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겹쳐진 수건 위로 떠오른 발자국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까치발을 들었는지 수건에 눌리는 자국은 발 앞꿈치뿐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발의 주인은 요한이 저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했는지 돌연 다다닥 뛰어오기 시작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어떠한 열기를 깨달았을 때 요한은 반사적으로 손에 든 것을 휘둘렀다.
푸욱!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없을 허공에 칼이 박혀 들어갔다. 분명 텅 빈 공중을 찔렀다. 하지만 칼의 손잡이를 놓자 공중에 박힌 흉기가 부르르 떨리며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요한은 눈을 깜빡거리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손끝에서 걸리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는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허공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새하얀 칼날을 타고 흐르던 핏물은 곧 부글거리더니 앞으로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아앗!”
요한은 깜짝 놀라 황급히 화장실에서 나가 몸을 옆으로 피했다. 이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허공을 찢고 터진 피는 온 화장실을 적시다 못해 열린 문 바깥으로까지 솟아올라 벽을 적셨다. 마치 원래 그런 모양이었다는 듯 핏방울이 안 튄 곳이 없었다. 끔찍하다 못해 대단한 광경에 파란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999호실이 순식간에 도살장으로 변모했다. 충분히 피를 본 칼은 수건 위로 폭 떨어졌다. 평소 부동심을 중요시 여기는 요한도 이쯤 되니 당황스러웠다.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 칼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막막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이거 내가 치워야 되나?”
앞날이 아뜩해졌다. 물론 치우지 않고 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디코이 모텔을 떠난다면 지명 수배자가 될 것도 자명했다. 역시 자칭 악마를 믿으면 안 됐던 걸까? 요한이 드물게 우울하려던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노크에 고개를 비죽 내밀어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나 누군가 찾아오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불청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쳤다. 손바닥이며 주먹 등 다양하기도 했다. 결국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팔짱을 끼고 어깨를 벽에 기댔다. 삐뚜름하게 선 요한이 입을 열었다.
“누구신가요?”
“청소 스태프입니다. 부르셨지요?”
낮고 지친 목소리가 대꾸했다. 순간 귀가 팔랑거렸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런 상황에 청소부라니, 이보다 더 유혹적인 직업이 있을까? 비록 그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왕 온 김에 치워 준다면 무척이나 편하고 좋을 것이다.
“음….”
그러나 요한은 선뜻 문을 여는 대신 다시 한번 고심했다. 물론 마음이야 당장 청소부를 맞이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방의 꼴을 다른 사람이 봤다가는 신고당할 일만 남았다.
“아니요, 부른 적 없습니다. 괜찮아요.”
“…….”
대답이 없었다. 요한은 조금 더 친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정말 들어가지 않아도 되나요?”
청소부가 되물었다. 혹시 이 시간에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월급을 못 받는 걸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한도 약간 미안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휘파람처럼 가느다랗고 미약한 목소리였다. 요한은 청소부의 감사 인사에 볼을 긁었다. 무엇이 고맙다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청소하기가 싫었나? 문득 궁금증이 일어 직접 물어보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산한 복도를 빤히 바라보던 요한은 어깨를 추어올리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놀라운 경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
“어?”
한 번 밖에 나갔다 왔을 뿐인데 사방팔방 튄 핏자국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 999호실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했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방금 한 가지 가설이 요한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는 입을 주먹으로 막았다. 설마 싶었으나 가능성이 높았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감격으로 가늘게 떨렸다. 요한은 무릎을 꿇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준아, 나 투명 인간을 무찔렀어…!”
양손이 기도하듯 깍지를 끼고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건 대단한 이야깃거리였다. 틀림없이 서준도 영화 감상보다는 투명 인간을 훨씬 더 흥미롭게 여길 게 분명했다. 양과 함께 가물가물 찾아오던 잠이 숨을 한 번 쉴 만한 아주 짧은 동안 사라졌다. 그야말로 알코올이 증발하듯 깔끔하게 휘발되었다.
요한은 결정과 행동이 빠른 남자였다. 그는 당장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가벼운 몸으로 온 터라 준비도 금방이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는 요한의 목과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행복하게 빛났다. 서준과 만나고픈 욕망이 어느 때보다 뜨겁게 들끓었다.
“아, 테이프.”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요한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는 오묘한 시선으로 비디오 플레이어를 흘겨보았다. 지금은 야심한 시각이었으니 대여점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점원의 말에 따르면 자체적으로 대여물을 수거하는 서비스까지 시행 중이라지 않았나? 고민은 빠르게 끝났다.
“여기 두면 되겠네.”
요한은 씩 웃고는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
과연 생각하였던 대로 비디오 대여점은 불이 꺼져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비좁은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비록 이전과 같이 서준의 목적지 외에는 아는 게 없어 앞날이 막막했지만, 사실 늘 그래 왔으니 크게 상심할 일이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멜린다의 애칭도 린디였지.”
세상에는 참 별난 우연도 다 있었다. 요한은 린디와 애드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말끔하게 지워 버리고는 오직 투명 인간만을 남겨 두었다.
그렇게 장난감 같은 노란 자동차는 디코이 모텔을 빠져나가 4-4-4호선 도로를 탔다. 주저 없이 떠난 차는 정말로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고, 마지막에는 노란 점이 되어 사라졌다.
“흠, 흠, 음, 음.”
승강기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가볍게 걸어 나왔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붉은 카펫 위에서 살짝살짝 뛰거나 재게 놀리는 발이 무척 가뿐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을 문지르며 작은 새처럼 뽀르르 달렸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그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999호실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복제 열쇠를 밀어 넣는 손길이 능숙했다. 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그는 성실한 직원이자, 두루 발이 넓은 친구이자, 기묘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비디오 대여점의 점원이었다. 린디와 애드의 홈 비디오를 발견한 게 그라는 사실은 숱한 사람들에게 크나큰 재난이자 불행이었다.
린디와 애드의 홈 비디오는 애당초 규칙만 지킨다면 안전했다. 규칙을 몰라도 안전했다. 하지만 잘못된 규칙을 읽어 버린 사람들은 늘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는 했다. 점원은 그들이 비디오테이프에 갇혀 반복되는 지옥에 시달리는 꼴을 즐겼다.
놀랍게도 점원에게 거창한 악의는 없었다. 약간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면 충분했다. 제가 겪지 않으니 당연히 재밌었다. 한 발자국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느끼는 타인의 불행은 자극적이었다. 저번 손님은 운 좋게 떠났지만 그런 우연은 몇 번이고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는 근육 덩어리인 미남자가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꼴을 구경하고 싶어 벌써부터 입꼬리가 근질근질했다. 비디오를 곧장 시청할 기세였으니 지금쯤이면 모든 게 끝났으리라. 복도와 달리 방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점원은 폴짝거리며 999호실로 발을 내디뎠다.
무언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점원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신발에 뭉개진 비디오테이프의 잔해가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온 체중을 실은 점프 덕에 테이프는 완전히 부서졌다.
“어?”
그리고 불이 켜지며 누군가가 그를 맞이했다.
“드디어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