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4. 실제상황! 저주받은 비디오
유독 몸이 상쾌하고 가뜬했다. 서준은 어둠을 밀어 내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도로록도로록 굴렀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구를 때마다 익숙지 않은 정보가 조금씩 들어왔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베갯잇, 하나뿐인 눈이 시리도록 복잡한 자주색과 초록색의 아라베스크 무늬 벽지, 날벌레 여럿이 구석에 뭉쳐 있는 형광등, 전원이 꺼진 브라운관 TV 등. 허공을 배회하던 서준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살폈다. 텅 비어 있었다.
“아.”
깔깔한 목에서 의미 없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얄팍한 가슴 가득히 안도감이 채워졌다. 이곳은 평범하고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는 그저 그런 모텔에 불과했다. 그 어떠한 귀신, 좀비, 악마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무난한 장소.
머리가 쪼개질 듯한 두통도 말끔하게 사라지고 피로로 부옇던 시야도 티 없이 환하고 깨끗했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모텔 방이 지금의 서준에게는 고급 호텔의 객실이나 다름없었다. 이 얼마 만에 맞이하는 상쾌한 아침인가? 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는 비실거리는 상반신을 일으켜 창 바깥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했다.
“음, 아침은 아니구나. 뭐, 그래도 날이 맑으니….”
별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리던 밤하늘에 갑작스럽게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무겁고 둔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곧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
하늘이 그를 조롱한다고 여기는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서준은 길게 호흡한 뒤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배낭을 주웠다. 뒤적거리며 담배를 찾고 있자니 뒤에서 번개가 땅을 두드렸다. 거미 다리처럼 긴 그림자가 성냥갑 같은 방에 드리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먼 곳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새까만 눈에 실같이 가늘게 그은 금을 남겼다. 하지만 그도 몹시 짧은 시간으로, 빛은 벼락이 사그라들며 함께 사라졌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문 서준은 라이터를 켰다. 아랫부분이 푸르스름한 불꽃이 작은 소리를 내며 켜졌다. 형광등을 켜지 않아 어둑한 방에 붉은 점 같은 불빛이 생겨났다. 맵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문을 연 그는 방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를 끌고 와 궁둥이를 붙였다.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둥그런 의자는 푹신했지만 높이가 무척 낮아 다리가 한참은 남아돌았다. 서준은 다리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창가에 어깨를 기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깥의 축축한 물비린내가 들어왔다. 담뱃잎이 빠르게 타들어 가며 흰 연기가 빗방울 사이로 날아올랐다. 어지럽게 흩날리던 난류는 깜깜한 하늘로 사라졌다. 후우, 하고 내뱉는 숨이 서늘한 옆얼굴을 스쳤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담배를 끼운 서준이 창틀에 턱을 괴고는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사이사이 이끼가 낀 벽돌 수십 장 정도의 거리에 빛나는 네온사인 간판이 보였다. 진공 유리관 속을 가득 채운 네온 가스가 휘황한 오페라 핑크의 색으로 빛났다. 어금니가 담배를 꽉 깨물자, 때마침 구부러진 유리관이 자신을 뽐냈다.
디코이 모텔. 현재 머무는 곳의 이름이었다. 그는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털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빗방울이 맺힌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긴 손가락이 창틀을 툭 건드렸다. 위치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쯤 모텔 옆 주차장에서 초라하게 비를 맞는 트럭이 하나 있을 것이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용케 사고가 나지 않았다. 서준은 남은 눈까지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바로 하루 전의 일이었다.
그는 유타피아를 탈출하며 자신의 정신력이 체력만큼이나 빈약하다는 서글픈 진실을 깨달았다.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그러잖아도 힘을 내야 하는 한쪽 눈마저 게게 풀려 시야가 엉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눈 딱 감고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운전해 줄 대리 기사도 없는 판국에 기절은 상상만으로도 배부른 소리였다. 눈 밑의 기미가 뺨까지 내려온 서준이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세게 주었다. 장갑 속의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고 손톱이 희게 질렸다. 도로는 야속할 지경으로 텅텅 비어 안락하게 몸을 누일 장소 하나 없었다.
‘가로등 간격 참 환상적이다, 환장적이야.’
아무래도 주간 고속 도로 제4-4-4호선은 누군가 정비 비용을 착복한 게 분명했다. 이를 갈며 다른 곳에 신경을 집중해도 정신적, 신체적 피로가 온몸을 좀먹었다.
그래도 신이 그를 버리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서준이 전생의 트럭 운전사와 같은 꼴이 나기 전에 길쭉한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꿀에 이끌리는 벌처럼 파란 트럭이 슬슬슬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은밀히 인체 실험 하는 연구소나 연쇄 살인범이 장악한 병동이 아니었다. 근처에 식당까지 딸린 어엿한 모텔이었다. 버석하게 튼 입술이 벌벌 떨렸다.
“시, 심봤다!”
멍청한 비명이 트럭의 운전석을 뒤흔들었다. 평소라면 질색할 색으로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이 너무나 눈부셨다. 디코이 모텔, 이름까지 번듯했다. 사실 피곤해 반쯤 제정신이 아닌 서준은 하몽 모텔 같은 작명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찬양할 용의가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눈에 씐 콩깍지가 단단해졌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했다. 물론 이는 착각이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디코이 모텔은 제4-4-4호선이 아니라 절묘하게 교차하는 다른 고속 도로를 오가는 사람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진실조차 외면할 정도로 서준은 마음이 급박했다.
낙원까지 가는 길은 막히는 일 없이 평탄했다. 빈자리에 주차까지 마친 손이 운전대를 놓고 허둥거리며 구석에 찌그러진 배낭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휴식을 취하겠다는 포부가 몸뚱이를 움직였다.
“열쇠 챙겼고, 전화 주머니에 있고, 지갑 주머니에….”
그리고 다급하게 문을 열던 서준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블루종 재킷의 주머니를 아무리 뒤지고 탈탈 털어 보아도 지갑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카드나 큰돈을 넣어 두는 용도의 지갑은 가방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가볍게 쓰기 좋도록 약간의 돈을 챙겨 놓은 작은 지갑이 어디로 숨었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온갖 정제되지 않은 욕설이 강퍅한 마음속에서 날아다녔다.
‘어디서 잃어버렸지? 보자, 밥값은 냈었는데….’
서준은 마지막으로 지갑을 꺼냈던 때를 기억했다. 우선 유타피아의 식당에서 계산했을 때까지는 지갑이 존재했다. 하필이면 유타피아의 식당은 요금이 선불이라 그 이후 지갑의 행적이 묘연했다. 가게를 나온 뒤에는 악마와 마주쳐서 통 정신이 없었다.
“으음.”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준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는 깔끔하게 지갑을 포기했다. 잃어버린 장소는커녕 시기조차 가물가물한데 대체 어떻게 찾겠는가? 심지어 지갑을 되찾으려면 유타피아까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서준은 악마가 도사린 동네를 재차 방문할 마음이 결단코 없었다.
“그래도 이거까지 잃어버리면 큰일인데.”
악어가죽으로 만든 장지갑을 쓰다듬으며 서준이 고민했다. 적당히 용돈 수준의 금액만 넣어 두었던 기존의 지갑과 달리 이건 말 그대로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때 서준의 피로한 눈이 룸 미러에 닿았다. 정확하게는 룸 미러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곰 인형이었다.
요한이 준다고 선뜻 말했을 때는 거절했던 곰 인형이 어쩌다 자신의 차 룸 미러에 매달려 자꾸 흔들리는가…. 서준의 귓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곰 인형의 고리를 풀어 지갑에 달았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가죽의 표면과 보들보들한 털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뭐, 이렇게 큰 놈이 덜렁거리는데 설마 또 잃어버리진 않겠지.”
서준은 불길한 복선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이후 그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았다. 옆으로는 일절 신경을 나누지 않고 오로지 정면을 쏘아보며 걸어갔다. 프런트의 직원이 주는 열쇠를 받아 승강기에 타서도, 9층 복도에 내려 맹렬한 기세로 질주할 때에도 그랬다.
마침내 객실에 입성한 그는 신발을 벗으며 침대에 몸을 날렸다. 용수철이 힘겹게 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눈꺼풀을 내렸다. 서준은 곧장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창틀에 고이는 물기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서준이 늘씬한 팔을 뻗어 침대 아래에 던진 재킷을 주워 들었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것치고는 휴대 전화가 부서진 곳 없이 멀쩡했다. 흰 얼굴에 파르란 빛이 번졌다. 시간은 어제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데 날짜만 바뀌었다. 꼬박 하루를 잠으로 날린 것이다.
서준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그 어느 때보다 정신머리가 말짱했다. 과장 좀 보태어 톰팃톳에서 반쯤 광인의 상태로 나돌아다닐 때보다도 머릿속이 맑게 갠 기분이었다.
매캐한 이산화 탄소를 내쉬며 서준이 제 왼손을 활짝 펼쳤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가늘게 흔들렸다.
솔직히 그는 사이코메트리를 과신하고 있었다. 스스로야 경계한다고 여겼으나 진심은 달랐던 모양이다. 톰팃톳에서 급작스럽게 개화한 이 능력은 제멋대로 미래를 던지듯 보여 주던 예지에 비하면 양반처럼 굴었다. 덕분에 서준은 사이코메트리가 예언과는 달리 비교적 앞뒤로 살을 붙인 정황을 알려 주는 능력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유타피아에서 겪었듯, 이도 본인이 가진 배경지식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능력이었다.
‘맹신은 금물이겠어.’
만약 악마의 초현실주의적 과거를 알아낸 뒤 무턱대고 도우드를 생자라 지목했다면 그는 지금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짜릿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리라.
“…….”
담배를 문 입술이 꿈틀거렸다.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준은 고작해야 외숙부를 만나러 가는 길이 너무 험난한 게 아닌가 우울을 곱씹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서준에게도 평판이라는 놈이 존재하기는 했다. 아무리 뚫린 입이라지만 요한에게 망발을 내뱉은 수치심 때문에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며 도주하는 건 도저히 못 할 짓이었다. 그리하여 서준은 대외적인 구실로 외숙부를 꺼내 들었다. 어린 시절 이후 실물로 뵌 적이 없는 친척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면피의 이유로는 훌륭했다. 외숙부는 조지아에 살았는데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톰팃톳과 거의 끝과 끝이었다.
살 없는 등이 가볍게 구부러졌다. 바깥 기온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벽에서는 찬기가 올라왔다. 느슨하게 풀어진 몸을 기대자 열이 올라 발긋하던 뺨이 금세 식었다.
몽롱한 눈빛이 허공을 더듬었다. 애써 꾸린 선물의 포장지가 삭기 전에만 도착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가는 중이기야 했다.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서준이 한숨을 내쉬며 익숙한 한탄을 뱉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그때 얄팍한 윗배에서 꾸르륵 위장이 우는 소리를 냈다. 슬슬 쓰다듬어 보니 가죽 아래가 텅 빈 느낌이었다. 하기야 하루를 꼬박 굶은 셈이다. 침대 옆 방구석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하지만 모텔 냉장고에 뭐 그리 대단한 것이 들었겠는가? 기껏해야 생수병이나 몇 병 있을 것이 뻔했다.
서준은 볼이 홀쭉해지도록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훅 내뱉자 도넛 모양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히죽거리며 웃던 입가가 다시 내려가고, 서준은 재떨이에 담배를 지졌다. 창문을 닫을까 했지만 이왕 열어 놓은 것 환기나 시킬 요량으로 놔둔 채 그는 재킷을 챙겼다. 안대를 걸고 신발까지 신자 그럭저럭 외출할 준비도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지갑을 넣었더니 곰 인형이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서준은 손바닥으로 곰 대가리가 납작해지도록 꾹꾹 눌렀다. 그러나 곰의 반항은 거셌다. 물론 시간을 더 들인다면 곰 인형에게 패배를 안겨 주는 것도 가능했으나 갈수록 허기가 심해졌다. 더 곰과 신경전을 벌이자니 그도 멍청하게 느껴졌다.
결국 곰 인형은 자유를 쟁취했다. 운동화 뒤꿈치를 바닥에 툭툭 치고, 곰 인형을 달랑거리며 현관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서준이 막 문손잡이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아래쪽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뭐야?”
허리를 숙여 집어 드니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였다.
「디코이 모텔에서는 숙박하시는 고객님의 안전과 편의를 위한 안내문을 나눠 드립니다. 숙지하시고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1) 밤 10시 이후 소란을 일으키지 마시오
2) 냉장고의 음료는 마셔도 괜찮습니다.
3) 창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지 마시오
4) 청소부 방문 시 문을 열어 주세요.
5) 카펫을 들추지 마시오
6) 침대 밑으로 들어가지 마시오
7) 화장실 거울에 낙서를 하지 마시오
8) 세면대의 찬물 뜨거운 물 표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9) 변기에 이물질을 버리지 마시오
10) 샤워기 호스를 묶거나 무거운 걸 매달지 마시오
11) 하수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지 마시오
12) 화장실 문이 고장 났으니 닫지 마시오
13) 유선 전화기의 0번은 프런트와 연결됩니다.
14) 전화기에서 이명이 들릴 시 내려놓으시오
15) TV 시청 시, 채널 DULC233E는 나오지 않습니다.
16) TV와 전화기 전원을 뽑지 마시오
17) 비디오 재생 장치에 문제가 생긴 경우, 원인을 제거하시오」