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27)화 (127/156)

#126

하필 손을 뻗은 탓에 팔꿈치가 테이블에 꽝 부딪혔다. 그러잖아도 살이며 근육량이 적은 부분인지라 뼈를 쪼개는 듯한 통증이 얼얼하게 팔을 타고 올라왔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고개를 들자 근육 덩어리가 올리버의 가녀린 목을 붙잡고 짤짤 흔들어 대는 중이었다. 알통이 도드라진 두꺼운 팔뚝이 몹시 위협적이었다. 원체 나쁘던 안색이 더더욱 파리해졌다. 올리버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그, 그러니까 오해라고요!”

“오해? 내가 잘못 봤다는 거야, 어!”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변명해도 듣는 사람이 귀를 꽉 막고 있으니 별 소용이 없었다. 올리버가 달랑달랑 흔들리는 발로 간신히 바닥을 디디며 울먹거렸다.

“보기는, 보기는 했지만 팔찌! 팔찌가 멋져서 그랬던 거예요. 절대로 다른 마음을 품은 게 아니었어요!”

“그럼 본 게 맞잖아!”

남자는 막무가내로 말을 내뱉으며 거칠게 콧김을 뿜었다. 마치 증기 기관차가 뱉어 내는 수증기처럼 힘찼다. 서준은 지성이 개미 오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 대신 그와 동행이었던 여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올리버를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직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식당 주인이 제 부인과 꼭 껴안고 냉장고 뒤에 숨은 모습만 발견했을 뿐이다.

서준은 그들 부부에게 미약한 동정심이 샘솟았다. 마음속에서 첨예한 갈등이 일어났다. 올리버를 도와야 할까? 당연히 그가 한 손 거들어도 현실적으로는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팔랑개비처럼 흔들리는 올리버 곁에서 함께 펄럭거리기나 할까. 서준은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동정이 용기로 진화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혀를 차며 엉덩이를 뒤로 슬슬 빼는데 리이미아와 캠리의 눈빛이 이상했다. 그들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더니 똑같이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등받이가 들썩거리던 걸 불편한 표정으로 볼 때는 언제고 대단히 신속한 손길이었다. 두 대의 휴대 전화가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탱크톱을 입은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목청을 높였다.

“다들 말로는 그러더라고. 잘 들어, 알리스는 그런 시선이 신물 난다고 했어!”

“흐으어억.”

캠리와 리이미아가 가로로 든 화면 속에서 올리버는 탈수당하는 수건처럼 탈탈 털렸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과장된 움직임 덕에 흡사 공연을 보여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올리버!”

화면 비율 4:3의 공간에서 휴는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등장했다. 왼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는 정말로 가공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콧대가 우아한 미남은 화를 내는 얼굴조차 수려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말 예의가 없군요!”

휴는 올리버를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 탓에 정돈된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지고 정장 상의에 크게 주름이 잡혔다. 올리버는 자신을 구원한 휴의 등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무대가 아니었고, 근육 덩어리도 말 몇 마디로 물러나는 두뇌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예의? 그래, 말 잘했다. 예의 찾는 놈이 눈깔을 그렇게 이리저리 굴려 대?”

그는 씨근덕거리며 휴의 가슴팍을 크게 쳤다. 휴는 키가 크고 늘씬한 미남자였으나 체구가 남다르게 건장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휴와 올리버가 한데 엉겨 쓰러졌다. 문제는 그들이 다투는 위치가 의도치 않게 서준과 캠리, 리이미아가 아울러 사용하는 테이블과 너무나 가까웠다는 점이다.

비명이 겹치고, 곰 인형은 휙 날아가고, 뚜껑이 열린 통이 구르고, 캠리가 엎어지고, 오렌지 주스를 담은 잔이 쓰러지고,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서준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밀린 테이블이 그의 배를 들이박았다. 끄억… 하는 볼품없는 신음이 폐 속에 있던 공기와 함께 튀어나왔다.

“어, 어어…….”

근육 덩어리도 이렇게까지 큰 참사를 원하지는 않았는지 당황스러워했다. 캠리와 한 몸처럼 얽혀 있던 리이미아가 테이블에 박아 시뻘게진 이마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는 남몰래 촬영하던 사실은 쏙 숨기고 피해자처럼 굴었다. 하지만 리이미아가 근육 덩어리에게 더 대거리하기도 전에 총알처럼 잽싸게 튀어 나간 사람이 있었다. 올리버였다.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간 그는 의자 위에 놓여 있던 큼직한 스포츠 백을 들어 던졌다.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아 속에 들어 있던 파우더 통이 죄 쏟아진 건 말할 것도 없다.

난데없이 제 물건에 얻어맞은 근육 덩어리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처지에서는 별 간지럽지도 않은 타격이었으나 올리버가 보인 반응 자체가 그토록 놀라웠다. 올리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스포츠 백을 바닥에 내팽개치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눈빛이 흉흉했다. 그는 허우적거리는 휴를 끌어안더니 매섭게 소리쳤다.

“잘 들어. 휴는 몸이 약해! 약하다고! 소중히 아껴 줘야 한단 말이야!”

올리버의 으름장에 식당 주인 부부를 비롯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근육 덩어리는 얼이 빠졌고, 휴는 올리버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으며, 리이미아와 캠리는 은근히 재촬영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서준은 여전히 테이블과 의자 사이에 끼어 눌려 있었다. 그는 슬슬 숨 쉬는 게 불편해졌다.

속으로 어떤 꿍꿍이를 품었건 서로 눈치를 보는 와중에 레스토랑의 문이 열렸다. 근육 덩어리의 일행이자 신묘할 정도로 어여쁜 알리스였다.

“캐롯,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비에 젖은 머리를 털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

“미안해요. 캐롯, 너도 얼른 사과해. 이게 대체 무슨 난동이야?”

“미안합니다.”

캐롯은 이름 그대로 홍당무처럼 변한 뒤 앵무새처럼 중얼거렸다. 알리스는 다혈질인 캐롯과는 달리 말이 통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캐롯도 그녀가 돌아오자 지능이 상승했다.

“차에서 잠깐 숄 좀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그사이에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다니 내가 못 살아.”

엄지로 이마를 문지르던 알리스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올리버에게 내밀었다.

“정말 미안해요. 가끔 안 좋은 일이 몇 번 있었더니 그 후로 조금, 공격적으로 굴어요. 혹시 병원 가야 할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해 줘요.”

“아, 아닙니다.”

다시 간이 소박해진 올리버는 알리스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명함을 두 손으로 고이 받았다. 뒤에서 기웃거리던 리이미아가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알리스는 휴에게도 명함을 내밀었지만, 그는 멀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올리버가 허둥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제가 받았으니까 괜찮아요. 우, 우리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아아…….”

알리스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손으로 가렸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캐롯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서준이 생각하기에 그는 단순히 알리스가 돌아와 사과할 마음이 생긴 게 아니라 휴와 올리버의 사이를 뒤늦게 눈치챈 탓이 커 보였다.

알리스는 서준과 리이미아, 캠리를 향해서도 잘못했다며 인사를 해 왔다. 캐롯의 민폐가 워낙 다수를 향해 어쩔 수 없었다.

“그쪽도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솔직히 서준도 그녀의 명함이 궁금했으나 막상 그가 입은 피해는 워낙 자질구레해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기는 영 부족한 감이 있었다. 숄을 어깨에 두른 알리스가 캐롯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일어나, 캐롯. 찰스에게도 사과하러 가야겠어. 비가 아까보다 많이 쏟아져서 여기 몇 시간이나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캐롯이 어영부영 알리스를 따라 일어났다.

“바깥에 비가 그렇게 많이 오나요?”

캠리가 눈썹을 찌푸리고는 물어보았다. 하지만 알리스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캠리의 질문에 답하듯 빗방울이 맹렬히 쏟아지며 레스토랑의 유리 벽을 사납게 두드렸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매서운 폭우로 변해 있었다. 리이미아가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아, 재미없어.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뭐람.”

“리이미아.”

캠리가 소곤거리며 리이미아의 이름을 불렀다. 용건이 있기보다는 타박하는 어조에 가까웠다.

“맞잖아? 우리 계획대로라면 벌써 도착했어야 하는데. 그리고 햄버거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리이미아가 가볍게 신경질을 부렸다. 서준은 한 몸처럼 껴안고 벌벌 떨던 부부를 떠올렸다. 아마 리이미아와 캠리가 주문한 요리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때 올리버가 작은 몸을 일으켰다.

“휴, 나도 잠깐 얼굴 좀 씻고 올게.”

한번 열이 오르면 잘 가라앉지 않는 체질인지 그의 낯은 여전히 울긋불긋했다. 휴가 다정하게 올리버의 손을 잡았다.

“나의 귀여운 올리버, 부디 조심해.”

“으응…….”

올리버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도대체 화장실에 얼마나 대단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

그리고 서준은 녹은 아이스크림에 젖어 축축해진 와플과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주스, 그리고 표면에 막이 생긴 양송이수프를 슬픈 눈으로 응시했다. 다시 데워 달라고 한들 풍미는 이미 날아갔으리라.

“아.”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와플을 먹어 보려고 팔을 내밀자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셔츠에 짙은 얼룩이 생겨 테이블과 닿을 때마다 끈적하게 달라붙고 다시 떨어지는 소리였다. 몽땅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오렌지 주스와 다시금 재회했으나 그리 기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로 향했다.

남자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마침 나오던 올리버와 부딪힐 뻔했다. 찬물로 세수를 여러 번 했는지 얼굴에서 찬기가 흐르고 속눈썹에는 물방울이 매달려 어룽거렸다.

“미, 미안해요.”

습관처럼 사과를 내뱉은 올리버가 후다닥 지나갔다. 서준은 잔뜩 굽어진 등을 한번 흘낏 보고는 세면대로 걸어갔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옷자락을 몇 번 조물조물하자 다행히 끈기는 금방 사라졌다. 다만 얇은 뱃가죽에 축축하게 젖은 천이 닿아 소름이 다 돋았다.

문득 그는 거울을 보았다. 젖은 옷을 입은 창백한 외눈박이가 지친 얼굴을 한 채 서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 밑이 벌건 것이 무척 노곤해 보였다.

“후…….”

왼손으로 얼굴을 쓸자 희미한 고무 냄새가 났다. 차라리 올리버처럼 냉수에 시원하게 머리를 처박으면 이런 피로감이 날아갈까? 머릿속이 멍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장갑을 대강 벗어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박은 뒤 거즈를 붙인 오른손이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리고 막 안대 줄에 손가락을 걸었을 때였다. 세면대 왼쪽에 무언가 있었다. 무심코 손이 움직여 그것을 잡았다. 두꺼운 안경이었다. 귓구멍으로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내일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피라이프 제품을 소개해 드리는 친구 개리입니다. 채널, 고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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