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경찰이신가요?”
“어, 아니요.”
“그럼 다른 손님의 인적 사항은 말해 드릴 수 없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어떻게 안 됩니다.”
프런트의 직원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요한은 대단한 미남이었지만, 세상만사가 죄 귀찮은 직원이 간과 쓸개를 빼 줄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패잔병처럼 프런트에서 물러났다. 차라리 옛날 여인숙처럼 장부를 수기 작성 했다면 몰래 훔쳐보기라도 했겠지만 어설프게나마 전자화된 디코이 모텔의 정보를 빼내기란 어려웠다.
요한은 주머니 속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때 새파란 눈동자에 들어온 간판이 있었다. 바로 편의점이었다. 마침 편의점에 좋은 추억이 있던 그는 다시금 기대를 품고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5분도 되지 않아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편의점 또한 디코이 모텔의 프런트 직원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떨군 요한은 레이지를 그리워했다. 역시 연쇄 살인범 정도가 아니라면 거래가 불가능한 것인가 아쉬워졌다.
요한이 편의점에서 나오자 옆에서 어느 연인이 걸어 나왔다. 여자와 남자는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 비디오테이프로 영화 보는 거 처음이야.”
“정말? 그러면 우리 편의점에서 팝콘 사서 먹으면서 보자. 재밌을 거야.”
그들은 요한을 스쳐 지나가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사이좋게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얼굴에 설핏 부러움이 섞였다. 요한도 서준과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기거나 좁은 방에 들어가 찰싹 들러붙어 영화를 시청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 리스트에는 서준과 함께할 수많은 목록이 있었는데 아직 제대로 이루어진 건 별로 없었다.
그나저나 영화라…. 요한은 서준이 영화를 즐겨 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비디오 대여점의 간판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간교하게 반짝거렸다.
“예? 안대를 한 키가 큰 손님이요? 아, 왔었어요.”
눈높이가 낮은 비디오 대여점 점원이 발랄하게 대꾸했다. 서준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점원이 히히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뻐드렁니가 슬쩍 엿보였다.
“아는 사이신가 봐요?”
넌지시 물어보는 점원에게 요한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꿉친구예요.”
“아아, 친구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는 좋죠. 아무래도 서로의 마음을 금방 이해하기도 하고요. 참, 그 손님이 몇 호실에 묵었는지 알려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요한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구태여 제지하지 않고 방긋거렸다. 점원이 유독 맑은 목소리로 까르륵 웃었다.
“매출을 올려 드리면 알려 드릴게요! 아, 그리고 이 비디오가 그 손님이 빌렸던 거예요. 이걸로 빌려드릴까요?”
점원이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빠르게 휘젓는 손길 탓에 제목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으나, 애초에 요한은 제목이 ‘쿼터백, 지옥에서 올라온 일곱 자매와 죽음의 난교 후 사지폭발 고자되다’ 운운하는 수준이라도 기껍게 빌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점원이 내민 비디오테이프는 몹시 얌전한 제목이었다.
“실제상황?”
“네. 인기 좋거든요. 모텔 이용객이시면 반납하러 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희가 수거하는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으시거든요. 참, 그 손님은 999호실에서 숙박하셨어요.”
점원의 은근한 귀띔에 요한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검은 봉투에 들어간 테이프는 가벼웠다. 단단한 손이 봉투를 받아 들자 점원이 덧붙이듯 말했다.
“대여 기간은 하루고요, 비디오가 파손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예. 그럼 수고해요.”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비디오 대여점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장 모텔 프런트로 가 999호실이 비어 있는지 확인했다. 직원은 애써 방을 지정하는 것에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물론 일부러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비어 있다는 대답과 함께 열쇠를 건네받은 요한은 그렇게 서준이 머물렀던 방에 당당히 발을 들였다.
999호실의 문을 열자 무언가 팔랑 떨어졌다.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였다. 그는 그것을 대충 주워 쓰러지지 않도록 벽에 세운 다음 곧바로 짧은 복도를 지나 방으로 향했다. 먼저 닫힌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부르르 어깨를 떤 요한이 다시 창문을 닫았다.
괜히 코를 킁킁거렸지만 이렇다 할 냄새는 나지 않았다. 미련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남았다. 서운한 마음이 들어 재떨이를 쑤석거렸다. 물론 청소를 끝낸 방에는 이렇다 할 쓰레기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비디오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시켰다. 리모컨을 손에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가 등을 기댔다. 왼손은 머리 뒤에 두었다. 운동화가 이불을 대강 찰 무렵 드디어 TV 화면이 밝아졌다.
‘실제상황’의 시작이었다.
높은 웃음소리가 먼저 들렸다. 새하얀 화면에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벼운 잠옷을 입고 새빨간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여자였다. 나이는 서른 살쯤 되었을까? 눈 밑이 약간 주름졌지만, 온 얼굴에서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녀가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애드, 애드! 나 제대로 찍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