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흐어으…….”
판사봉으로 허리며 어깨를 두드린 서준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하도 집중해서 읽다 보니 몸이 뻣뻣하게 굳어 이곳저곳이 쑤셨다. 하기야 멋대로 사람을 기절시켜서 의자에 묶어 놓은 납치범이 편한 자세를 고려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는 제가 뱀 허물처럼 벗어던져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밧줄을 보며 혀를 찼다.
‘생각해 보면 저건 일종의 소품이었던 거지. 상대에게 죄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고 했던 건가?’
그랬다면 밧줄이 유독 허술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납치범이 의도했을 광경은 죄인이 밧줄에 꽁꽁 둘러매어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죄를 들켰다는 불안에 동분서주하는 모습이었을 터였다. 물론 서준이야 기가 찼다.
기껏 무대를 마련했으면 뭐 하는가? 가장 중요한 죄인을 엉뚱한 사람으로 데려왔는데! 게다가 마법사의 증언에 의하면 서준이 첫 번째 희생양도 아니었다. 저택 어딘가에는 벗어나지 못하고 납치범에 의해 살해당한 시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죽었다는 ‘그녀’는 한 명인데 끊임없이 범인이 공급되는 건 이상했다.
‘한 사람을 여럿이 죽였다… 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잡혀 온 것 자체가 납치범의 비이성적인 정신머리의 증거나 마찬가지야.’
그는 현생은커녕 전생에도 이들과 연관된 적 없었으므로 당당했다. 서준은 무심코 판사봉으로 목뒤를 툭 때렸다. 나무로 만든 판사봉이 금속과 닿아 맑고 쨍한 소리를 냈다.
“악, 씨발!”
제풀에 놀란 서준이 빽 욕설을 내뱉었다. 다행스럽게도, 혹은 아쉽게도 이 정도로 잠금장치가 풀리지는 않았다. 약간의 흔들림이나 접촉으로는 터지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는 식은땀을 대강 닦았다.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목의 잠금장치가 아무런 일 없이 잠잠해진 걸 확인한 후에야 서준은 판사봉을 안마봉으로 탈바꿈해 우울한 기분을 약간이나마 풀어 주었다.
‘아직 일기 초반이지만 D에 관한 내용은 적어. 비중이 작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교환 일기에 의하면 D는 이전부터 연구소에 있던 S나 L, T보다 강도 높은 실험을 당한 모양이었다. 연구원은 투명 인간을 만들겠다는 일념 아래 그녀의 육신을 제멋대로 다루었다. 후원자의 압박이 심해지자 D에게 매진했고 자연스럽게 남은 인원은 방치되었다.
만약 이기적인 성격이라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실험 대상들은 자신도 실험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D를 가엾게 여기고 그녀의 고통에 분노했다. 일기를 읽을수록 실험체라고 불리는 4명의 청년에게 연민이 갔다.
서준은 뻑뻑한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스케치북을 잡았다. 지금은 타인을 동정할 때가 아니었지만 속이 갑갑하고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뭐 찾은 거라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