쌓아 올린 동그란 핫케이크 위에 네모난 버터가 반쯤 녹아 흐르고 주변은 라즈베리로 장식됐다. 시럽 역시 새빨간 색으로 라즈베리 향을 풍겼다. 먹음직스러운 열기가 흘렀다. 진하게 내린 커피도 짝을 맞춘 듯 잘 어울렸다.
“물론, 서비스고요. 바깥이 추우니 따뜻하게 몸이라도 녹이시지요. 개업한 당시부터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재료와 레시피랍니다. 이 모든 노고를 감히 제 여왕님께 돌리는 바입니다.”
찰스의 너스레에 레스토랑의 손님이 모두 손뼉을 짝짝 쳤다. 손을 다친 서준도 공짜라는 말에 기꺼운 마음으로 손바닥을 혹사했다. 식당에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에 웬드릭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요. 늘 저런다니까!”
찰스는 누구 한 명 빠뜨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핫케이크 한 그릇과 커피 한 잔을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다시금 주문할 필요가 없어진 서준이 메뉴판을 멀찍이 밀었다. 찰스는 감상평을 기대하듯 테이블 옆에서 쟁반을 껴안고 서 있었다. 저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근본 모를 의무감이 들었다.
핫케이크는 포크의 옆면으로도 충분히 잘렸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핫케이크에 시럽을 가득 묻히고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혓바닥에 달짝지근하게 달라붙는 맛은 그 향과 생김새만큼이나 훌륭했다.
맛있다며 속으로 연신 감탄하던 서준은 핫케이크를 몽땅 배에 집어넣고 커피를 홀짝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사람이라고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리스도 만족스러운 듯 볼이 불룩해졌고 캐롯도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올리버는 숫제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리이미아와 캠리도 탄식을 터뜨렸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렸다.
“세상에, 캠리. 이 라즈베리 알갱이를 봐. 이 시럽, 필리 에프가 올린 그거잖아.”
“진짜네! 맙소사, 정말 맛있다. 과연 필리 에프야.”
“어, 잠깐. 캠리. 잠깐만…….”
말을 하던 리이미아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녀는 느릿하게 핫케이크를 씹었다. 그건 맛을 보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서준도 리이미아가 느낀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의 찰스를 지나쳐 조리실의 웬드릭을 불렀다.
“웬드릭? 이거 정말 가게 창업할 때부터 이어진 레시피가 맞습니까?”
“남편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요. 늘 저런다니까!”
웬드릭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기이함을 느끼기도 전에 세상이 기울어졌다.
“어…….”
쿵, 하며 얼굴에 얼얼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니다. 세상이 아니라 서준이 엎어진 것이었다.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점차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찰스가 장갑을 벗는 광경이었다.
제빵 장갑을 벗은 그의 손에는 손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