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26)화 (126/156)

#125

‘그러고 보니 플로렌스가 하는 SNS도 화이트 스타였나?’

길버트와 헤어진 후 플로렌스는 종종 어떤 사진이 잘 나왔느냐며 골라 보라고 말을 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제성을 몰고 다니는 유명 인사와 친분을 다지는 것에는 썩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플로렌스의 주요 관심사는 제 사진이 얼마나 잘 나왔는지였다. 서준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사이버 세상은 나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거든요.”

검색 한번 잘못 했다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말아먹은 장본인이 할 법한 발언이었으나 낯선 사람이 듣기에는 썩 온당하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마치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주절거리는 서준을 보며 리이미아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곧 독 오른 두꺼비처럼 투지가 만만하던 얼굴에 김이 샌 듯 느슨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을 한 장 쑥 뽑아 만지작거리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도, 캠리도 모른다?”

“뭐, 통성명하고 안면을 트긴 했으니 영 모른다고 하기는 좀…….”

인사를 나눈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너무 야박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서준의 떨떠름한 시선을 알아차린 리이미아가 냅킨을 가로로 쭉 찢었다. 그녀의 눈빛은 흡사 원시인을 바라보는 듯했다.

“아, 아예 화이트 스타 안 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필리 에프는? 필리 에프도 몰라? 어셔는?”

“필리 에프?”

무심코 긍정하려던 서준의 목구멍이 막혔다. 최근 귀에 자주 들어오는 이름이었다. 그가 머뭇거리자 화려하게 꾸민 손톱이 냅킨을 조각조각 뜯었다.

“아아, 됐어. 됐어. 이런 시골 촌뜨기랑 내가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촌뜨기는 부정도 못 하고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숨 막히는 정적이 그들 사이를 가득 채웠다. 사실 불편한 건 서준만이었고 리이미아는 휴대 전화를 꺼내 신묘한 속도로 화면을 두드렸다.

“왜 여기도 안 터져?”

하지만 먹통이기는 바깥이나 안쪽이나 마찬가지인지 그녀가 테이블 아래쪽에서 발을 크게 굴렀다. 진동이 전해졌는지 올리버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슬슬 리이미아에게 다른 수많은 빈자리의 존재를 일깨워 줘야 하나 고민할 무렵 풍만한 몸집의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새하얀 조리복을 입은 여자였다. 붉은 기가 감도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묶고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려 두꺼운 팔이 드러났다. 단단한 팔은 힘이 세 보였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이 서준을 보더니 활짝 미소 지었다.

“앨리스 특제 와플 세트와 양송이수프, 그리고 신선한 오렌지 주스 나왔습니다.”

넓은 흉통에서 짐작할 수 있는 괄괄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 든 넓은 쟁반에는 주문했던 음식이 한가득 얹혀 있었다.

“자, 자. 따뜻할 때 드셔야지. 안 그러면 식어서 맛이 다 빠질걸?”

그녀는 쟁반 위에 있던 그릇을 바지런한 손길로 테이블로 날랐다. 따뜻하게 김이 나는 요리가 하나하나 옮겨졌다. 그때 조리실에 있던 식당 주인이 크게 외쳤다.

“웬드릭, 당신의 솜씨는 늘 그렇듯 최고일 거야!”

“남편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요. 늘 저런다니까.”

“오오, 나의 여왕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조리복을 입은 여자, 웬드릭이 식당 주인이 그토록 자랑하던 밀가루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부인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 위명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빨간 왕관이 새겨진 흰 접시에는 캐러멜로 코팅해 윤기가 흐르는 와플이 담겨 있었다. 아이스크림 한 숟갈, 반질반질한 블루베리 한 줌을 올린 뒤 두 종류의 시럽을 교차하듯 뿌려 심미적인 면조차 놓치지 않았다. 걱정했던 양송이수프의 상태도 몹시 훌륭했다. 손잡이가 달린 오목한 그릇에 가득 담긴 수프는 걸쭉하니 훈기를 풍겼다. 마지막으로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였다. 컵 표면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물방울이 시각적인 기대감을 품게 했다.

서준은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양송이수프를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배 속이 허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위장이 조이듯 꾸르륵 볼품없는 소리가 나자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당장 집중해야 하는 곳에 신경을 쏟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웬드릭이 자리를 떠나기도 전에 리이미아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오렌지 주스를 가져가 버렸다. 장식물을 올리고 꾸덕꾸덕하게 굳힌 손톱이 컵 표면과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다.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쪽 빨아 마셨다. 힘찬 흡입 덕분일까? 주스의 절반이 눈 깜빡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서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이미아는 턱을 치켜들고는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획 가져가 긴 검지로 두 번 톡톡 건드렸다.

“이거 두 개 주세요. 음료는 둘 다 제로 콜라로. 아, 화이트 스타에 사진 올릴 거니까 특별히 더 신경 써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 앨리스의 특제 버거는 특별하다고요.”

웬드릭이 쾌활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등을 돌리자 리이미아가 유리컵을 서준의 앞으로 쭉 밀었다. 이미 절반이나 사라진 주스는 참으로 처량맞아 보였다.

“너무 달아. 이거 진짜 오렌지 과즙을 짠 게 아니라 설탕물에 오렌지 향을 2퍼센트 첨가한 게 확실해.”

“고작 성분을 알아보기 위해 마신 건가요? 내 주스를?”

대단하신 혓바닥이라고 감탄하며 리이미아가 물었던 빨대를 컵에서 꺼내자 어째서인지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뽐내는 표정을 지었다.

“흐흥, 캠리가 처음 화이트 스타에 올린 영상이 그런 거였거든. 성분표 안 보고 음식 성분 알아맞히기.”

“아, 예.”

“나도 올렸어.”

“아, 예…….”

서준은 양송이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 국밥처럼 속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위장이 뜨끈해지니 어깨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리이미아는 자신이 떠드는 이야기에 영 관심을 보이지 않자 언짢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호기롭게 다른 주제 거리를 끌고 왔다. 상체를 숙이고 불쑥 다가온 리이미아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늦게 와서 모르겠지만, 내 뒤에 앉은 남자 두 명 있잖아? 둘이 애인이야. 믿어져? 분명 저 안경잡이가 약점을 잡았거나……. 그럴 거라고.”

때마침 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리이미아의 주장을 증명하듯 올리버의 손등에 입을 쪽 맞췄다. 붕대로 꽁꽁 동여맨 손이라 맨살에 닿지는 않았으나 휴와 올리버 사이에서 흐르는 오묘한 분위기는 가려지지 못했다. 그리고 서준은 의자 등받이가 낮아 본의 아니게 그들의 표정을 모두 보게 되었다….

“귀여운 올리버,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 부디 기다려 줘.”

올리버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는 양 볼을 붉혔다. 혀가 썩어 들어갈 듯한 휴의 언행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는 괜히 주변을 흘깃거리고 안절부절못하더니 희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으응. 빨리 와야 해.”

올리버가 보채자 휴는 그의 팔을 부드럽게 쓸고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글쎄, 워낙 나오는 길이 길어서…. 올리버가 원했듯이, 말이야.”

‘뭔 소리야….’

그때 멀뚱멀뚱하게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서준의 시야에 빨대가 들어왔다. 대번에 그의 안색이 시커메졌다. 서준은 레스토랑에서 저따위 말을 들어야 하는 제 귀가 몹시 안쓰러워졌다. 반면 리이미아는 어쩐지 호승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휴를 쏘아보았다.

휴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교대하듯 손수건으로 손을 닦던 캠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익숙한 태도로 리이미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준은 멀뚱히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들어 봐, 캠리. 글쎄, 우리를 모른다는데?”

리이미아는 경멸과 업신여김 따위가 담긴 코웃음을 쳤다. 서준은 저토록 다양한 감정 표현이 고작 비소 한 번에 전부 담기는 재주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그래?”

캠리는 손수건을 접고는 아랫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미묘하게 짧은 정적 후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모를 수도 있지. 우리가 필리 에프처럼 유명한 건 아니잖아.”

또 같은 이름이 나왔다. 어지간히 저명한 인사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배우나 예능인 등 일반적인 연예인도 잘 알지 못했으므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캠리는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리이미아로부터 가방을 받았다. 리이미아와는 달리 꾸미지 않은 손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휴대 전화를 꺼냈다.

“아, 여기도 안 터지더라고.”

“정말? 여기 전파 상태가 그렇게 나쁜가?”

캠리가 혀를 차면서도 휴대 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리이미아가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휴지 조각을 손등으로 치운 뒤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고동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길게 늘어졌다.

“뭐 시켰어, 리이미아?”

“출출하니까 햄버거 세트 두 개.”

“제로 콜라?”

“제로 콜라.”

주거니 받거니 말하는 게 서로 몹시 익숙한 듯했다.

‘사람 수가 밀려.’

서준은 분명 자신이 잡은 자리인데도 불편함을 느끼며 조용히 와플을 잘라 먹었다. 그의 볼이 다람쥐처럼 불룩 솟아올랐다.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캠리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서준의 지갑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이거 피피페페 스몰라인 전기톱을 빼앗긴 피피 아니에요?”

“예?”

입 속에 든 걸 꿀꺽 삼키고 되묻자 캠리의 검지가 테이블을 두 번 톡톡 건드렸다.

“오랜만에 보네요. 피피페페 시리즈.”

“피피페페 시리즈? 뭐야, 그게.”

리이미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준도 흉악한 시리즈 명에 깜짝 놀랐다.

“페퍼로니 피자도 아니고 그 웃긴 이름은 뭔데?”

그녀는 제 가방에서 흰 통을 꺼내 뚜껑을 돌돌 돌리는 중이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 것이 비타민제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캠리는 리이미아의 질문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리이미아는 몰라? 왜, 우리 어렸을 때 유행했던 거. 지금도 애들은 좋아할 거야.”

“흐응.”

캠리가 기쁜 듯이 설명해도 리이미아는 기억이 짚이는 구석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점이 그녀의 난폭한 심성을 건드렸다. 리이미아가 뱀처럼 빠르게 서준의 지갑을 낚아채 곰 인형의 고리를 빼냈다.

“잠깐 볼게.”

“뭐?”

얌전히 배나 채우려 했던 서준도 기겁해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그때였다. 리이미아와 캠리가 앉은 의자 등받이가 크게 흔들렸다.

“네 눈깔이 알리스를 더럽게 쳐다보던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어!”

“오, 오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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