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요한은 더운 땀을 닦았다. 손에 낀 목장갑은 크리스티나의 없는 게 없고, 있는 건 있는 놀라운 공구 상자에 들어 있던 선물이었다. 도로 한복판에 누운 나무를 치우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귀여운 노란 자동차에 등을 기댄 그는 열이 오르는 몸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물을 마셨다.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평소에는 과시하지 않는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이 드러났다. 요한의 차림새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청바지에 운동화, 별반 무늬 없는 하얀 티셔츠로 단순했다. 아무런 고민 없이 청춘을 구가하는 보편적인 젊은이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는 드물게도 침울한 기색을 띠었다. 건강한 혈색을 지닌 입술 사이로 침통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후우…….”
사실 요한은 조금 의기소침하던 차였다. 서준과 재회하리라 믿었던 디코이 모텔에서 결국 그와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 시간이 지날수록 두툼한 대흉근을 아리게 만들었다. 자칭 악마가 몹시 자만을 떨어 댔지만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더해서 투명 인간을 만났다는 흥분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애당초 그게 정말 투명 인간이긴 했을까?
하다못해 증거 사진이라도 찍어 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요한은 아쉬움에 뒤늦게 입맛을 다셨다. 요즘 들어 부쩍 줄어든 자존감은 자신을 향한 확신조차 쪼그라들게 했다.
이게 다 불규칙한 생활 습관 때문이리라. 요한은 서글픈 기분으로 휴대 전화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널 쫓아간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혹시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도 싶었다. 간절히 애원을 호소하려는 손가락을 붙드는 건 상식이었다. 정밀하게 쌓은 지식이기도 했다.
“준이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우수에 찬 눈망울이 해를 가려 흐려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향을 떠난 슬픔이 요한을 감성적인 인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친구나 가족,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니 세상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온실 속 화초나 다름없었다.
“이런 게 사랑의 고통…일까?”
그렇게 같잖은 감수성에 빠져 있던 요한은 충분히 염병을 떨고 난 뒤, 큼직한 몸을 굽이굽이 접어 운전석으로 구겨 넣었다. 목장갑을 훌훌 벗어 던진 후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변속 레버를 당겼다. 곧 노란 자동차가 텅 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의 뒤에는 벼락 맞은 나무가 숲 어귀에 아무렇게나 밀려 있었다.
“아아, 정말 감사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지도 몰라요.”
“하하, 설마요.”
요컨대 본인을 팀이라고 소개한 히치하이커를 태운 것은 요한의 본의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도로 한가운데 대자로 퍼져 있는 대신 도로 근처에서 얌전히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면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달렸을 터이다. 하지만 날은 대낮이었고, 팀은 도로 중앙에서 비틀거리더니 쓰러져 버렸으며,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차의 내구성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이 노랗고 귀여운, 일견 장난감 같은 외양의 자동차는 이래 봬도 중고였으므로 사람을 쳤다가는 그대로 폐차를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이라는 너른 나라에 차 없이 돌아다니기란 참으로 고된 노동이다.
요한은 필연적으로 속도를 줄였다. 그러고는 쓰러진 사람을 살살 피해 가려 할 때였다. 수분이 부족한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앞 유리창을 맨손으로 두드렸다.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좁은 왜소한 남자였다. 안색은 병자처럼 희끄무레했으며 표정이 몹시 다급했다. 볼록하게 혹이 돋은 이마가 유독 돋보였다. 도저히 떨어질 기세가 아니어서 요한은 할 수 없이 창문을 내렸다. 머리를 내민 그는 곤란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저기요. 왜 그러세요?”
“아, 살았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기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는 히치하이커인데 저기, 숲에서 길을 헤매다가 겨우 빠져나왔어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먹고 마실 것조차 전부 떨어졌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사례라면 반드시, 반드시 할게요.”
남자는 재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는 요한이 도와준다고 말할 때까지 들러붙을 심산인 듯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요한은 히치하이커를 태워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실용의 문제였다. 그와 동행하는 만큼 기존의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될 건 뻔할 뻔 자였다.
요한의 거절을 들은 히치하이커의 애원과 간청이 지난하게 이어졌다. 당장 그를 떼어 놓는 방법이라고는 차로 치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요한의 머릿속에도 그런 비효율적인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 정도는 들어 있었다. 그리고 무용하게 시간만 잡아먹는 실랑이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는 들인 노력에 비하여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요한은 아쉽게 뒤를 쳐다보았다. 온 거리만큼이나 가야 하는 거리가 멀었다.
결과적으로 요한은 자신의 옆자리를 남자에게 내어 주었다. 히치하이커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그의 이름은 팀이었다.
“방향이 같아서 다행이에요.”
요한은 팀의 성격이 제법 뻔뻔하다고 판단했다. 하기야 생판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며 여행하는 남자이니 어느 정도는 낯짝이 두꺼워야 가능한 일이리라. 그는 별 볼 일 없는 추임새에도 만족하며 수다스럽게 말을 쏟아 냈다.
“천재지변에 휩쓸린 연구소…….”
“친구끼리 칼부림을 벌인 붉은 방…….”
“몽고메리 말라달리의 운동화…….”
대부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요한의 귀를 잠깐이나마 솔깃하게 만든 건 투명 인간 운운하는 내용뿐이었다. 그조차도 디코이 모텔에서 투명 인간과 조우했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흘려들었을 것이다.
요한이 맑은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드넓은 하늘은 회색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햇빛이 새어 나올 틈 없이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어둡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 와중에도 팀은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그는 마치 배꼽을 누르면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인형 같았다. 살짝 거슬리지만 충분히 무시가 가능한, 그런 일상적이지 않은 소음.
인형이라. 요한의 머릿속에서 문득 자그마한 곰 인형이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룸 미러를 향했다. 그곳에는 십자가만이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그 눈빛의 방향을 눈치챈 인형이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독실하신가 봐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요한은 대강 대답했다. 그러나 팀은 어두운 갈색 눈동자를 반짝 빛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하도 말을 많이 해 목구멍이 메말랐던 모양이다. 그는 은밀한 어투로 속닥거렸다.
“그러시다면 제가 지금 들려 드릴 괴담이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팀의 말꼬리에는 선뜩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괴담이요?”
지금껏 조용하던 요한이 관심을 보이자 이마를 문지르던 팀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아래에 내려 두었던 배낭을 다시 끌어안으며 즐겁게 입을 열었다.
“네. 조용하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니 이런 상황과 어울리는 괴담을 들려 드릴게요.”
그렇게 팀은 히치하이커 괴담을 이야기했다. 티모트라는 불운한 젊은이의 삶과 죽음이었다. 잘못 편집된 책장처럼 붙어 버린 죽음 이후의 면면을 노래하듯 풀어놓았다. 팀은 스스로 티모트가 된 것처럼 면밀하고 자세하게, 어떨 때는 집요하게 묘사하고 설명했다.
티모트가 바위에서 내려올 때 찧었다는 이마를 말할 때는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고, 티모트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고 말할 때는 자신의 무릎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마침내 티모트는 죽어 수풀에 버려졌다. 팀은 그의 지독한 원한과 원망을 수려한 어휘로 재현했다. 그리고 히치하이커 괴담을 전부 들은 요한의 감상은 아래와 같다.
별로 자극적이지 않아 서준의 취향도 아니니, 구태여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팀은 기대가 서린 눈빛으로 요한을 응시했다. 열렬한 시선은 때로 물질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한은 팀에게 들려줄 평가가 별반 마땅치 않았다.
그는 의외로 문학을 즐기는 청년이었으나 도통 귀신이니, 유령이니 하는 비실체적인 존재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람이 죽을 때 사라진다는 영혼의 무게도 그렇다. 요한의 태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괴수를 겪고도, 혹은 겪었기에 더더욱 확고해졌다. 간단히 말해 그는 귀신을 믿지 않으므로 팀이 여봐란듯이 티 내는 흔적들을 말끔히 무시했다.
“음, 재미없었나 봐요.”
그래서 팀은 곤란해졌다. 팀, 티모트, 또는 히치하이커를 자칭하는 운이 좋은 남자는 배낭 속 기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이제 휴대 전화는 쓰지 못할 터이고 당연한 순서로 저 감흥 없는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새겨질 것이다. 그는 스스로 격려했다. 자신을 보듬으며 행운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가 만들어 낸 히치하이커 괴담은 의외로 거짓인 부분이 적었다. 가정불화나 빚 따위는 없었지만, 숱한 자살 시도는 분명한 진실이었다.
팀은 불치의 환자였다. 젊고 재능 있는 남자는 아름다운 연인, 화목한 가족, 부유한 집안 등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걸 손에 쥐었다. 팀은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돋아난 병마는 팀의 확신을 꺾어 버렸다. 관리만 제때 한다면 죽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언제나 성공만을 한 남자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무기력한 몸뚱이가 볼품없이 침실에 누워 삭아 가리란 것에 절규했다. 그래서 팀은 결단을 내렸다. 차라리 더 처참하게, 더 처절하게 끝을 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팀은 정말로 운이 좋았다.
다양한 시도가 다양하게 무너졌다. 격렬한 끝 따위는 선사하지 않겠다는 양 하늘은 그의 생명을 부단히 이어 주었다. 그리하여 팀이 고전적이고 진부한 올가미에 목을 넣었을 때, 심지어 그 밧줄이 끊어졌을 때.
팀은 죽음을 포기했다. 괴담의 티모트처럼 희망에 차 삶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그는 지난한 시도로 인해 심신이 피로했다. 갑작스레 모든 게 지겨워져 안락한 침대에 누워 한숨 잠이나 자고 싶었다. 정신은 피로했고 육체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날은 어두웠다.
그는 숲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차를 운전했다. 눈꺼풀의 무게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미처 감기기 전 새하얀 다리가 잔상처럼 남았다. 그러곤 둔중한 충격이 자동차 앞쪽의 보닛을 강타했다.
팀이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자동차의 시동을 끄지 않아 전조등이 쓰러진 사람의 다리를 희게 비쳤다. 엔진 소리, 까마귀 우는 소리, 그리고 작게 신음을 흘리는 소리……. 부릅뜬 눈이 아래를 향했다. 도로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