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17)화 (117/156)

#116

마법사의 느물대는 지시에 서준의 뺨이 굳었다. 지금처럼 마대 자루로 얼굴을 가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있었어도 이번만큼 진심은 아닐 터였다.

그는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스케치북과 색연필, 열쇠와 판사봉을 바리바리 싸맸다. 가방이며 보자기처럼 담을 것이 없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중 가장 불필요한 물건을 꼽으라면 당연히 판사봉이었다. 스케치북과 색연필은 마법사와 소통하게 해 주는 그야말로 요술 지팡이였으며 열쇠는 창고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판사봉은 서준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 주는 것 외의 기능은 전무했다. 차라리 납치범이 코앞에 있다면 정수리가 납작해지도록 두드렸을 테지만, 밀실에 납치범과 함께 갇힌 사람은 마법사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서준은 제 미련스러운 성미를 탓하며 창고 앞까지 발을 질질 끌었다.

조금 전과 한 치도 다름없는 광경이 점점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평범하게 낡은 문은 여느 가정집의 안온한 복도 끄트머리에 있기에 썩 어울렸다. 하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살인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창고 안쪽에서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서준은 손에 쥔 열쇠를 문손잡이 밑구멍으로 살며시 밀어 넣었다.

뻑뻑하게 걸리는 곳 없이 열쇠가 부드럽게 들어갔다. 머릿속으로 납치범이 주저앉아 홀로 기름칠하는 모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창고의 문이 열렸다…….

“큼, 크흠.”

서준이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해 댔다. 바닥에는 묵직하게 덩어리진 먼지가 굴러다니고 어쩐지 습한 냄새가 났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창고의 벽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거멓게 썩은 판자는 쿰쿰한 좀내를 풍겼다.

관리는 개뿔! 그는 납치범의 어설픈 위생 관리에 벌컥 역정이 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기대한 탓이 컸다.

“에라이….”

피부를 더듬던 공포가 가라앉고 남은 자리를 차지한 건 짜증이었다. 정수리까지 비죽이 올라왔던 긴장감이 아래로 쑥 꺼졌다.

본디 마음을 조이고 정신을 바짝 차리기란 힘이 드는데, 하물며 서준처럼 근성이 나약하고 몸뚱이가 비실거리는 사람일수록 더한 법이었다.

그는 찬찬히 창고를 살폈다. 창고는 그리 넓지 않았다. 4평은 될까 싶은 크기에 그마저도 온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오른쪽 한쪽 벽 전체를 철제 선반이 차지했는데, 선반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며 고물이 올라가 어수선하니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정면의 벽 위쪽에는 협소한 크기의 창문이 있었다. 들창은 바깥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준은 혹여 저곳으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슬쩍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곧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창문에 몸을 들이밀려면 어깨를 뽑아버리든가, 접어버리든가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쇠창살이 감옥처럼 비죽 솟아 있었다. 그는 도무지 멀쩡한 몸뚱이로 창고를 벗어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창고에 들어온 순간부터 못내 신경 쓰이던 부분이 있었다. 서준은 껴안은 짐을 구석에 내려놓은 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벽과 나무 바닥에 아낌없이 흩뿌려진 자국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핏자국이었다.

제때 닦아 내지 않았는지 변색한 흔적이 여실했다. 마대 자루 속 손가락이 구부려지고 펴지기를 반복했다.

서준은 내심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교환 일기의 내용이 모두 거짓부렁이길 기대했다. 그러나 창고의 참혹한 핏자국은 그의 안일한 마음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S의 범행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이거 무죄를 증명하는 게 가능한가? 아니, 애초에 무죄가 아닌 거 같은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돌연 마법사의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 내 목소리 잘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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