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였다. 문은 수월하게 열렸다. 반쯤 무너진 천장에서는 흐릿한 햇살이 들어왔고 부연 먼지가 희게 떠다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나뭇가지가 빠드득거리며 운동화 밑창에 밟혔다. 소음은 오직 그뿐이었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서랍 없는 책상, 그리고 등받이 의자로 구성된 단출한 방은 몹시 적막했다. 마치 멸망한 세상에 발을 들인 듯 쓸쓸한 기분이 드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숨을 한번 들이마시자 이러한 애상적 소견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사방팔방이 먼지투성이에 흙을 비롯해 온갖 자잘한 돌멩이나 연유 모를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마대 자루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퀴퀴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정체는 빗물이 고여 썩은 웅덩이인 듯했다. 서준은 가능한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저기 배를 까뒤집고 둥둥 떠다니는 곤충의 종류는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는 다리를 겅중겅중 움직였다. 문을 연 것은 일종의 충동이었으나, 행동하게 만드는 건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저것 때문이었다.
베개 밑에서 끄트머리를 살며시 내보이고, 슬쩍 흔들리는 종잇조각.
침대 위에는 얇은 천으로 싸인 매트리스와 솜이 터진 베개가 덜렁 놓여 있었다. 이불보는 어째서인지 코 푼 휴지처럼 구겨져 방구석에 처박혔다. 침대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탓에 기울어졌는데, 베개가 용케 침상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절묘한 각도 탓인지, 아니면 먼지에 젖어 끈적해진 탓인지…….
사소한 호기심이야 들었지만 그깟 궁금증이 전부였다면 직접 손을 대 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베개 밑에서 팔락거리는 종잇조각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나아가려는 발을 붙드는 마음의 이름이 이성이라면, 자꾸만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육감이라고 부르는 걸까?
결국 서준은 한달음에 침대로 달려가 베개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마대 자루에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쥐어졌다. 종잇조각은 노트에서 찢어 낸 듯 윗부분이 특히 너덜너덜했다. 종이가 무너진 지붕과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빗물과 바람에 멀쩡할 수 있었던 건 우연에 불과했다. 침대가 멀쩡하던 시절에는 베개가 쿠션 역할을 했을 것이고, 기울어진 후에는 비죽 빠져나온 위치가 요행히 천장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니.
교묘하고도 공교로운 우연은 마치 필연처럼 느껴져 등줄기가 선뜩해졌다.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뭔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도 아니고……. 사춘기 청소년 나이는 진작 벗어났는데 망상도 작작 해야지.’
갑작스레 당한 납치와 감금에 무슨 필연적 곡절이 있으며 운명적 만남이 있겠는가? 서준은 자신이 왜 납치당했는지 대강 이유를 알았다. S가 투명 인간의 저택을 벗어나면 하겠노라 주절거리던 외양이 하필 저를 쏙 빼닮은 탓이다. 더 자세히는 그때 그 길을 지나갔다는, 정말이지 하잘것없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발가락도 수술할 거야.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발가락 다섯 개로 살아 볼 거라고. 도대체 여기 연구원이라는 놈들은 태어난 본연의 몸으로 투명해져야 한다는 게 미친 소리라는 걸 언제쯤 깨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