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막 화장실의 문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기시감이라 말하기조차 민망했다. 마침 서준은 이와 똑같은 광경을 보지 않았던가? 순간 목덜미가 섬뜩해졌다. 머릿속이 아득하니 멍해지고 희게 질린 뺨은 뻣뻣해졌다.
목이 어색하게 왼쪽을 바라보았다. 제자리에 못 박힌 몸뚱이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발바닥은 아교를 붙인 듯 바닥에 딱 들러붙었다. 그러자 서준을 재촉하듯 다시 똑똑,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는다면 더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막연한 공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서준은 발을 억지로 떼 내어 슬금슬금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에 뺨을 대었다. 차가운 문의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으나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미약한 반응조차 문 바깥에 크게 전달이 될까 두려웠다. 이제 엄지손톱만 한 현관문 외시경 렌즈에 눈을 가까이 할 일만 남았다. 눈 밑의 살이 움찔 떨렸다. 혹여 몰래 살피는 순간 눈이 찔리는 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릅뜬 눈에 비친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새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청소부였다.
탄식이 새어 나올 뻔한 게 먼저였는지, 아니면 하나 남은 안구가 튀어나올 뻔한 게 먼저였는지…. 다행히 둘 다 체내로 잘 수납했다. 서준은 벌렁거리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와 조세프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서준은 애초에 화장실 문을 열어 두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자빠질 일 없이 무사히 퇴보했다. 그러나 인생과 세상일이 늘 그렇듯 운 좋게 흘러가지만도 않았다.
삐리릭 삐리릭 전화음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는 갓 태어난 갓난아기가 울부짖는 듯이 귓구멍을 찔러 댔다.
“헉!”
심지어 전화기 소리를 들은 건지 바깥의 청소부가 문을 꽝꽝 쳐 대기 시작했다. 난폭한 기세에 서준은 기가 죽어 침을 꼴깍 삼켰다. 양쪽으로 난리도 이만한 난리가 없었다.
서준은 돌연 억울해졌다. 복도에서 저토록 난동을 부리는데 다른 방 사람이 항의하러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디코이 모텔의 숙박객들은 다들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지 얼굴 한번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짧은 정신적 도피를 끝낸 서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지? 왜 영화랑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때 머릿속에 영화의 제목이 스쳐 지나갔다. 실제상황…. 그건 단순히 제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다 직접적인 암시였던 게 아닐까?
예를 들면, 말 그대로 실제로 있었던 일의 기록 같은 것.
서준의 낯짝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러잖아도 허여멀겋던 얼굴에서 핏기가 쭉 빠져나갔다. 얼토당토않은 가설이 제가 진실이라는 듯 몸을 흔들어 댔다. 고막을 괴롭히는 현실에서 눈꺼풀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이를 갈며 눈을 번쩍 떴다.
‘일단 그만 생각하자.’
수많은 잡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가도 당장 무엇이 옳고 틀린지 검증할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그럴 마음도 없었다. 서준은 그렇게까지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검은 눈을 가늘게 뜬 서준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왜 조세프가 창문으로 달려갔는지 이제야 충분히 이해 갔다. 문 앞이 청소부에게 막힌 작금의 사태에 바깥과 통하는 창문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비쳤다.
도대체가 사람의 얼을 쑥 빼놓는 마당이었다. 전화기는 시끄럽게 울리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체 모를 청소부가 들어오겠다고 깽판을 부리지…. 소음이 연달아 울리니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특히 전자음이 이토록 귀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은 처음 깨달았다. 받지도 않는데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기가 삐리릭삐리릭띠로록띠로롱따르릉 울어 대니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물론 서준이 명경지수의 마음가짐으로 평정심을 찾을 수 있는 인재라면 이 위기를 거뜬히 헤쳐 나갔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재목이 못 되었을 뿐이다. 서준은 빠르게 결심했다.
‘일단 저 전화기를 치우자. 정신 사나워서 뭔 생각을 못 하겠어.’
그는 전화기를 덥석 붙잡고는 연결된 전화 케이블을 뽑았다. 그때 전기가 튀며 손끝이 따끔했다.
“으악!”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손에서 떨어진 전화기가 와르륵 굴러떨어졌다. 서준 또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자빠졌다. 심박수가 빠르게 오르고 이마가 땀으로 젖었다. 입을 벌려 숨을 내쉬던 서준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었다. 장갑에 관해 변명할 레퍼토리가 늘어났으니 긍정적으로 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는 불시에 닥쳐오는 감전에 대비한다고 말하고 다녀야지. 씨발!’
어리석은 행동은 왜 꼭 저지른 후에야 알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당장 조세프가 당하던 모습을 한 눈으로 똑똑히 봐 두고서 이런 꼴이다. 서준은 아둔한 제 머리에 탄식했다.
삐리릭, 삐리릭…….
하지만 등 뒤에서 음산하게 울리는 전화음을 듣자 그는 단단히 얼어붙었다. 서준의 발치에는 널브러진 전화 케이블이 있었다. 저 소리는 뇌가 만들어 낸 착각이 분명했다. 삐리릭, 삐리릭……. 연달아 울리는 신호가 현실 도피를 차단했다.
서준은 억지로 목을 돌려 뒤를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가 빛을 깜빡거리더니 뚝 끊겼다. 그리고 안도하기도 전에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방이 지저분해 청소부를 올려 보냈습니다.
- 방이 지저분해 청소부를 올려 보냈습니다.
- 방이 지저분해 청소부를 올려 보냈습니다…….
녹음한 내용을 틀어 놓은 듯 동일한 음정으로 똑같은 말이 반복됐다. 서준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깔깔한 목구멍이 쓰라렸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겅중겅중 전화기를 뛰어넘어 침대 구석으로 뭉쳐 놓은 이불보를 몽땅 끌어 내렸다. 품 가득 껴안은 침구로 전화기를 둘둘 싸맸다.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물리적으로 막아 버리자 웅웅거릴 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이를 악문 서준이 전화기와 이불 뭉치를 방구석으로 꾹 밀어 넣었다. 그는 뜨겁게 열이 오른 두피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이쯤 되자 눈치를 못 채는 게 더 어려웠다. 이건 상황이 약간 다르기야 하지만 조세프가 겪었던 일의 반복이었다. 즉, ‘실제상황’이 재현되는 중이었다.
깨닫자 등줄기를 타고 섬뜩한 감각이 올라왔다.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이 침대를 향했다. 정확하게는 그늘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침대 밑이었다.
“…….”
서준은 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직까지는 어디 찌그러진 곳 없이 동그랗지만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곤죽이 되어 버릴 무궁한 가능성을 품은 소중한 두골이었다.
어찌해야 뇌와 뇌를 보호하는 뼈, 숱 많은 머리카락이 달린 가죽을 지킬 수 있나 고민할 때였다. 그는 운명처럼 방바닥에 얌전히 놓인 안내문을 발견했다. 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혀 안쪽으로 침이 고였다. 이것은 괜한 시간 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던 감각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을까?
기실 객실 자체가 넓지 않았고 안내문을 대강 치운 것은 서준이었으니 운명이라는 건 대단히 과장된 감상이었다. 하지만 발견이라는 것은 때때로 사람에게 기이한 감상을 품게 만들며 지금 서준의 심경이 마침 그러했다. 그는 안내문을 낚아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처음 안내문을 보았을 때와는 전연 다른 태도였다.
‘별 이상한 요구가 다 있던 안내문이야. 어쩌면 이런 이상 상황을 염두한 내용일 수도 있어.’
그는 안내문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우선 첫 번째.
1) 밤 10시 이후 소란을 일으키지 마시오
서준의 머리통이 재빨리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시간은 이미 10시를 훌쩍 넘겼다. 그는 억울해져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이야 바른말로 바깥의 저건 내가 피운 소란이 아니지.”
불퉁하게 혼잣말하던 서준이 방구석의 이불 뭉치를 발견했다.
“…….”
사람이 뻔뻔하고 양심이 부족해도 저 거대한 증거물을 앞두고 들을 사람도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지는 못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전화기를 부순 건 제가 일으킨 행패였다. 그는 미련 없이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2) 냉장고의 음료는 마셔도 괜찮습니다.
여느 모텔을 가도 있을 법한 안내 사항이었다. 다만 마셔도 괜찮다는 건 반드시 섭취하라는 의미와 똑같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애매한 항목이었다. 서준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3) 창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지 마시오
“음….”
목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 항목도 안전 관련 수칙으로서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서준이 이미 고개를 조금 내밀어 본 전적이 있다는 부분이다. 서준은 열이 오르는 귓가를 문지르며 침음을 삼켰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겪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는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기함을 토했다.
4) 청소부 방문 시 문을 열어 주세요.
“미쳤냐?”
가당찮은 요구였다. 귀에 머물렀던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바깥에 있는 청소부는 좋게 봐야 정신 이상자, 나쁘게 보면 귀신이었다. 그는 높은 확률로 후자를 점쳤다. 청소부를 맞이했다가는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점차 안내문을 향한 신뢰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아니, 아니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요구 또한 그럴싸했다. 당장 찾아온 청소부의 몰골이 하 수상해서 그렇지 일반적인 청소부라면 문전 박대 하는 게 더 이상했다.
물론 바깥에 있는 청소부는 일반적이지도, 정상적이지도 않았으므로 서준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는 다음 항목을 읽었다.
5) 카펫을 들추지 마시오
“카펫?”
검붉은 색의 카펫은 그리 고급스러운 물건은 아니었다. 적당히 흔한 물품으로 애초에 이게 들리기는 하는 구조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서준은 바닥을 힐끔거리며 운동화 앞코로 슥 문질렀다. 검게 때만 묻어났다.
6) 침대 밑으로 들어가지 마시오
시선을 내린 서준의 어깨가 뻣뻣해졌다. 자의였건 타의였건, 결국 조세프는 이 항목을 지키지 못했다. 자신도 그렇게 되는 걸까? 억지로 끌어당겨져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피를 토하고 죽는 걸까….
무력감이 전신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