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29)화 (129/156)

#128

“아…….”

별 뜻 없이 붕대를 감은 손을 내밀던 올리버가 주저하듯 손가락 끝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의 머뭇거림은 얇은 장갑을 보자 일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대신 작은 눈이 가늘어지며 경계심을 띠었다. 올리버의 속내가 너무나 투명해 서준은 삐져나오려는 코웃음을 겨우 삼켰다. 찔끔 생겨났던 친근감이 풍선 쪼그라들듯 훅 빠져나갔다.

안경을 써 더더욱 조그마해진 연녹색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긴장한 듯 오므린 입술에서 힘이 빠진 건 서준에게 동행인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였다. 그는 한결 안도한 낯빛으로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제가 정신없이 굴었네요….”

올리버가 머쓱하다는 듯이 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가느다란 모발에 정전기가 일어 머리카락이 부숭부숭하게 들떴다. 서준은 어깨를 가볍게 추어올렸다.

“뭐, 별거 아니니까요.”

별거였다. 악마가 홈쇼핑을 운영하고, 심지어 올리버가 고객이기까지 한 상황이 어떻게 별게 아니겠는가? 그저 당장 악마가 만든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 손톱을 뽑는 인간 앞에서 소금물을 뿌리느니 모르는 척 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따름이다. 적어도 악마의 내기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서준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올리버와 휴가 앉은 테이블에서 벗어나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불행히도 리이미아와 캠리, 알리스가 밝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의 다채로운 이야깃거리와 쉴 새 없이 바뀌는 주제에 화장실에서 맛보았던 것보다 더한 공포가 밀려왔다. 모든 짐이 테이블 안쪽에 있어 쉬이 자리를 옮기지도 못했다. 그는 구시렁거리며 게처럼 옆으로 걸었다. 당장 지갑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박은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얼이 빠졌었군. 지갑까지 놔두고.’

다행히 그의 전 재산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아무리 어영부영 흐른 인생이라 한들 계속 이래서야 곤란했다. 서준은 한쪽 눈이나마 힘을 주어 부릅떴다. 그는 부디 자매처럼 닮은 리이미아와 캠리,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알리스가 자신을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쯤으로 인식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러한 행운이 저에게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은… 하며 기대했다.

“아, 서준. 왔어요?”

헛수고였다. 누구와는 달리 안구가 두 쪽 다 멀쩡한 캠리가 가장 먼저 아는 체를 해 왔다.

“세상에, 흠뻑 젖었네요. 바깥에 나갔다 오기라도 했나요? 참, 손수건 빌려드릴게요. 이걸로 닦아요.”

그녀는 가방에서 색이 화려한 손수건을 꺼냈다. 질감이 얇고 매끄러운 것을 보아하니 스카프 같았다. 제법 값이 나가 보여 넙죽 받아 들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서준의 마음을 알아챈 캠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편하게 써요.”

“아, 고맙습니다.”

캠리의 정확한 나이대는 알지 못해 막연하게 또래가 아닐까 했지만, 차려입은 옷차림이나 표정이 차분하고 음전해 생김새보다 몇 살은 더 연상으로 느껴졌다. 반면 그녀와 거의 똑같이 생긴 리이미아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철부지처럼 행세했다. 지금도 그렇다. 캠리가 손수건을 꺼내자 마치 경쟁하듯 리이미아도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녀가 꺼낸 손수건은 캠리의 것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화사했다.

“캠리, 그거 아끼는 거잖아. 이봐, 당신. 이거 써.”

옷 취향은 달라도 손수건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의 기호는 비슷한 걸까? 애초에 이들은 어떤 관계일까…. 불쑥 내민 손수건은 같은 브랜드인 양 무척이나 흡사했다. 그러나 그것을 내민 두 손에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캠리의 손이 유별난 곳 없이 부드럽다면 리이미아는 손의 마디마디가 두드러지고 손가락이 더 길쭉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우윳빛 감도는 유색 손톱이 아닌 반짝거리는 큐빅과 젤이 붙어 있었다.

서준은 새삼스럽게 이들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정말로 자매인 걸까? 그래서 유독 친근하게 구는 걸까? 단 한 번도 형제가 있던 적이 없는 서준으로서는 영영 알지 못할 인연이었다.

“아, 이거?”

서준의 시선을 알아차린 리이미아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레스토랑의 조명을 받은 큐빅이 반짝거렸다.

“예쁘지? 인조 손톱이야. 캠리도 화이트 스타에 처음 계정을 만들었을 때는 이런 걸 자주 했는데. 요즘은 왜 안 해?”

리이미아가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며 캠리를 흘겨보았다. 캠리는 그저 눈썹 끝을 내리고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눈앞이 새하얗게 가려졌다.

“억!”

혼비백산하며 얼굴을 덮은 것을 끌어 내리자 보들보들한 감촉이 허우적거리던 손에 걸렸다. 흰 수건이었다. 당황하며 그것을 망연히 내려다보자 턱에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잡히도록 얼굴을 잔뜩 찌푸린 캐롯이 엄하게 말했다.

“닦으려면 수건으로 닦아야지.”

어찌나 기세가 험한지 서준은 순간 그가 자신을 다그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얇은 손수건에 비하면 캐롯이 던진 수건은 도독하니 폭신했다. 심지어 섬유 유연제의 향긋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어어, 고맙습니다…….”

서준은 그의 스포츠 백을 곁눈질하며 대꾸했다. 보드라운 수건으로 얼굴을 문대자 캠리가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치웠다. 리이미아만이 톡 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위험하잖아! 식탁 위에 음식이 있는데 갑자기 수건을 던지는 건 무슨 경우야?”

캐롯은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가 알리스가 그의 팔뚝을 찰싹 치자 뒤늦게 어물거리며 사과했다. 물기를 대강 닦은 서준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과연 리이미아의 앞에는 감자튀김이 서너 개 남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더불어 얼음만 남은 유리컵도 포함해서. 캠리의 접시에 남은 햄버거 조각이 아니었다면 리이미아는 감자튀김만 시킨 줄 알았을 정도였다.

‘내가 먹은 게 먹은 게 아니야.’

갑작스럽게 허기가 몰려왔다. 주린 배가 더 많은 음식물을 요구하듯 위장을 쥐어짰다. 서준은 장기의 명령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위장에게 굴복한 패배자가 어쩔 수 없이 메뉴판을 끌어당겼다.

“더 시키게? 하긴, 말랐으니까.”

음료가 남지 않은 컵을 털어 얼음을 아작아작 깨물던 리이미아가 홀로 질문하고 홀로 이해했다. 요즘 들어 살집이 늘어난 서준은 머쓱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내렸다. 지독하리만치 길었던 그 밤이 지나고 그를 괴롭히던 수많은 병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역시나 스트레스야말로 만병의 원인이었다.

서준은 괜히 제 팔뚝을 힐끔거렸다. 나름대로 근육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캐롯이었다. 그는 혼자 잘난 듯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랑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남자란 모름지기 근육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도 중요하고 말이야. 그렇지, 알리스?”

“귀엽게 굴기는…. 캐롯, 중요한 건 단백질만이 아니야.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거지.”

‘직업이 헬스 트레이넌가?’

서준이 속으로 질겁하는 사이 알리스가 캐롯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캐롯의 표정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자신 있어 하더니 아무래도 안면 근육은 영 힘을 못 쓰는 듯했다.

“알리스의 말은 전부 옳아. 그래도 역시 이것 덕분에 내 몸이 한결 더 튼튼해진 건 분명해.”

캐롯은 콧김을 뿜으며 흰 파우더 통을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려놓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꽝 소리가 다 났다. 캐롯 왈 단백질 파우더였다. 하지만 상표가 따로 없는 새하얀 통을 보자 서준은 헛기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저게 공장제는 맞나? 알고 보면 악마의 홈쇼핑에서 산 거 아니야?’

으레 공장제라 하면 수제보다 질이 떨어지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악마가 버젓이 홈쇼핑에서 팔아 대는 물건을 보고 나자 FDA에서 허가를 내린 제품이면 뭔들 어떠냐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파우더를 본 리이미아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캠리의 팔뚝을 붙잡고는 어깨 위로 턱을 올려놓았다.

“웬 파우더예요, 알리스? 아, 우리도 예전에 저런 거 팔았던 적 있거든요. 반가워서 그래요. 그렇지. 캠리?”

“으응, 그랬지. 너랑 내가 같은 데서 물건 받아서 그랬었지.”

“웬일이야, 오랜만이다. 미묘하게 친근감도 들고? 그래도 요즘은 파우더가 아니라 비타민이 유행이에요. 파우더는 한물 지났지. 그 필리 에프조차 비타민을 판다니까?”

리이미아가 가방에서 꺼낸 비타민 통을 잘각잘각 흔들었다. 캐롯의 단백질 파우더와 달리 색이 어두운 통이라 속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푸념하듯 몇 마디를 더 늘어놓았다.

“아아, 필리 에프가 소속된 클럽에도 들고 싶은데. 그렇지, 그래서 나랑 캠리는 이번에 필리 에프가 갔던 흉가에 가 보기로 했거든요? 왜, 패션-스타 엠도 거기 갔다가 구독자 앞자리 단위 수가 바뀌었잖아요.”

“패션 스타요?”

“패션-스타라는 건 화이트 스타에서 패션 태그로 유명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 옷을 잘 입고, 옷과 관련한 유행을 선도하는 인플루언서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워요. 저는, 음,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이도 저도 아니지만요.”

캠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준에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서준보다 더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알리스였다. 그녀는 아이스티가 묻어 촉촉한 입술을 닦은 뒤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필리 에프가 대체 누구예요? 아까부터 종종 말하던데.”

이 질문에는 점잖게 앉아 있던 캠리조차 놀라 머리를 휙 돌렸다. 덕분에 그녀의 머리채에 리이미아가 눈을 맞았다.

“악!”

리이미아가 새된 비명을 질렀으나 캠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알리스를 향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필리 에프를 몰라요? 정말요?”

“어, 음. 예. 그런 편이죠.”

열기가 느껴지는 눈망울이 부담스러워 알리스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캠리와 리이미아는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대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맙소사, 정말 필리 에프를 모른다고요? 농담이죠? 필리 에프는 지금 가장 핫하고, 쿨하고, 프레시한 채식주의자예요.”

“그러면서도 늘 세련되고, 늘 새로운 걸 찾아내죠. 그녀는 결코 3년 이상 유통된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요. 언제나 새로운 걸 발굴해 선도하죠. 말하자면 우리의 선구자이자 선지자라고나 할까요?”

서준은 필리 에프의 온도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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