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등을 꺼 놓아 어두운 방엔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평소 정돈을 하지 않는지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꼬락서니가 마치 제 방과 비슷해 동질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당장 서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너저분한 방이 아니라, 유일한 광원이었다. 직사각형의 화면에서 깊은 바닷속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부드럽게 말린 황갈색 머리카락이 구름처럼 가벼이 흔들리고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흰 치아가 언뜻 보였다. 완연히 성숙한 어른의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이 분명했다. 동시에 서준은 저 삼백안에 가까운 눈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저토록 가식적인 미소로 꾸민 낯은 초면이었지만 도우드가 자랐다면 꼭 저런 얼굴이었으리라. 하지만 저 여자는 도우드일 리가 없었다.
TV 화면 속에서 방긋방긋 웃는 여자는 악마에게 영혼이 붙들린 소녀가 아니라 도우드인 체 굴던 잡귀였다. 토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바로 그 증거였다. 악마의 곁에는 대머리에 가까운 바싹 마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양 볼이 쑥 들어가고 광대뼈가 불거져 해골 위에 가죽을 한 겹 씌운 듯 흉한 몰골이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는데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 더더욱 기괴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만담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떤 제품을 홍보했다.
새하얀 파우더 가루가 다진 돼지고기와 오일, 소금, 낡은 종이 쪼가리, 그리고 뜨거운 물과 뒤섞였다. 연이어 비명이 울렸다. 해리라고 불린, 해골이나 다름없는 외양의 남자가 처절하게 내지른 울음소리는 단말마와 비슷해서 서준은 그가 죽어 자빠진 게 아닌가 의혹이 들었다. 하지만 해리는 손톱이 두어 장 빠진 손을 부여잡고 서글피 흐느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그의 새끼손톱이 수상쩍은 반죽에 퐁당 빠졌다.
악마는 거칠게 뽑아낸 손톱을 무슨 크리스마스트리의 별, 혹은 생일 케이크의 초처럼 신경 써 장식했다. 해리는 이제 괴롭다고, 더는 싫다며 울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덧붙였다.
“참, 여러 번 문의가 들어오네요. 시청자 여러분! 교환, 환불 문의는 아래의 번호로 연락해 주세요. 하지만 유념하세요. 주의 사항을 지키지 않은 경우에 결코 저희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