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15)화 (115/156)

#114

누군가 우악스럽게 쥐었던 것처럼 우그러진 자국이 남은 종이에 적힌 내용은 놀랍게도 사랑의 고백이었다.

눈을 멍청하게 끔뻑거린 서준은 까칠하고 빳빳한 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소중한 피부를 이런 사포 같은 물건으로 비빌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잠시 눈꺼풀을 내리고 안구에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일기장을 내려다보아도 문구가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으응?”

어리둥절한 머리통이 옆으로 갸웃 기울어졌다. 도대체 에이미가 누구란 말인가? 그러잖아도 뜬금없는 제삼자의 등장이 당혹스러운데 애절한 사랑의 말을 쓴 범인이 S라는 것이 놀라움을 배가시켰다.

‘누구를 좋아한다든가 그런 티는 조금도 나지 않았는데……. 내가 놓친 부분이라도 있나?’

서준은 억울하기까지 한 심정이 들어 불편한 손으로 잽싸게 재독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에이미란 이름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딱 한 번 나왔으며 고백을 토로한 사람도 S가 맞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에이미의 존재감이 워낙 대단해, 충격적이고 빠른 전개에 놀랄 틈도 없었다.

‘잠깐. 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여기서 이름이 나올 만한 여자라고 해 봤자 T와 D가 전부야.’

영양사 먼시 양이 있기야 하지만 그녀는 비율을 따지자면 연구소 측의 아군에 가까웠으며, S는 L을 통해 무언가 대단히 인간적으로 결함 있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불현듯이 먼시 양에게 애정을 느꼈을 가능성은 작았다. 설마 그녀의 이름이 에이미 먼시일 여지 또한 희박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라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에이미는 D일 게 확실했다. 아무래도 S나 L, T, D라는 알파벳은 이름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게 아니라 암호명에 가까운 듯했다.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했지만 서준의 눈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러면 S는 D를 질투한 게 아니라 좋아했단 말이야? 도대체 언제부터?’

그는 도저히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서준은 본디 애정과 관련된 기류에 특히 취약했다. 길버트의 기만을 밝혀 버린 대가로 플로렌스의 연애 상담 따위를 종종 듣기야 했다. 하지만 요한의 사랑 고백을 빙자한 폭격을 당하기 전까지는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과 큰 인연이 없었다.

“으…….”

창백하게 희던 뺨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느닷없이 떠오른 목소리가 귓구멍의 연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닌데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들었다. 서준은 갓 날갯짓을 배운 새끼 새처럼 팔을 파닥거렸다.

물론 그는 새끼 새가 아니라 키가 크고 팔이 긴 건장한 사내였으므로 몹시 보기 흉했다. 마법사가 쯧쯧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서준이 달아오른 얼굴로 괜히 CCTV 근처를 노려보았다. 저놈의 마법사는 사람을 낯부끄럽게 하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돋는 걸까? 그래도 무신경한 혓바닥 덕분에 열기를 가라앉힌 그는 한결 차분한 눈으로 무지 노트를 응시했다.

교환 일기에는 D를 사랑하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한 명은 감정 기복이 여름날 장마처럼 오락가락하는 S였고, 남은 한 명은 은근히 언급만 될 뿐이지만 감정의 색채가 짙고 열렬한 들개였다.

교환 일기의 끝자락을 통해 지금까지 도통 납득이 가지 않던 수많은 것들이 이해가 됐다. 특히 마대 자루를 씌운 이유만은 더없이 확고했다. 바로 납치범에게 자신은 S의 대역이자 살인 용의자였다. 끝내 D를 살해한 게 S라면, 납치범의 정체는 들개이리라.

“그리고 내가 납치당한 이유라면, 아, 이 씹새끼!”

긴 탄식이 얇은 입술과 구멍이 성기게 뚫린 마대 자루 틈으로 새어 나왔다. 하필 서준은 S와 비슷한 장신의 마른 체격에 그가 투명 인간의 저택을 탈출하면 바꾸고 싶어 하던 요소까지 죄다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납치당하기 직전 무엇을 했던가? 그는 오른손에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라이터를 찾아 뒤적거렸다. 뒤에서 광견병에 걸린 들개가 저를 먹잇감으로 점찍은 줄도 모르고…….

살다 살다 외모로 이런 오해를 받을 줄 몰랐기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뜨끈뜨끈한 정수리 덕에 난로가 따로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서준은 천장의 붉은 점을 힐끔거렸다. 마법사도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을까? 그렇다면 납치범이 제풀에 쓰러져 다행이었다. 교환 일기에는 들개의 생김새가 그리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으나, 마법사가 서준과 엇비슷한 체격이라면 팀 정도로 왜소한 상대가 아닌 한 박투를 벌여도 이기기 어려웠다. 특히 그가 납치당하던 당시를 떠올려 보면 들개는 모종의 수단을 겸비한 듯했다.

서준은 재판장을 넓게 둘러보았다. 처음 눈을 떴을 당시에는 더럭 겁이 나 모든 게 버거웠지만 마법사와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며 이곳의 정체를 파악하자 그때만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교환 일기와 피험자의 정보가 적힌 파일을 단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손목을 열심히 돌렸다. 이번만큼은 요약해도 적어야 할 것이 많았다.

***

[그래서, 그쪽에 있는 진짜 마법사는 D=에이미라는 여자의 죽음에 S가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S에게 무죄를 증명하라는 상황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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