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23)화 (123/156)

#122

책상이 낮은 탓에 허리를 구부렸던 남자가 척추를 바로 세웠다. 그의 뒤로 창백한 불빛이 비쳤다. 열린 문 사이로 복도의 푸르스름한 빛이 번졌다. 내용물이야 피와 원한과 음모로 가득하지만 분위기만은 따스하고 온후한 코르푸스와 달리 카푸트는 기계적이고 도저히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요한은 오스가 사라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둥거리던 허수아비는 사라진 후였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낮은 목소리에서 섭섭함이 묻어났다. 이왕이면 뒤처리까지 그에게 맡기고 싶었기에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오래 붙잡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요한은 방긋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 그렇게 됐어요.”

그곳에는 옷을 대강 걸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고 이마에는 둥근 혹이 솟아 있었다. 뒤통수 역시 뜨끈뜨끈하게 열기를 발산했다. 코 근처에는 피가 흐르고 마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법사라고 적힌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배가 약간 보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쓰러진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납치범이자 진짜 마법사, 그리고 여섯 개의 발가락을 가진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으으음.”

기절한 남자의 복장과 자세에 지대한 지분이 있는 요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는 곤란한 듯이 콧등을 긁었다.

오스에게도 말했지만 몸수색을 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안구가 고통을 호소해 다시금 옷을 입혀 두었을 뿐이다. 남자가 입고 있던 흰 가운은 구석의 토사물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양말도 손수 신겨 주었다.

그런데도 만일 다른 사람이 납치범을 발견한다면 놀랄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굉장히 기상천외하고도 부적절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치범은 마치 몸부림치며 자위하는 듯한 신묘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그저 위생과 비위의 문제로 제 손을 쓰지 않았을 뿐인데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이상 성욕자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필사적인 노력이 폄하당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짓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납치범을 발등으로 밀어 방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남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얀 살덩이처럼 느껴졌다. 다시 매무새를 정리해 줄 의향이 눈곱만큼도 없던 요한은 남자에게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대신 여러 대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곤 화면 아래의 버튼을 딸깍딸깍 눌렀다.

“역시 이게 들켰나?”

새빨간 버튼에는 친절하게도 오픈 따위의 글씨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CCTV 상황실의 문을 여닫는 버튼인 줄 알고 열심히 연타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문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 버튼은 이곳의 문을 열고 닫는 게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납치범을 조사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한 거짓말은 더욱더 이기적이었다. CCTV 상황실에는 재판장의 문을 여는 버튼이 있었다.

요한은 앉은자리에서 마대 자루를 뒤집어쓴 청년을 내보내 줄 수 있었던 셈이다.

그가 온갖 고생을 하지 않아도 탈출하도록 도와줄 방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러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믿고 오스를 방출한단 말인가? 오스가 혼자 사라진다면 자신은 영영 이곳에 갇혀 서준을 만나지도 못하고 죽어 갈 터였다. 생각만 해도 코가 매워지고 맑은 안구에는 습기가 고였다. 요한은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하고 영문 모를 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그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당시에는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였다. 공감 능력이 타인보다 아주 살짝 미흡한 요한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남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모르는 남자는 머리통이 앞뒤로 깨져서는 죽어 가고, 시퍼런 빛을 내뿜는 모니터 화면에서는 시체가 수두룩하게 쌓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둔해진 골통으로 생각하니 영락없이 누군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좁고 어두컴컴한 방을 두서없이 돌아다니자 천천히 기억이 되돌아왔다. 매섭게 울리던 클랙슨 소리와 쿠웅, 하던 뇌까지 흔들리는 강한 충격. 가슴팍을 거세게 조이던 안전벨트…….

돌아올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던 목소리, 그리고 죄를 갚으라던 목소리.

형형한 불빛을 받아 시푸르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가엾은 몰골의 납치범을 향했다. 요한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는 제 윗옷을 훌렁 들어 올려 가슴팍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퍼런 멍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반면 납치범의 상복부는 광어 뱃살처럼 새하얬다. 큼직한 손이 웃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다시 내렸다.

역시나 납치범은 추돌 사고라는 대담한 범죄를 저지른 주제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것이다. 그 탓에 요한을 끌고 오는 데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저 혼자 쓰러졌다.

“역시 차를 탈 때는 안전벨트를 꼭 매야 해.”

금색 머리통이 저 혼자 주억거렸다. 그는 교통 법규를 열심히 지킨 스스로를 자찬했다.

하지만 칭찬도 잠시였다. CCTV 상황실의 문은 견고해 아무리 노력해도 쉬이 열리지 않았다. 제법 느긋하던 요한의 마음도 점차 다급해졌다. 당장 지금도 서준은 행복하게 여행을 즐길 터였다. 아무리 운명적인 만남을 소원한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란 얼굴을 비치지 않으면 점점 소원해지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통탄할 만한 사실이지만 그들은 현재 사귀는 사이조차 아니었다.

요한은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문에 일단 숫자를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입력해 보았고, 열리지 않았다. 이후로 멍청한 도전과 참담한 결과가 잇따랐다.

“음…….”

혹 액션 영화에서처럼 덕트로 이동해 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어깨를 잘라 내고도 덜어 낼 부분이 많아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걸 어쩌나 싶던 와중 화면에 비치던 허수아비 같은 몰골의 사람이 혼자 벌떡 일어났다. 요한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간 건 일견 당연했다.

정적이던 화면에서 혼자 폴짝거리고 덜걱거리고 벌떡거리는 광경은 몹시 생생했다. 심지어 CCTV의 렌즈 탓인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남자는 키가 줄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처럼 기묘하게 역동적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가 더없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알아차렸다. 어쩌면 저 남자 역시 납치당했을지도 모른다…….

귓가에서 찬송가가 들리는 듯했다. 요한은 기꺼운 마음으로 저 허수아비를 이용하고자 결심했다. 당장 상황실을 뒤졌을 때 이렇다 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온 얼굴의 근육을 사용해 활짝 웃은 요한이 마이크를 붙잡았다.

“잠은 다 잤어?”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이후로는 제법 손발이 맞았다. 오스는 엉뚱한 구석이 있었지만 게으름을 부리거나 요령을 피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장 목숨이 걸려 있으니 그런 듯했다. 요한도 독가스 버튼과 수면 가스 버튼을 누를 일이 없어 만족스러웠다. 손으로 쓰는지 발로 쓰는지 모를 글자는 해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쯤이야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오스가 재판장에서 충분한 자료를 긁어모으자 요한은 다른 곳도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한 수순으로 뒷문을 개방했다. 생각해 보면 오스는 이때부터 요한을 의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요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CCTV 상황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오스가 더 노력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틀리지도 않았다. 허수아비 청년은 훌륭하게 정보를 끌어모아 올바른 비밀번호를 손에 넣었다. 따라서 요한은 그를 위해 앞문을 열어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사이가 되었다고 자부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요한이 새까만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곧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잘 알았다.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요한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납치범 근처에 쪼그려 앉았다.

“사실 나는 당신이 들개든, 들개라고 착각하는 S든, S라고 착각하는 들개든, 아니면 정말 투명 인간과는 관련 없는 쾌락 살인마든 상관없어요. 그 일기……. 그것도 진짜 연구소에서 시달리던 피험자들이 썼는지, 아니면 당신이 준비한 가짜인지 구분할 방법도 없고요. 에이미가 정말 죽었는지, 탈출했는지, 아니면 태풍이 데려갔는지도 나야 모르죠. 당신은 무죄를 증명하라고 했지만, 글쎄요. 당신이 원한 게 정말 그게 맞긴 한가?”

에이미의 진실을 알아낸 게 과연 오스와 자신밖에 없었을까? 저 숱한 시신 중 아무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요한은 쓰러진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사포로 문지른 듯이 칼칼하던 목소리에 녹아 있던 원한은 속죄 정도로 만족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바짝 숙여 납치범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여기 놔두고 가는 걸 이해하세요. 따로 신고는 안 할게요.”

요한이 신고하지 않는 건 그저 서준을 쫓기 바빠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지만 그는 제가 대단한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굴었다.

개운한 발걸음이 밝은 복도를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비록 음울한 빛일지언정 어둠보다는 나았다. 물론 요한은 자연광이 시력에 가장 좋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잠시나마 갇혀 있던 방을 돌아보았다.

“응?”

반쯤 열린 CCTV 상황실의 문에 웬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갱지인 듯 표면이 거칠고 색이 어두웠다.

“연구소 폐쇄 공문? 오….”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카푸트에도 기념품으로 삼을 만한 물건이 전혀 없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공문을 접어 제 주머니에 홀랑 집어넣었다. 투명 인간이 있었다는 증거물이 생겨서일까? 손과 발에 따뜻하게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요한은 길고 긴 복도를 걸으며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구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길은 한쪽으로만 나 있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체가 가득 찬 방을 지나고, 구두가 한가득 진열된 방을 지나고, 잘린 손이 전시된 방을 지나고, 마침내 묵직하고 차가운 문을 밀어 내며 ‘카푸트 하우스’를 빠져나왔다.

‘카푸트 하우스’는 목가적인 ‘코르푸스 하우스’와는 여러모로 다른 곳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없는 숲속에 덩그러니 놓인 소박한 직사각형 상자. 무섭도록 고요하고 후미진 곳에 가만히 숨어 있는 덫……. 요한은 잠시 쓸쓸한 표정으로 시적인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도 종종 문학적이 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카푸트 앞의 공터를 본 순간 요한의 얼굴에서 애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눈을 비비며 현실을 부정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요한을 서준에게 데려다줄 노란 장난감 같은 차는 반파되어 찌그러졌다.

그는 양 뺨을 붙잡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안 돼애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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